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italian army in 1941 - 43 eastern front였나 대충 비슷한 제목



1. 2대전 동안 대전차전은 수동적, 능동적 수단들이 혼합된 방식. 대전차소총, 대전차포, 야포, 구축전차, 항공지원 등 수동적 방어체계는 전차 교리와는 다르게 굴러갔기에 대전차전은 별개로 구분해야함.


2. 이탈리아는 동부전선에 전차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보병 지원화기와 포병 장비에 의존하여 소련군 기갑을 상대해야했음.


3. 전간기 동안 이탈리아는 대전차전에 대한 여러 연구를 거쳤고, 대전차포를 통한 직접 혹은 간접 공격이 가장 현실적이라 판단함.

3-1. 이탈리아군은 각 보병연대마다 65/17포 4문으로 구성된 일개 포대를 배치함. 이 포들은 공세 지원은 물론 500미터 이하 교전에서 적 전차 대응을 위한 것.

3-2. 1940년에도 여전히 700문 이상의 65/17포가 남아있었음. 일부 연구자들은 구경과 더 우수한 철갑탄 관통력 때문에 이게 더 대전차 능력이 좋았다고 주장하기도. 반면 이탈리아군 주력 대전차포인 47/32포는 산악지형에서 유용하고 다목적성이 우수했지만 위력이 부족했음. 그래서 40년 기준 이미 47/32는 구형이었고, 중형 전차 이상을 파괴하려면 사단 포병에 의존해야 했음.

3-2. 20 30년대 이탈리아군 교리는 대전차전에서 근접포병지원을 요구함. 전초 진지와 포병을 포함한 방어 체계를 구축하고, 사단 포병을 분산 배치하여 대전차포 포함 모든 화포가 보병 방어선 전방에 화력을 집중해 적의 돌파를 막아야했음.

그러나 이탈리아 포병대는 대전차 용도로 화포가 전용될시 임무 분산 및 교란, 대포병 사격 같은 다른 포병임무가 소홀해질 것을 우려했기에 대구경 화포의 대전차전에 회의적이었음. 그래서 실제 교범에선 대구경 포의 대전차전 운용에는 매우 적은 비중만 할애했음.

3-3. 에스파냐에서의 교훈. 이탈리아 대전차포들의 성능은 충분했지만 보병과의 연계에서 문제가 생김. 근접 배치 중 적 기동부대에서 포병대가 노출되는 사례가 있었고, 이때문에 이탈리아군 포병대가 대구경 포의 근접 지원을 꺼리는데 근거가 됨.

3-4. 또 다른 교훈은 적 전차와 적 보병의 분리, 전문적인 대전차반의 편성 등이었음. 에스파냐 내전에 종군한 아우구스토 다미코 중령은 사단 포병의 기동화와 군단 및 사단 포병 조직의 유연화를 강조함.


4.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선 대전차전에서 기동 방어와 기동전을 통한 우세가 명확히 입증되었다고 해석함. 따라서 보병 화력을 보완하기 위한 대전차소총의 도입이 제안되었고, 지형, 기관총, 대전차포를 이용한 보병의 대전차전, 전반포병 운용방식, 군단 직할 대전차연대 등 각종 연구가 진행됨.


5. 40-41 전역 동안 북 아프리카에서의 패배는 이탈리아군의 약점을 드러냄. (영국군 마틸다 전차에 효과적이었던 105/28 포 뿐이었음)

하지만 적절한 대전차포를 생산하지 않았음 (전략적 오류)에 대한 비판과 이 결핍을 위한 작전, 전술적 방안에 대한 비판을 혼동해선 안됨. 이탈리아군은 훈련을 통해 북 아프리카에서 작전효율 향상시킴. 따라서 소련군 전차에 놀라 현대전의 가혹한 현실을 깨달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함. - 애당초 독일군조차 떼삼사의 존재를 몰랐기에.


6. 그럼 동부전선에서 대전차전은 어떻게 수행됐는가? 하나는 1차대전식 수동적인 전투였고, 다른 하나는 기동 방어를 중심으로 한 전술, 작전적 기동. 41년 히틀러는 수동적인 방어전술을 요구했으나, 때때로 일선 독일군은 기동전을 통해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전통적인 독일식 발상을 유지함.


7. 41년 이탈리아군은 보병을 지원하기 위한 포병 전방 배치를 주장함. 또한 훈련 강화, 소련군 전차에 대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론적 준비들론 소련군 중형, 중전차 격파에 필요한 적절한 화기가 없다는게 제일 문제였음.

7-1. 47/32포로는 떼삼사를 상대할 수 없었음. 47/32포는 500m 거리에서 90도 각도로 43mm, 60도 각도로 32mm 장갑 관통 가능했음. 그러나 떼삼사는 주요부분과 포탑 모두 45mm 장갑이었고, 전면장갑은 30도 경사로 되어있어 포탄의 위력을 감소시킴.

