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프랑스 공군
자유 프랑스 공군(FAFL)은 1940년 6월, 영국 공군(RAF)의 지원을 받아 창설되었다. 드골은 프랑스 조종사들이 영국 공군에서 훈련을 받고 RAF의 일원으로 전투에 투입되는 데 영국과 합의했다. 그러나 1940년 7월 시점에 영국에는 380명의 프랑스 공군 장병만 남아 있었다. 비시 프랑스 정부는 영국 또는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한 모든 프랑스 군인은 8월 15일까지 프랑스로 귀국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탈영죄로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프랑스 공군 장병들은 영국 도착 후 RAF 세인트 아탄이나 오디햄 공군기지로 전속되었다. 숙련된 조종사 일부는 RAF 서튼 브리지에 위치한 작전 훈련 부대로 파견되었다. 처칠은 프랑스 공군이 '완전히 프랑스적인 성격'을 지닐 것이라고 약속했다. 프랑스 조종사들은 프랑스 공군 제복과 휘장을 착용할 수 있었다.
전쟁 초기 프랑스 조종사들은 프랑스 영공 작전 임무 대신 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들이 프랑스 영공에서 격추될 경우 비시 정부나 독일군에 의해 탈영병으로 처형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1년 2월, 영국 공군(RAF)은 그들을 프랑스 영토 폭격임무에 투입하기로 동의했다.
자유 프랑스 전투기 조종사 르네 무쇼트는 프랑스 국민들이 동료 조종사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그리고 자신들이 반역자로 낙인찍힐지 걱정했다. 폭격기 승무원들은 자국을 폭격할 뿐만 아니라 무고한 프랑스 민간인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심각한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했다.
일부는 자신들이 프랑스 폭격임무를 외면 한다면, 다른 영미 연합군 조종사들이 부주의 하게 폭격하고 자국민들에게 더 큰 피해를 줄거라 주장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다른 이들은 위험을 감수 하더라도 더 정확한 폭격으로 민간인 사상자를 최소화 하고자 저고도 비행 공습을 실시했다.
1943년 10월 3일, 드 랑쿠르 중령이 지휘한 파리 근교 셰빌리-라뤼 발전소 공습이 그 사례 중 하나이다.
그는 선두 4대의 폭격기는 매우 낮은 저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고, 나머지 8대는 1,500피트(450m) 이하의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도록 지시했다. 프랑스 민간인 사상자를 최소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승무원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민간 주택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일부는 해방을 위한 독일군과의 전투의 일환으로 프랑스 내 목표물을 폭격해야 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받아들였다.
1941년 12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을 공습하던 영국 공군 소속 612 비행대대 장 마리도르와 같은 다른 이들은 잠재적 위험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가족들을 떠올렸다.
한 자유 프랑스군 폭격기 항법사는 다른 연합군 조종사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그들보다 우리 자신의 안전에 대한 배려 없이 작전을 수행할 이유가 더 많았습니다. 설령 그것이 위험을 가중시킨다 하더라도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RAF 엘빙턴
요크셔 RAF 엘빙턴 기지에 주둔한 프랑스 중폭격기 비행단의 역할은 특히 흥미롭다. 제346 '기옌'과 제347 '튀니지'는 연합군 공군 소속의 유일한 자유 프랑스 중폭격기 비행대들 이었다. 1944년 5월, 엘빙턴은 자유 프랑스군 병력으로만 구성된 기지가 되었다.
그들의 역할이 흥미로운 것은 소수의 자유 프랑스 중폭격기 승무원 이었다는 점에 더불어 불과 몇 달 전 비시 프랑스 정부에서 복무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영국에 도착한 것은 횃불 작전으로 북아프리카에서 비시 정권의 통치가 종식된 후였다. 346, 347 폭격 비행대원들은 과거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정부에서 복무하며 도덕적으로 어려운 행동을 하다가 이제는 자국을 폭격하는 또 다른 행동을 하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프랑스 공군 장병들은 1943년 9월 영국에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폭격 임무에 필요한 모든 훈련을 수료하는 것은 1944년 중반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이들에게 핸들리 페이지 핼리팩스 폭격기를 운영하기 위한 재훈련 및 영어 수업이 시행되었다.
