박성환은 경성 반촌 사람이다. 성환은 을미변(을미사변) 이후로 일찍이 보수(報讐, 원수 갚음)의 뜻을 품었는데, 일본의 압박이 날로 심해지고 국가의 큰 명운이 점점 위태로워지자, 성환은 눈물을 흘리며 강개하여, 한 몸의 죽음으로써 보답하고자 하였다. 정미년에 황위가 폐해되자, 성환은 궁중에서 일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화가 임금께 미칠까 두려워 그만두었다. 8월 1일, 장곡천(長谷川, 하세가와 요시미치)이 각 대장을 소집하였는데, 성환은 병을 칭하여 가지 않고 중대장으로 하여금 대신 가게 하였다.
처음에 이토(伊藤)·장곡천이 완용(李完用)과 더불어 군대 해산을 의논하여, 군부로 하여금 기병을 보내 각 대장을 대관정(大觀亭)으로 급히 소집하게 하였다. 이때 여단장 양성환 및 시위연대장·각 부대 단장들이 장곡천의 관저에 모였는데, 군부대신 이병무가 해산 조칙을 읽기를, “오전 중 훈련원에 가서 거행한다.” 하니, 성환은 크게 놀라 얼굴빛을 잃었다. 일본군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만약 항거하면 화가 곧 미칠 터이므로 부득이 돌아와서, 안색이 흙빛과 같았다. 이에 한국 군병 각 대는 모두 훈련원에 갔으나, 오직 시위연대의 두 대대만은 오지 않았다. 일본 무관이 명하여 패검과 견장을 바치게 하고, 칭하기를 “은금(恩金) 7천~8천원을 보수로 준다.” 하여 각각 차례로 나누어주고 흩어지게 하였다. 한국 군병들은 분하여 견디지 못하고, 혹은 눈물을 흘리며 크게 울기도 하고, 혹은 지폐를 찢어 땅에 던지기도 하였다. 그들이 돌아갈 때 길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여 꾸짖기를, “너희들은 군인으로서 헛되이 나라의 녹만 먹고 조금도 보답함이 없이, 몇 장의 종이에 팔려서 기꺼이 남의 종이 되는구나.” 하였다. 군병들은 더욱 분개하였다.
이에 성환이 군대 해산의 조칙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침상을 발로 차고 의자를 치며 큰소리로 통곡하고, 평소의 뜻을 이루지 못함을 개탄하고는 드디어 총을 끌어와 스스로 쏘아 죽었다. 곧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이었다. 처음에 성환은 분개하여 말하기를, “나라에 군병이 있는 까닭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지금 외적이 나라 안에 가득한데 홀연히 군병을 파하고자 하는 것은, 이는 성상의 명이 아니고 역신이 명을 속인 것이다. 나는 비록 죽더라도 명을 받을 수 없다.” 하였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생각하건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모두 일을 일으키지 못하니, 만약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더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지금 성환이 의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고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듯이 여겼으니,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다. 진실로 장하고 또 열렬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죽으면서도 큰 병력을 쥐고 있으면서 어찌 군병을 일으켜 공격하여 결사전을 벌이지 않았는가. 남상덕(南相德)의 호탕한 모습과 같았을 텐데. 그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일찍이 성환을 위하여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다.
출처는 유생 출신이었던 송상도가 독립운동가들의 이력을 모은 책인 "기려수필(騎驢隨筆)"임
'정미년에 황위가 폐위되자 궁중에서 일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부분은 불명확함. 일본측 기록에는 19일 밤의 거사 주동세력을 1연대 1대대가 아니라 2연대 3대대라고 언급하거든
다만 개인적으로 지지했을 가능성은 충분한 편. 그리고 송상도는 박승환이 자결 대신 봉기를 주도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워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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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ㄱ도 좋았을듯 지휘관도 중요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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