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7월 3일 18시 37분, 휴가용 특수군용열차가 샤또티에리 역으로 진입했다. 이 열차는 파리에서 출발하여 니벨 공세가 있었던 슈망데담 방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 보안대장 슈니강 대위는 긴장한 채로 열차를 맞이했다. 그는 앞서 상류 역들로부터 이 열차에 대한 두 통의 전갈을 받았다. 첫 번째 전갈은 모역에서 온 것으로, 열차의 병사들이 "다소 소란스럽다"고 경고했다. 두 번째 전갈은 노장 라르토역에서 온 것으로, 소란스러운 병사들이 주아브 1명을 움직이는 열차 밖으로 던져 버렸다고 보고했다. 휴가에서 복귀 중인 병사들은 파리에서 출발하기 전에 술을 마셨고 기차 안에서도 마셨기에 만취한 상태였다




슈니강은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열차에 탑승했다. 그에게 조르주 중위가 지휘하는 샤쇠르 아 피 90명이 호위로 붙었다. 슈니강이 열차를 순찰하는 동안, 슈니강 측 병사들은 각자 30명으로 이루어진 세 집단으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열차에 진입했다. 7월 초까지 이미 여러 기차역에서 복귀병들과 공권력 사이에 수십 건의 충돌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조르주는 처음엔 별다른 특이사항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슈니강은 걱정스럽게도 열차에 헌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병사들이 여행 내내 아무런 감독 없이 지냈음을 의미했다. 슈니강은 또한 주아브 병사가 열차에서 던져진 것이 아니라, 병사들을 선동하여 전선 복귀를 거부하게 만들려고 차량 사이를 이동하다가 발을 헛디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슈니강은 차장에게 출발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으나, 열차가 출발하자 일부 병사들이 슈니강 측 병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헌병 타도!, 돼지들에게 죽음을!, 자유 만세!라고 외쳤다. 슈니강은 차장에게 열차를 세우라는 신호를 보냈고, 조르주는 부하들에게 열차를 포위하고 질서를 회복시키라고 명령했다. 조르주 본인은 곧바로 병사들에게 둘러싸였는데, 그는 병사들의 상태가 폭도 무리와 같았다고 진술했다. 그중 한 하사가 조르주의 얼굴에 대고 "우리는 전쟁에 지쳤다!"라고 소리쳤다. 조르주는 그 남자를 붙잡아 끌어낸 다음 자기 병사들에게 던져 체포시켰다.




이를 본 병사 두 명이 우리는 그를 잡아가게 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치며 하사를 되찾으려 싸웠다. 슈니강의 병사들은 강경하게 대응했고, 이로 인해 하사를 둘러싼 거대한 난투극이 벌어졌다. 점점 더 많은 병사들이 싸움에 가담했고, 점점 더 많은 병사들이 열차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항명을 일으킨 병사들은 하사를 되찾았고, 슈니강의 병사들은 구타당했다. 슈니강은 이 상황을 "최소 800명의 휴가 복귀병들의 반란"이라고 보고했다.




열차가 도착한 지 약 한 시간 뒤인 19시 30분에 조르주 중위가 부하들과 함께 역 바깥으로 후퇴했다. 슈니강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저의 분견대로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이 사태가 과열되어 더욱 심각한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열차를 선로에 고립시킨 채 제43샤쇠르 아 피 대대로 포위했습니다."




병사들은 역을 점령하고 장악했다. 슈니강은 상부에 전화하여 상황을 알리고 증원을 요청했다. 느와지르섹역의 군사위원은 제빵병들을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슈니강은 제빵병들이 강력한 조치에 다소 부적합할 것이라고 회답했다. 저녁이 되자 슈니강과 조르주는 열차가 출발하는 것을 막고 증원군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포위 작전에 돌입했다.




