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까지 아사자 나오는 고난의 행군이 심한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말년 일제가 괜찮았다고 이해하는건 문제가 있지 않음?
아래는 일본 내무성 관료가 1944년 조선 시찰 다녀와서 쓴 보고서를 AI 번역한거임.
https://www.jacar.archives.go.jp/das/meta/B02031286700
쇼와 19년 7월 31일
고구레 야스요(小暮泰用)의 조선 시찰 보고서 전문 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
복명서(復命書) 촉탁(嘱託) 고구레 야스요 명에 의하여 소직(小職)은 최근 조선 민정의 동향 및 읍면 행정의 상황 조사를 위해 조선에 출장하였는바, 조사 상황은 별지 첨부와 같기에 이에 복명함. 쇼와 19년(1944년) 7월 31일 관리국장 다케우치 도쿠지(竹内德治)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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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시 및 농촌에 있어서의 식량 사정
조선에 있어서 도시 및 농촌의 식량 사정은 상당히 심각한 바가 있으며, 그 실례로서 조선을 여행할 때 기차 창문으로 바라보아도 연선의 임야에 있는 소나무의 껍질을 벗긴 것을 상당히 목격할 수가 있는데, 연선이 아닌 깊은 산에는 더욱 많아 가까운 장래에 조선의 소나무는 혹 고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듯하다. 병합 이래 고(故) 데라우치 총독을 비롯해 역대 총독은 조선의 산림 행정에 상당히 힘을 쏟은 결과 최근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임상(林相)도 조금 양호해져 왔으나 작금의 식량 사정에 의한 이 현상은 실로 우려를 금할 수 없는 바가 있다.
농촌인 및 지방 유지의 기탄없는 의견을 조사해 보면, 종래 대체로 조선은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을 나타내는 것은 행정 당국의 그 조치가 마땅함을 얻지 못한 데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비난하는 지방도 있다. 즉 배급, 공출 기구의 불완전은 물론이거니와, 먼저 그 임무를 맡은 자의 정실(情実) 또는 실정을 알지 못하는 맹목적 행정의 결과라고 그들은 비난하고 있다.
내가 금번 실지에서 조사해 본 바로 미루어 단적으로 말하면, 조선의 식량 사정은 도시에 있어서는 배급의 면이, 농촌에 있어서는 공출의 면이 문제의 전부를 부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당국의 식량 행정의 방향으로서는 공출량은 생산고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생산고에서 농가 인구 1인당 1일 얼마의 소비 충당량을 농가 보유량으로 하고 나머지를 공출량으로 정해 이것을 농가에 공출을 명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에 있어서 농업 생산 통계라 함은 대체로 그것이 전년 농촌 진흥 시대의 주산(柱纂)인 통계 숫자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서, 뭇사람들이 보는 바 대개 그것은 항상 과대 견적이라 하는 데 일치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과대 생산 통계 하에서 다시 개별 농가의 수확고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노력이 지불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는 무의식적으로, 드물게는 의식적으로 요철(오차)을 낳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기초에서 개별 농가의 구체적 공출량이 정해진다. 그리하여 이 공출령은 문자 그대로 지상 명령이 되어 공출의 완수는 권장보다도 강압·강권을 가하여 강요되는 경우가 지극히 많은 상태이다.
더구나 조선의 농민은 순박하고 순종적이어서, 거기에는 눈물겨운 수많은 실화와 실정도 많다. 혹은 내일의 양식까지 공출한 자가 있고, 혹은 그들의 무엇보다 소중한 농우(소)나 가옥이나 가재도구 등을 팔아치워 암거래로 사서라도 자기의 공출 할당 수량을 완수한 자도 있다. 따라서 부락에서 세력이 있는 자, 즉 소위 유력자 기타 부호 권력자를 제외하고는 추수 때 이외의 시기에 있어서 농촌의 식량 사정은 거의 궁박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농업자라 해도 아침 밥 저녁 죽(朝飯夕粥)은 좋은 편이고 다수는 호구지책에 괴로워하며 자기의 생산물은 전부 공출에 바치고 자신은 콩, 팥의 잎이나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여 얼굴은 부어오르고 바로 생불여사(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함)의 참상을 나타내며 공복 때문에 일하는 것도 못하고 누워 있는 자도 적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은 조선 농촌의 식량 사정으로 인해 농민은 식량은 생산해도 스스로는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농촌에는 증산 의욕은커녕 오히려 혐농(厭農) 사상이 상당히 농후하며 생산물을 은닉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져 왔다.