7-2. 그러나 전면장갑 관통이 불가능하다고 완전히 무력한건 아니었음. 이탈리아군 초병들은 약점 (포탑 아래)을 찾거나 전차 궤도를 노려 기동 불능으로 만들었음. 이탈리아는 떼삼사에 깊은 인상을 받아 떼삼사는 이후 P40 개발에도 영향을 줌.

또한 노획한 떼삼사를 이용한 실험에서 300 - 400m 단거리에선 47/32포로 여러 차례 명중시 손상을 줄 수 있음이 확인됨. 따라서 격파가 불가능한건 아니었지만 충분한 시간과 근거리 교전이라는 상황이 필요했음. 실제 전쟁에서는 큰 사치였지만.

7-3. 떼삼사와 게브원을 격파할 수 있던건 중포 및 75/46 대공포 (이 경우는 근거리)뿐이었음. 42년 7월 세라피모비치 전투에서 이탈리아 포병은 소련군 전차 33대 (떼삼사와 BT) 를 격파했는데, 주로 독일이 제공한 75밀 포와 75/32포의 전과였음. 75/32포는 효과적이었지만 수가 너무 적었음.

지뢰는 신뢰할 수 없었고, 이탈리아제 수류탄은 불발이 많아 독일제 수류탄을 요구함. 또 이탈리아군 항공 전력이 미비했기 때문에 독일군이 애용한 항공지원은 제대로 받을 수 없었음.



8.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모두 ARMIR (동부전선 파병 이탈리아군)가 단독으로 소련군 전차부대를 상대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음.

8-1. 42년 8월 이후에도 독일군은 정보교환, 지침 전달, 화포 공급, 추가 훈련 제공 등을 통해 상황을 개선하려 노력함. 효과적인 75밀 대전차포도 일부 제공했고, 이탈리아군도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함.

알피니 군단은 43년 1월까지도 대구경 대공포를 포함한 추가 화포 공여를 받음. 알피니 군단 예하 6개 사단과 제2 군단은 포병과 대공포가 부족해 항공 공격에 취약했음.

8-2. 그럼에도 이탈리아군은 동부전선 파병에 최선을 다한 편. 예를 들어 쿠네엔세 사단은 러시아 파병 이전 전문적인 대전차 훈련을 받음.

포병 배치 관련 이탈리아군 측 명령들은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이 드러남. 따라서 예비대에 대한 고려 없이 부대를 배치했다는 비난은 현장 실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


8-3. 그럼에도 독일군은 대전차 진지 감독을 위해 숙련된 독일 장교들을 파견하는 것을 고집함. 이탈리아군 포병들은 독일에게 추가적인 대전차 교육을 받아야 했음.

ARMIR 참모장 말라구티는 독일군이 제안한 내용에 대해 "독일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한다" 며 빈정거리기도 함. 우리도 이미 다 알고있는 내용을 거창하게 떠들고, 끊임없이 전술적 간섭을 한다고 짜증낸 것.


9. 이탈리아군은 가용한 모든 포병을 집결시켜 보병뿐아니라 다른 포병진지도 지원하는 전략을 세움. 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선에 배치해 소련군의 공세를 차단하는 연속적인 주 전투선을 형성하는게 이탈리아군의 목표였음.

독일 측 경험에 따르면, 소련군은 최전선 보병대를 모두 격파한 후에 전차로 돌파를 시도했음. 이를 위해 추축군은 모든 대전차무기, 중기관총, 포병을 하나의 통합된 지휘 아래 전선에 집중배치해야 했음. 이를 통해 아군 보병을 보호하면서 적 전차를 근거리에서 공격할 기회를 확보할 수 있었음.


9-1. 전방배치를 통해 포병은 연대 및 군단 포병의 지휘 아래 화력을 집중시켜 소련군 기갑부대를 차단해야했음.

또한 독일군은 전술 단위에서 이탈리아군의 유연한 방어를 차단하려하기도 함. 어떤 종류의 후퇴도 심리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강요하기 위해.


10. 결론적으로 이탈리아군은 전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전술적 배치를 이해하고 있었음.

독일군과 정보를 교환하고 대전차전 개선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기울임.

10-1. 42년 12월의 전투 보고서가 거의 남아있지않아, 이탈리아군 포병이 소련군 전차군단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음. 하지만 첫 며칠 간의 결과는 이탈리아군 포병과 수동적 방어가 효과적이었음을 보여줌.

10-2. 이탈리아 지휘부는 전차의 위협을 과장했고, 독일군의 지원 가능성에 지나치게 의존함. 결국 부실한 보병 지원 화기, 47/32포의 비효율성, 탄약부족, 지뢰 불량, 항공 및 기갑 지원 부재, 소련군 전차의 수적 우세와 강력한 대포병 사격을 고려하면 이탈리아군 방어선이 돌파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님.

이탈리아군의 작전이 항상 비참한 수준은 아니었다는 점도 돈 강 방어전 관련 독일군 전투 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