다음날 새벽 4시 40분에 증원군이 도착했다. 제14샤쇠르 알팽 대대에서 온 300명의 샤쇠르들이었다. 이제 슈니강에겐 약 400명의 병력이 생겼다. 그는 열차를 차량 단위로 분리하여 한 번에 하나씩 역의 가장 먼 쪽 끝으로 옮겼다. 슈니강은 이러한 방식으로 2배 많은 병력을 상대로 국지적인 수적 우위를 확보한 다음 한 번에 하나씩 포위섬멸했다. 헌병군이 주동자를 조사했다. 사건의 시작을 알린 그 하사를 포함하여 13명의 병사가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서 병사들은 전선에서 항명을 일으킨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아침이 되자 저항력을 잃었다. 슈니강은 "불안한 밤 동안의 반성과 보안 병력의 존재가 효과를 발휘했다"고 추론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요인은 병사들이 술을 마신지 11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이었다. 술에서 깨고 맨정신이 된 병사들은 자기들이 무장한 정예병을 상대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질서를 되찾았다. 7월 4일 아침 8시, 예정보다 거의 12시간 늦게, 열차가 조용히 샤또티에리를 떠나 아무 탈 없이 에페르네에 도착했다. 잠시 후 열차에서 떨어졌던 주아브가 역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기 발로 슈니강의 사무실로 찾아가 순순히 체포되었다.






휴가에서 돌아오던 병사들의 항명과 전선 병사들의 항명은 명확한 유사성을 가진다. 전자는 후자의 거울상이었다. 샤또티에리에서 항명한 병사들은 전선의 병사들과 동일한 방식을 따랐다. 집단 음주가 규율을 해체하는 데 따르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병사들은 장교들에 맞서 단결하기 위해 술에 의존했다. 집단 음주가 집단 행동으로 가는 문턱을 넘어서는 데 필요한 정서적 에너지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술이 깨자 정서적 에너지가 사라져 집단 행동이 무너졌다.




기차역 항명은 5월 말부터 7월 말 사이에 흔한 일이었고, 거의 매일, 하루에 여러 번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슈망데담과 파리를 연결하는 노선의 모든 주요 역에서 위 사례와 유사한 휴가 복귀병의 항명이 일어났으며, 특히 샬롱, 크레이, 모에서는 몇 주 동안 수십 건의 사건이 발생했다. 1917년 5월 말부터 8월 초 사이 기차역에서 최소 240건의 항명이 발생했으며, 6월 첫째 주에 급증했다가 월말에 급감했다. 처음에는 엔과 마른 지역에 집중되었으나, 됭케르크, 르아브르, 심지어 보르도까지 먼 후방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각 항명의 평균 규모는 150명이었다. 이는 1917년 6월과 7월에 최소 36,000명이 항명했음을 시사하는데, 이는 같은 시간 전선에서 항명한 병사와 똑같은 수치다.






기차역 항명은 오랫동안 존재 자체가 무시당했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연구하지는 않았다. 자료 부족 때문은 아니다. 프랑스 군사기록보관소에 이 사건들에 관한 수백 건의 기록이 존재한다. 당대 사람들이 두 사건을 구분했기 때문도 아니다. 민간에서나 군에서나 두 종류의 항명을 별개의 사태로 여기지 않았다. 기차역 항명의 존재가 묻힌 것은, 단순히 역사학자들이 이 사건을 전선 항명의 메아리 정도로 치부했기 때문이었다. 




공백의 또 다른 이유는 알코올이 이 사건들에서 워낙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즉 항명 사태가 애국 행위도 종전 운동도 아닌 그저 취한 병사들의 술주정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었다. 항명 사태가 병사들의 종전 운동이었으나 군의 억압으로 인해 실패한 운동이었다고 최초로 주장한 드니 롤랑의 말을 인용하자면, '알코올 섭취로 인한 무의식적 충동의 해방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항명이 왜 그리고 어떻게 슈망데담에서부터 서쪽까지 철도를 따라 이동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사령관 페탱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내린 결정들을 보아야 한다. 페탱의 전략 중 하나는 양보였다. 즉 항명을 일으킨 병사들이 요구했던 더 나은 식단, 더 많은 휴가, 성과 없는 공격작전의 중단을 받아들인 것이다. 병사들은 이를 진심으로 환영했다. 항명 사태에 대한 최초의 학술적 연구를 한 애국 학설 주창자 페드롱시니는 이러한 병사들의 환영은 항명이 당근 얻기용 수단이었음을 보여준다고 결론내렸다. 애국 학설 지지자들은 '결국, 1917년의 반란은 전쟁을 거부하기 위함이 아니라 전쟁에 동의하기 위함이었다.'라고 결론지었다.