그래서 공출 독려자는 농가나 농가의 주위를 수색하고 취사 시에 불의의 습격적으로 들이닥쳐 취사 솥이나 음식물을 검사하고 급기야 면(面), 주재소 등에 호출하여 신문하는 등 전혀 조선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을 여기저기에 노출하고 있다. 마땅히 금후에는 농민에게 식량을 보호하고 산업 전사로서 대우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이것이 결국 증산의 가장 유력한 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돌이켜 도시의 식량 사정을 보건대 도시에는 거의 완전에 가까운 배급 제도가 실시되어 1인당 1합 4작 내지 2합 3작의 배급을 대체로 순조롭게 받아 만복(배부름) 정도는 기대할 수 없으나 일단 불안은 없는 상태에 있다. 일반적으로 도시인은 배급량이 근소하기 때문에 사시사철 공복감을 호소하면서도 여전히 정해진 양을 거의 정확하게 배급받고 있는 것은, 농민으로서 하루 1합 정도도 양곡을 먹지 못하는 것에 비교해 볼 때 도시인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농민의 창고에는 양곡은 없어도 도시의 식당에는 그래도 무언가 음식의 준비가 있는 실정으로서, 이 점 내지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도시인 중에서도 재력에 여유가 있고 시국 인식이 부족한 박지(薄志)의 무리들은 법망을 뚫고 암거래로 백미 및 기타 식료품을 사들여(조선에 있어서 백미 1말의 암거래 가격은 60원 전후임) 자기의 식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는 자도 상당히 있다. 같은 암거래 구매라 해도 농민은 자기의 공출 책임 완수를 위해 하고, 도시인은 자기의 만복을 위해 한다. 이것도 조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실로 기이한 대조이다.
요컨대 조선의 식량 사정은 도시 방면의 비농가는 거의 정확에 가까운 소정량의 배급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공복을 호소하고, 농촌인은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면서도 오히려 추수 때 이외의 시기에 있어서는 대체로 자가의 식량에도 궁박해 있는 실정이다.
이리하여 도시라 할 것 없이 농촌이라 할 것 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 음식 이야기로 도비(都鄙, 도시와 시골)의 화제는 거의 음식에 관한 것뿐이어서 전혀 먹는 것에 걸려서는 신사도 필부도 없는 유이다. 여기에 '백성은 식(食)을 하늘로 삼는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라고 하는 옛 교훈이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조선의 식량 사정의 궁핍 원인은 무엇인가, 또 이것을 어떻게 시정할까에 대해 생각해 보건대 종래의 경지 면적 및 생산에 관한 통계는 부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것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 다음은 반당(단위 면적당) 수확의 견적 등이 실정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또 농가의 소비 식량의 양을 과소하게 규정한 것, 더욱이 최근 수년간 흉작이 계속된 것 등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농가에 있어서 식량의 공출은 상술한 폐단에 의해 공출 수량 과다에 치우쳐 그중에는 전 생산량을 여기에 충당해도 오히려 부족한 것조차 있다. 게다가 공출 수량은 확보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무리에 가까운 독려를 가하기 때문에 농가는 공출 후 다음 날부터 거의 식량이 없는 상태이며, 게다가 배급은 반드시 그 다음 날부터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특히 세농(영세농)의 곤궁은 심하다.
또 춘궁기에 있어서 환원제의 특배(특별배급)를 받는다 해도 그 양이 극히 적어 1일 1인당 1합 미만인 경우가 많다. 고로 이즈음 과감하게 통계를 먼저 시정함과 동시에 농가 1일 소비 식량을 적어도 1인당 4합 이상으로 하고, 실정에 따라 농가의 식량을 공제한 후, 잔여를 전부 공출하게 하거나, 또는 생산 식량 일체를 전면적으로 매수하여 다음 날부터 농가 비농가의 구별 없이 일정량의 배급을 행하거나, 어느 쪽이든 급속히 조선의 식량 사정의 궁박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조금 이야기가 빗나가는 듯 생각되나 조선에 있어서 식량 문제 해결에 대해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는 문제의 하나로서 쇼와 19년도 조선 미곡 생산 책임 수량 결정액에 대해 이것을 검토해 보면 즉 금년도의 식량 생산 책임량은
보리: 1천63만 석 기타 잡곡: 930만 석 합계: 4천593만 석
으로 되어 있으나 도대체 이 수량은 어떠한 방법에 의해 산출 결정된 것인지 전문가가 아닌 내가 불과 3주간 정도의 단시일 조사로는 그 정부를 지금 당장 확언할 수는 없으나 먼저 그중 쌀 2천6백만에 대해 생각해 보면 전고 미증유의 대풍작이라 일컬어진 쇼와 12년(1937년)의 쌀농사 숫자를 제외하고는 조선의 쌀농사 생산 역사상 아직 그 전례가 없는 숫자이다.