'기옌' 비행 중대의 첫 번째 작전은 1944년 6월 1일에서 2일 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셰르부르 인근의 독일군 라디오 감청 기지를 폭격하는 임무였다. 다음 날 밤, 그들은 파드칼레의 독일군 해안 포대를 공격했다.
폭격기 승무원들이 수행해야 했던 행동과 폭격 임무에 착수할 때마다 직면했던 위험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랑스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이러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자국 폭격의 특수한 부담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RAF 엘빙턴에 주둔했던 프랑스 조종사 중 한 명인 루이 부르갱의 회고록은 프랑스 공군이 직면했던 어려움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그는 자신과 동료 공군이 비시 프랑스 정부에서 복무했던 기간을 의도적으로 건너뛰며,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또한 프랑스 폭격에 대해 불편함과 민감성을 표명했다. 그는 폭격 임무를 수행할 의지는 충분했지만, 그러한 행동이 프랑스에서 홍보되거나 자유 프랑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엘빙턴 기지 프랑스 폭격기 승무원들의 증언 들에서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 중 하나는 런던에 위치한 자유 프랑스 진영과 긴장이었다.
그들은 드골 장군과 다른 자유 프랑스 인원들이 그들이 프랑스의 해방을 가져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자유 프랑스군과 '거짓' 자유 프랑스군, 스스로 해방한 사람들과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일부 부대원들은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드골과 자유 프랑스를 지지했지만, 드골은 그들이 횃불 작전 이후 미국 정부가 자유 프랑스의 차기 지도자로 지지했던 라이벌 앙리 지로 장군을 지지한다고 비난했다. 따라서 고위 장교를 포함한 엘빙턴 기지 부대원들은 런던의 자유 프랑스 진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결론
1945년 11월 25일, 프랑스 보르도에서 346, 347 폭격 비행대 부대원들의 퍼레이드
약 2,300명의 프랑스인들이 폭격기 승무원과 지상 요원으로 346, 347 비행대에서 복무했다. 1944년 6월 1일 부터 1945년 4월 25일까지 이들은 총 2,834회의 출격을 통해 8,621톤의 폭탄을 투하하고, 165,725갤런의 휘발유를 지상군에게 보급했다. 작전 중 약 50%의 폭격기 승무원들이 전사했다.
1940년 부터 45년까지 연합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프랑스 민간인들의 수치는 약 57,000명이다.
D-Day 상륙작전과 프랑스 해방에서 프랑스 공군의 역할은 연합군 군사 작전에 대한 광범위한 이야기 속에서 종종 잊혀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크 대성당 RAF 엘빙턴 자유 프랑스 폭격기 부대의 역할을 기리는 명판이 프랑스 승무원들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명판은 그들이 프랑스 영토에 죽음과 파괴를 가져온 것은 순전히 프랑스의 해방을 위한 희생이었음을 시사한다. 많은 부대원들이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내용 출처
The Free French Air Force The Free French Air Force (FAFL) was created in June 1940 with RAF support. De Gaulle agreed with the British that French pilots were to be given training by the RAF and s…
francehistory.wordpress.com
현대 유럽 역사가인 Karine Varley박사의 블로그 글
저시절폭격기가 진짜 위험한듯 -"시진핑애비없음"
전략 폭격이 어찌보면 2차대전 당시 소모전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함. 여기에 소모된 폭격기와 승무원들을 생각하면...
@투하체프 ㄹㅇ... -"시진핑애비없음"
사상률이 참호전 시절 1차 대전보다 더 높았을거임
대공포가 작렬하고 적 전투기가 기다리는 거 알면서도 공역에 진입해야 했던 저 시절 폭격기 승무원의 심정은 전열보병과 같지 않았을까?
의외로 자유프랑스군에 복무한 구미에르나 하키 숫자가 상당했더라
자유 프랑스 공군 사령관이었던 마르시아 발랭이 계급이 소장인걸 봐선 1개 전투 사령부의 규모는 운영했을듯
처음에 중령이었다가 자유프랑스 창설 후 대령 알제리 탈환하고서 준장 본토 탈환 시점서는 소장까지 인걸보면 자유프랑스 공군 규모도 그 정도로 순차적 성장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