대조적으로 억압 학설은 페탱의 채찍에 해당하는 조치들을 강조한다. 그러한 채찍엔 항명 주동자들에 대한 본보기 목적의 처벌과 억압에 소극적인 장교들에 대한 징계가 있었다. 짧은 시간이라도 목숨을 걸고 장교에게 공개적으로 맞설 의지가 있는 병사는 많을 수가 없는 법이다. 억압 학설은 그럴 용기가 있거나 절박했던 병사는 6월 첫째 주까지 진작에 항명했고, 따라서 이후 빠르게 줄어들던 인적, 정신적 자원을 페탱이 억압으로 더욱 빠르게 줄여 항명이 끝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학설 모두 와인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페탱의 억압에서 중요한 요소, 즉 와인과의 전쟁을 놓치고 말았다. 반란이 최고조에 달했던 6월 초부터 페탱은 프랑스군의 와인 정책을 전면적으로 개혁했다. 페탱은 후방에 고도로 금주적인 향정신성 체제를 구축하여 군대를 통제했다. 그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공격작전을 벌였다.




첫째, 페탱은 알코올 공급량을 제한했다. 그는 주점의 와인을 군이 징발할 수 있게 만들고, 군사 및 민간의 와인 수요를 엄격하고 인색하게 해석하도록 만들어 이를 달성했다. 5월 30일 지휘관들에게 보낸 문서에서 페탱은 와인 남용을 제거하고 싶다면 군사지역에 와인이 과도하게 도착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와인 유통을 제거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페탱은 또한 전선을 배회하는 와인 판매상들을 비난했다. 그는 와인 판매상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 군대의 가장 필수적이고 시급한 사항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군은 와인을 징발하고 항명의 거점으로 의심되는 와인 판매점을 폐쇄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둘째, 페탱은 병사 급여 지급 방식을 변경했다. 1917년 6월부터 프랑스 병사들은 현금이 아니라 특별 저축 계좌로 급여를 받았으며, 군이 운영하는 협동조합에서 물품을 구매하거나 고향으로 돈을 보낼 때만 인출이 허용되었다. 따라서 병사들은 주점에서 와인을 구매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페탱은 병사들에게 와인을 판매하는 군 협동조합을 확산시켰다. 우편 기록에 따르면 협동조합이 질 좋은 가성비 와인을 팔았기 때문에 이는 인기 있는 조치였다. 6월 11일자 편지에서 한 병사는 이제 우리 연대에 협동조합이 생겨서 뭐든지 살 수 있고, 무엇보다 와인 한 병을 1.2프랑이라는 싼 가격에 살 수 있다고 썼다. 협동조합 확산은 이중의 목적을 가졌다. 이는 음주 행위를 감시해 병사들의 음주를 쉽게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드는 조치였다. 게다가 휴식 중인 병사들은 어지간한 이유로는 병영에서 떠나는 것이 금지였고, 대부분의 병영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병사들은 술을 구하러 마을로 몰래 떠날 수 없었다. 병사들은 술을 마시고 싶다면 군대에서 구매해야 했고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마셔야 했다.




셋째, 페탱은 군대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을 숙청했다. 그는 사단 장교들에게 상습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병사들을 식별하여 본보기로 삼을 교화 불능자 집단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병사 대부분이 군사재판에 따르면 "공개적이고 명백한 만취"와 관련된 수많은 군법위반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징계 기록에는 "고질적인 술주정뱅이", "태도가 매우 나쁨: 이 병사는 자주 완전히 술에 취한 상태임", "끔찍한 습관을 가진 알코올 중독자"와 같은 문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술을 끊으라고 식민지로 보내졌다. 그들의 수는 아마 겨우 2천 명 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본보기를 만드는 것이었지, 군대에서 과음하는 군인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후자가 목표였다면 거의 모든 병사가 식민지로 보내졌을 것이다.