사실 조선의 제일선 행정의 실정은 4년 전에 비해 상당히 복잡해지고 있으며, 전국(전쟁 상황), 특히 대동아전쟁 후에 있어서 전국의 진전에 따라 조선에는 각종 영예와 책무가 새롭게 부가되어 오고 있음은 사실이다.
지금 그 주된 것만을 들어보아도, 이(イ). 식량을 주(主)로 하여 기타 수십 종에 이르는 농림축산물의 공출 로(ロ). 저금 및 헌금 내지 헌납 하(ハ). 노무(인력)의 공출 니(二). 지원병 내지 징병제도 호(ホ). 특별 광공물 증산 헤(ヘ). 의무교육 실시와 교육 정비 등으로서, 이러한 시책은 거의 그 결과에 있어서 달성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때마다 당국자에 의해 반도 관민의 노력과 협력에 대한 감사의 말로써 언명된 대로이다. 즉, 외형과 결과에 있어서는 상부의 의도가 거의 제일선 말단 기관에 침투하였고, 따라서 제일선의 관공리 또한 성전(聖戦) 완수에 분투하고 있는 것이 그 현상인 것으로 보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지고 곧바로 조선의 제일선 행정의 실정은 만족해야 할 상태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문제는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방법 내지는 정치 기술의 여하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한 한 상부의 의도는 대개 말단 하부에는 침투해 있지 않은 것이 작금의 실정인 것으로 사고(思考)된다. 이로 인해 총독 정치에 대한 예기치 않은 의혹, 불평불만이 생겨나는 일이 적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조사 자료라고 생각된다. 고로 이와 같은 원인을 하루라도 속히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조선 통치를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명랑성을 띠게 하는 최대 급무라고 믿는 바이다.
그 원인의 주된 것만을 들자면,
1. 군수(郡守)에 이르기까지의 불침투의 원인 본부(本府, 총독부)에 있어서는 지방 제일선의 실정에 통달하지 못하고 종합적 인식을 결여한 자가 자기 분야에만 얽매여 지나치게 이론적으로만 정교한 입안을 한 것이, 도(道)에 있어서는 그 다수가 본부보다 소질이 저하되는 속료(属僚)의 손에 의해 이것을 저작(소화)함이 없이 그대로 이첩되어 군(郡)에 집중되는 것이다. (게다가 본부의 기획자 중에는 실제적 경험 및 식견이 부족한 자가 많다.)
2. 군(郡)에서 읍면(邑面)에 이르는 사이에 있어서의 불침투 군·읍·면 직원의 지적 부족과 소질 저하 등에 더하여, 약한 말에 짐이 무거운 격(弱馬駄重)으로 사무는 이곳에 집중 폭주하는 결과, 중점 사무인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무관심하게 되어 연구와 궁리는 거의 없고, 또한 읍면 재정의 고갈은 이러한 제반 우대 방책들을 단지 명목상의 것으로 만들게 되어 일종의 피로감, 혐오감마저 품게 된다. 회의 및 상급 관청의 독려 출장에 의해 강조되는 시책 방법에 관해서만, 게다가 그 결과, 특히 최종적 결과... 예를 들면 식량 증산 공출에 관해 말하자면 파종 면적 확장, 경종법(농사법)의 개선 등은 이를 대부분 보고상에서만 달성하고, 그 허위 보고에 기초하여 할당된 공출의 달성에만 전력을 쏟기 때문에, 민중으로 하여금 당국 시책의 진의, 중대성 등을 인식시키지 못하고 민중에 대하여 의(義)와 눈물(涙)이 없음은 물론, 무리한 강제와 폭행(식량 공출에 있어서의 구타, 가택수색, 호출 고문 / 노무 공출에 있어서의 불의의 습격적, 인질적 납치 등) 내지는 드물게는 상해치사 사건 등의 발생을 보는 것과 같은 불상사조차 있다. 이리하여 공출은 때로 약탈성을 띠고, 지원 보국은 강제가 되며, 기부(헌금)는 징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3. 읍면에서 민중에 이르는 사이의 불침투 읍, 면, 특히 면(面)은 제일선에 있어서 일반 민중과의 중간에 서서 본부가 기도하는 일체의 시책을 담당 실천하는 중요한 말단 행정기관이지만, 그 아래에 지식이 지극히 저급하고 국어(일본어)도 이해하지 못하며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조선어로 기록된 공문 통첩을 수령하고 소박한 사고 하에 활동하는 구장(区長)이 있어, 이 구장에 이르러 일체의 이론적 행정 시책은 퇴색되고 거의 그 정치적 의의를 상실하기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먹고살만하니까 먹고살만했다는 말이 나오지 좆저능아임?
