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 전선, 이름조차 지도에서 지워진 마을이 있다. 포격으로 반쯤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는 사람이 간신히 비집고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

지하실 계단 입구에서 금속 긁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총기를 손질하는 소리다. 그 소리의 주인은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병사다. 이틀째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그는, 민간인이 버리고 간 지하 대피소를 임시 거점으로 삼고 있다.

벽면에는 누군가의 가족사진이 액자에 낀 채 기울어져 걸려 있다. 아버지, 어머니, 두 아이.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일요일 오후를 찍은 사진이다. 병사의 시선이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가 다시 총으로 돌아간다.

헬멧 옆에 놓인 낡은 책이 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다. 집을 나서며 어머니가 배낭에 넣어준 것이다. "전쟁터에서도 인간으로 남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하지만 책장은 열리지 않는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화약 냄새만 코를 찌른다.

바깥에서는 간헐적으로 포성이 울린다. 가까운 듯 먼 듯한 거리다. 병사는 물통을 기울여 남은 물을 확인한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입술을 적실 정도의 양이다. 물통 안쪽 벽면에는 녹물이 얼룩져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에는 뒤집힌 승용차와 부서진 트램이 있다. 지난주까지 민간인들이 이용하던 교통수단이다. 이제는 철판과 유리 파편으로만 존재한다. 트램 내부 좌석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쇼핑백이 놓여 있다. 일상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병사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사진 한 장을 꺼낸다. 여자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대학 캠퍼스 벤치, 봄날의 햇살, 웃고 있는 두 사람. 사진 뒷면에는 그녀의 필체로 "돌아와"라고 적혀 있다. 병사는 사진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조심스럽게, 마치 유리 조각을 다루듯이.

무전기에서 잡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재집결 명령이다. 병사는 장비를 챙기며 일어선다. 벽의 가족사진을 한 번 더 바라본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살아 있을까.

지하실을 나서는 병사의 발걸음에서는 결의도, 두려움도 읽히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계단을 오를 뿐이다. 손에 쥔 총의 무게가 현실을 증명한다.

폐허가 된 마을 위로 저녁놀이 번진다. 아름답고 무심한 하늘이다. 병사는 고개를 들어 그 하늘을 본다.

"저 높고, 끝없고, 친절한 하늘."

같은 하늘 아래, 누군가는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그는 다음 거점으로 이동한다.

톨스토이의 책은 배낭 깊숙한 곳에 남겨진 채다. 언젠가 다시 펼쳐질 날을 기다리며.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