페탱은 금주가들의 군대를 원하지도, 구상하지도 않았다. 페탱은 의무감의 조언과 전쟁장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오드비(증류주) 배급 폐지를 거부했다. 페탱은 오드비를 필수적인 전투자극제로 간주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문제는 병사들이 오드비를 마신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전쟁 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감독 없이 마실 때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페탱은 병사들이 와인 없이 지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협동조합을 확장한 것이다. 동시에 협동조합은 병사들이 술을 얼마나 마시는지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페탱은 일일 와인 배급량을 750ml로 늘리는 당근으로 병사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는 이전보다 250ml 많은 양이었다. 즉 프랑스군이 수백만에 이르는 병사들에게 하루 1병의 와인을 보급한 것이다.




이 모든 조치들은 병사들이 와인을 마시고 싶으면 군대에 의존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술을 감독받지 않으며 마실 방법이 사라진 것이 항명이 끝난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알코올 감독은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이유였다. 이러한 조치가 항명의 난이도를 극도로 높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1건을 제외한 모든 항명이 집단 만취 상태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페탱은 슬로건과 알코올에 취한 반란군은 복종을 강요받아야 하며, 전투 병력의 고통을 악용하는 범죄자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페탱이 만들어낸 금주 체계는 당근 및 채찍과 함께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새로운 금주 체제가 시행되자마자 전선 항명이 급락했다. 그러나 1917년 6월 초에는 여전히 음주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거의 혹은 전혀 없고, 와인이 풍부하고, 군이 통제할 권한이 거의 없고, 온갖 부대의 수많은 병사들이 뒤섞여 엄청난 인적 혼란이 일어나는 장소들이 있었다. 그 장소들은 병사들이 휴가 중에 필수적으로 지나가는, 전선과 후방을 연결하는 기차역들이었다. 5월 말부터, 항명이 철로를 따라 후방으로 확산되었다.






1914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군엔 전시 휴가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 순식간에 끝날 테니 만들어둘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참호전이 시작되자 휴가 체계를 만들라는 요구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총사령관 조프르는 처음엔 병사들의 휴가가 정기적으로 변하면 참호가 약해질 우려가 있다 판단하고 거부했으나, 결국 휴가 체계가 프랑스 경제와 군 사기 유지에 도움이 될 것임을 인정하고 1915년 6월에 체계를 만들었다. 조프르의 목표는 전체 전투 가능 병력의 3~4%를 휴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6개월 마다 8일의 휴가를 주었다.




휴가 체계는 전투가 없을 땐 잘 작동했고, 전투가 있을 땐 군수품 수송에 쓰이는 철도 수용량 증가와 휴가 중인 병사 비율 하락으로 과부화 받았다. 이러한 과부하는 니벨 공세 때 역대급으로 심했다. 전쟁 중 휴가 중인 병사의 비율이 가장 낮았을 때가 니벨 공세 때였다. 니벨은 공세를 중단한 후 휴가 중인 병사의 비율을 13%로 올렸다. 페탱은 총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니벨 공세에 참여했던 부대 한정 50%라는 엄청난 당근을 주었다. 또한 페탱은 4개월 마다 7일의 휴가를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니벨과 페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권리가 침해당한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6월과 7월에 휴가를 받고도 화가 풀리지 않은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후방으로 이동했다. 7월 1일에 45만명의 병사가 앤과 마른 지역에 집중되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군의 감독 없이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공간에 놓이게 되었다. 파리의 기차역들은 이러한 병사들 없이도 이미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전쟁이 발발한 이래 첫 대규모 노동쟁의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13만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참가한 200건의 파업이 파리를 흔들고 있었다. 이 여성노동자들은 역에서 붉은 깃발을 흔들며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종전을 외치면서 휴가 나온 병사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요구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생디칼리스트, 아나키스트들이 다들 종전을 원한 것도 아니고, 병사들이 다들 종전을 원한 것도 아니었지만, 전방과 후방의 종전 운동이 연결되고 있으며 프랑스 대혁명이 또다시 터지고 있다고 생가한 병사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병사들에게 정서적 에너지를 주었다. 항명을 망설이던 병사들은 항명을 일으킨 병사들이 체포되지도, 조사받지도 않는 걸 보고는 용기를 얻었다. 항명의 규모 자체가 항명의 규모를 키웠다.






