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라 원수부는 선비병(先備兵), 후비병(後備兵), 예비병(豫備兵), 국민병(國民兵) 등으로 징집하고 징병 연한을 17~40세로 하는 징병조례안을 검토하였다. 이는 일본의 군제를 모방하면서 전제군주제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여론은 양반층의 반발과 호적 제도의 미비가 징병제 시행의 걸림돌로 지적하고 있었고, 또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국민교육이 선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징병제가 국민을 국가방위의 주체로 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일정하게 국민의 정치 참여를 인정하고 국민 동원을 담보해 내지 못한다면 실시하기 어려운 제도였다. 또한 당시 민중의 소요와 반란을 각 지방의 진위대의 최우선 임무로 할 만큼 민중에 대한 위로부터의 압박과 압제를 수행하고 있었던 상황에서는 징병제는 곧바로 시행하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원수부는 선비병(先備兵), 후비병(後備兵), 예비병(豫備兵), 국민병(國民兵) 등으로 징집하고 징병 연한을 17~40세로 하는 징병조례안을 검토하였다. 이는 일본의 군제를 모방하면서 전제군주제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여론은 양반층의 반발과 호적 제도의 미비가 징병제 시행의 걸림돌로 지적하고 있었고, 또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국민교육이 선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징병제가 국민을 국가방위의 주체로 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일정하게 국민의 정치 참여를 인정하고 국민 동원을 담보해 내지 못한다면 실시하기 어려운 제도였다. 또한 당시 민중의 소요와 반란을 각 지방의 진위대의 최우선 임무로 할 만큼 민중에 대한 위로부터의 압박과 압제를 수행하고 있었던 상황에서는 징병제는 곧바로 시행하기 어려웠다.
일본 징병제는 1871년 맞음?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