ㄹㅇㅋㅋ
양쪽 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말한다면 북한은 고난의 행군떄가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게 북한은 지금도 인구를 나누어 의도적으로 열악하게 관리하니까
지금 북한은 굶어도 합법적으로는 행상도 이주도 못하고 앉아서 죽어야 하자나
북한이나 일본이나 국적포기 자체를 틀어막고 밑에 사람들 성장 억제하고 의도적으로 관리하던 동네인데 뭘. 까고 말해서 고난의 행군, 일제 말, 우크라이나 대기근 모두 생산이 문제가 아니라 통제가 문제였음.
@ㅇㅇ 국적포기가 아니라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가는 것 말임 그게 북한 중국은 원천금지돼있어
@ㅇㅇ 생산도 문제 맞는데 대체 뭘 보고 온 거임?
@ㅇㅇ 당시에도 말로만 이동의 자유지 실제로는 본적 지우기 힘들고 취업 등의 지역이동도 경찰의 신고 허가가 필요했음. 특히 일본 이동도 허가제였는데 관동대학살 이후 사실상 오지말라는 수준으로 굉장히 빡세짐. 이거 좀 느슨해 진게 전쟁기 때.
북한은 저게 디폴트니까요 님아ㅋㅋㅋ - dc App
어차피 나는 일제말 전체주의 = 북한 이 정도로 보는 사람임. 프로파간다 수법부터 돌아가는 꼬라지 보면 똑같음.
또 춘궁기에 있어서 환원제의 특배(특별배급)를 받는다 해도 그 양이 극히 적어 1일 1인당 1합 미만인 경우가 많다. 이건 그냥 고난의행군 북한아님?
본문에는 안적었는데 보고서 내용 보면 조선내 지역유지들이 배급제 시행하고 여기저기 집단으로 동원하니까 공산화 되는거냐고 우려섞인 말을 함.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는 ㄹㅇ 종이 한장차다.
괜히 북한이 천황제 시즌2고 실행주체가 일본 민족주의에서 북한 민족주의로 옳겨간거다 이런소리 나오는게 아님.ㅋㅋ
@ㅇㅇ 공산주의는 사실 생산의 관념차이에가까우니까 일제처럼 국민에게 간섭이 심한국가는 큰차이가없을수도있긴하지 물론 어쩌다보니 겹친거에가깝지만
읽어보니 본인들이 보기에도 도농간의 불평등 격차가 심각했나보네...
일제를 위해 변명하자면 본토도 그렇게 다를게없어서 젊은장교들이 사고친게 2.26 임
ㄹㅇ 완전 부카니스탄이랑 판박이네 부카니스탄도 평양과 지방 차이가 극심하다던데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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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일뽕 국뽕 죄다긁는댓글이누...
일제말을 비교할거면 고난의 행군이랑 비교하는게 맞지. 보급로 다끊기고 있던거 마저 항폭 당하던 시기인데
당시 일본제국령 조선은 본국이 스스로 철도 수거해간거랑 미국이 부산일부폭격한거말곤 보급로끊긴건 아니지않음?
@ㅇㅇ 해상봉쇄 당한 조선반도에서 식량 자급은 가능하노
@PPSh 당시에 인구 3000만명인데 의외로 비료공장은 조선내에서도 크게있긴했음 문제는 생산이아니라 분배가 문제; 그냥 인프라가없음의문제라
@ㅇㅇ 전쟁에 쓰기 위해 비료와 노동력같은 농업 인풋이 줄어들면 농업생산도 감소할 수밖에 공출해 중국과 본토로 보내는 것.. 본토로 보내는 건 목조선박까지 조지니까 중간에 컷되는데 안 보낼 수는 없으니 계속 꼴박 한반도 자체는 구한말대비 주민이 크게 늘어난 상태니 결국 밥사정은 나빠질 수밖에
@ㅇㅇ 그게 똥으로 만드는 유안같은 거 말고 본격적인 질소비료공장은 군수산업으로 전환됨 그리고 그런 현대적인 공장은 결국 전쟁전 밸류체인의 일부였으니까 가동률이 내려갔고
@ㅇㅇ 결국 생산도 문제맞음 현대농업은 비료덜주면 개털임
니말대로면 60년대까지 한국도 북한급으로 연명했음. ㅇㅈ?
ㅇㅇ 국가 운영 주체가 한국인이어서 좀 더 나았을 뿐이지 한국전 당시 하는짓 보면 일제시대 때 배운 버릇 못버리는 모습보임. 그나마 농촌 입장에서 나은게 있다면 토지개혁으로 농촌 소득 불균형 해소했다는것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