첫 기차역 항명은 5월 26일 오후 6시 10분, 생시묭역에서 발생했다. 휴가용 특수군용열차가 간단한 수리를 받기 위해 이 역에서 멈췄고, 수리팀이 열차로 다가갔다. 그 순간 만취한 병사들이 우르르 내려 역장을 찾아갔다. 병사들은 역장에게 와인을 요구하면서 둘러싸더니 공격했다. 다음엔 신호수의 깃발을 빼았은 후 그걸로 신호수를 때렸다. 이들은 와인을 발견하지 못하자 열차로 돌아갔다. 열차는 6시 15분에 떠났다.




2일 후엔 항명이 담리역과 누아지르섹에서 1건씩 발생했다. 5월 29엔 모역과 트루아이역에서 1건씩 발생했고, 30일엔 4건이, 31일엔 6건이 발생했다. 이 14건의 항명은 생시묭역에서 발생한 항명과 비슷한 패턴으로 진행되고 끝났다. 만취한 병사들이 우르르 내렸고, 난동을 부리며 전쟁 반대, 장교에게 죽음을 등을 외친 다음,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돌아갔다. 31일에 발생한 항명에선 병사들이 파리에서 파업 노동자들에게 받은 붉은 깃발을 흔들기도 했다. 이 기간엔 체포된 병사가 없는데, 역 보안병력이 매우 적기 때문이었다.




상세한 기록을 보자. 6월 7일 오후 7시, 샤또티에리역에 휴가용 특수군용열차가 도착했다. 이 열차는 파리에서 출발했으며, 자정에 전선에 있는 바흐르뒤크역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이 날은 유독 더웠고 습기까지 있었다. 중간중간 역에서 쉬긴 했으나, 멀리 갈 수도 없으니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주점에 가서 술 마시기, 대화하기, 기다리기밖에 없었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 술에 취한 병사들은 파리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또한 이 열차가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출발했기에 술 마실 시간은 여기에 탄 병사들에게 제일 많았다.




열차가 도착하자마자 어느 부대 소속인지 알 수 없도록 가려놓은 작은 무리의 병사들이 역에서 내렸다. 이들은 열차 창문, 신호등, 가로등에 돌을 던져 깨먹었다. 이들은 항명을 일으킨 다른 모든 병사들과 똑같이 전쟁 반대, 혁명 만세 등을 외쳤다. 또 이들은 50살의 철도 회사 직원에게 갑자기 시비를 걸더니 폭행했다. 헌병들이 이를 막으려 했으나 똑같이 폭행당했고, 그중 지휘관은 심한 부상을 입어 병원에 가야했다. 차장은 이들을 다시 열차에 탑승시키기 위해 출발 경적을 올렸다. 그러자 2명을 제외한 모두가 열차에 탑승했다. 철도 회사 직원들과 헌병들이 그 2명을 제압하고 체포했는데, 이를 본 열차 안의 병사들이 크게 흥분해 우르르 내려 패싸움을 벌였다. 우연히 역에 있던 몽베이야르라는 장군이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역 근처에 주둔해있던 제120샤쇠르 아 피 대대가 지원요청을 받아 총검을 장착하고 총알을 장전한 총을 들고 와 겨누었다.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양손을 들었다. 몽베이야르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체포된 2명을 그냥 풀어주고 총을 거두라고 명령했다. 대대는 명령에 따랐고, 병사들은 얌전히 열차에 탑승해 떠났다. 그러나 일단 열차가 출발하자 창문에서 몸을 내밀어 두고보자고 외쳤다. 이렇게 1시간 만에 사건이 종결되었다. 이후 기록은 이들이 나중에라도 조사받아 체포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여러 역에서 발생했다.




열차가 종착역에 도착하고도 항명이 유지되는 경우는 없었다. 전선은 군이 통제하는 공간이었고, 얼굴을 알아보는 장교가 있어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각자의 부대로 흩어지게 되자 열차 안에서 만들었던 유대감과 소속감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술을 마음껏 마실 방법이 없었다.




기차역 항명과 전선 항명은 발생부터 종결까지의 양상은 물론 사소한 세부사항까지 매우 유사하지만, 차이점은 존재했다. 먼저, 기차역 항명이 전선 항명보다 폭력적이었다. 전선 항명에선 병사들과 막아서는 장교들이 서로 아는 사이지만, 기차역 항명에선 그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즉 전선 항명과 달리 병사와 장교에게 기존에 맺은 관계와 상호 존중이 존재하지 않았고, 보장된 익명성이 행동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전선 항명은 부대 단위로 일어났으나 기차역 항명은 서로 모르는 사이인 병사들이 일으켰다. 그만큼 유대감과 목적의식이 극도로 약했기에 열차 안에서 단체로 취한 상태일 때만 규율 붕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선에 도착하는 순간 예외없이 항명이 끝났다.






후방에서 온갖 보고서가 날아오자 페탱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는 세 가지 방법으로 대응했다. 첫째, 보안대의 규모와 공격성을 크게 늘렸다. 둘째, 주동자를 체포해 처벌토록 했다. 셋째, 술을 구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페탱은 역 근처의 주점을 폐쇄했고 와인판매상들이 병사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병사들의 행동과 이동을 가까이서 통제할 수 있도록 순찰을 지시했다. 페탱의 전략은 감시 및 통제 체계를 구축해 알코올에 대한 군의 정신적 지배력을 재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는 병사들이 규율 해체의 문턱을 넘는 데 필요한 정서적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하게 만들어 항명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보안대 규모 증가는 6월 1일에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비크쉬르앤역, 라페르테밀롱역, 빌레코트레역의 보안대는 장교 1명과 병사 4명에 불과했는데, 6월에 병사 13명으로 늘어났다. 크레피엉발루아역엔 중대 하나가 보안대로 배치되었다. 정예병인 샤쇠르와 향토부대에서 차출한 병사들이 신속대응부대로 배치되었다. 신속대응부대는 기차역 항명에 대한 경보가 울리면 3시간 안에 도착했다. 신속대응부대는 평소엔 역 근처를 순찰하며 와인판매상을 잡아냈고, 카페나 주점에서 만취한 병사를 발견하면 체포했다. 




6월 14일에 제2기병군단에서 차출한 장교 1명과 병사 14명이 세잔역에 배치되었다. 이 조치는 즉시 효과를 발휘해 이후 세잔역에선 한 건의 항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같은 조치가 이루어진 에스테르네역에선 1건의 항명만 발생했다. 코나트르역엔 장교 9명, 부사관 10명, 병사 44명이 배치되었다. 다만 이 보안대는 6월 19일에 발생한 엄청난 규모의 항명은 막지 못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 300명의 병사와 60명의 헌병으로 이루어진 신속대응부대가 배치되었다.




휴가용 특별군용열차에도 보안대가 배치되었다. 페탱의 참모장인 외젠 드브네가 6월 28일에 이러한 조치를 지시해 모든 열차에 향토연대에서 차출한 보안대가 동승하게 되었다. 8월까지 이러한 임무를 맡은 우베르트라는 한 병사는 자기가 탑승한 열차에선 항명이 1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보안대의 공격성도 크게 증가했다. 집단군 사령관 에밀 파욜은 6월 5일에 기강 해이를 최대한의 정력으로 맞받아쳐야 하며, 죄를 지은 자는 가능한 한 전부 군사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선언했다. 페탱은 진압, 주도권, 정력이 아닌 무기력을 보이면 공범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6월 11일엔 의무에 대한 인식이 스스로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만큼 강하지 않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선 처벌이 가능한 한 죄과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명령했다.




6월 중반부터 기차역 항명에서도 체포, 조사, 처벌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죄로 기소된 병사는 한두 달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주동자로 기소될 경우 최대 5년의 중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무엇보다 항명을 진압하지 않는 보안대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실제로 크레이역의 보안대장이었던 고빌리에 소위가 6월 11일에 15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제3야전군 사령관 앙베르는 6월 17일에 기차역과 열차에서 질서를 회복할 책임을 가진 장교가 정력을 보여주지 않고 병사를 두려워하며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거짓으로 작성하면 본보기로 만들겠다고 경고했다. 앙베르는 자기 말을 지켰고, 야전군 사령관 중에선 매우 드물게도 군사재판에 일일이 개입했다.




알코올에 대한 조치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군 고급장교들은 와인 과음이 기차역 항명의 주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쟁부에선 군에 병사들이 역에서 과음하는 걸 방지할 병력 배치를 요청했고, 내각에선 기차역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공공장소 음주 및 음주판매에 대한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며 개개의 용의자를 찾아내 체포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임무를 맡은 기예망은 술에 취한 채로 열차에 탑승하는 것을 막고 와인을 구매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고했고, 자코는 술주정뱅이들을 격리하여 취기가 완전히 가라앉은 후에 열차를 출발시켜야 한다고 보고했다. 루셀은 역겨울 정도로 만취한 자들이 항명의 원인이라고 기록했다.




이에 따라 페탱은 7월 10일부터 기차역의 공간을 재구성했다. 우선 역을 3가지로 분류했다. 바로 집결역, 분기역, 승하차역이다. 집결역은 샤또티에리역, 트루아이역, 바흐르뒤크역같은 철도망의 주요 교점이었다. 집결역 근처에 대합실 역할을 한 병영이 건설되었다. 병영은 월담이 불가능한 철조망 울타리로 둘러싸였고, 안에 침실, 화장실, 독서실, 게임실, 협동조합이 존재했다. 병사들은 와인 1L 교환권을 하나만 구매할 수 있었다. 이는 병사들의 취기를 군에서 관리가능한 수준으로 유지시켰다. 




분기역은 병사가 적게 지나가는 역이다. 이 역 근처에 설치된 병영엔 변소, 침실, 담배가게, 책상, 맥주만 파는 협동조합이 존재했으며 플랫폼에서 커피와 차 등 비알코올 음료를 나눠주었다.




승하차역은 됭케르크역, 리옹역, 보르도역, 파리역처럼 프랑스에서 가장 거대한 역들이었다. 승하차역은 대도시 안에 있어 고립된 공간인 병영을 만들기 불가능했으므로 테이블에 앉아 쉬면서 비알코올 음료, 수프, 물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개방형 공간을 만들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병사를 바가지 상인들로부터 구하기 위한 당근이었으나 실제로는 알코올 통제를 위함이었다. 또한 헌병이 순찰하며 병사들이 대규모로 모이지 못하도록 방지했다.




7월 초에 이러한 조치들이 효력을 발휘해 기차역 항명이 급락했다. 크레피앙발루아의 한 보안대 병사는 6월 중반에 이렇게 기록했다.




'하루에 수백 번은 발생하는 듯 하다. 이미 취해있는 병사들이 감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마을로 빠져나가 카페에 가며, 폐점 시간이 되면 민간인들에게 수통을 술로 채워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만취한 소집단을 만든 채로 돌아오는데, 바로 이때 폭력적인 혼합이 발생하고 선전에 신경도 쓰지 않던 주정뱅이들이 선동적인 외침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기차역 주변 거리가 술 취한 군인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인도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거나 와인을 마시고 있다.'




3주 후,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졌다. 우베르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취하지 않은 병사들이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안대에게 병영으로 안내받아 들어갔다. 병사들과 민간인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그곳에선 딱 정해진 만큼의 술만 마실 수 있었다. 




프랑스군이 7월 10일에 작성한 장문의 보고서는 기차역 항명의 원인이 전투에 대한 두려움, 감시 부족, 파리의 부정적인 영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코올이라고 결론내렸다. 보고서에 따르면 집단적 기강 해이 행위, 즉 항명은 언제나 만취한 병사들이 저질렀다. 보고서는 알코올 통제 덕분에 군의 사기와 규율이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실제로 알코올 통제는 7월부터 항명이 급락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집단행동에 따르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