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에는 군사력의 강화라는 목표 아래 징병제가 국가적인 과제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군사력 증강 문제는 국경 방어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청나라의 의화단 사건을 교훈삼아 내란의 발발이 외국군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내부의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겠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901년 8월 원수부에서는 국민 중에서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18세 이상의 남자를 병적에 편입하여 3년간 훈련시킨 후에 귀가케 한다는 징병제 시행안을 마련하였다.1902년 11월 법부협판 이기동은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징병제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전의 병농일치제의 이념을 이상으로 하고 토지세를 매결당 30냥을 부가함으로써 재정문제를 해결하면서 징병의 비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회의에서는 대다수가 세금을 증액하자는 안에는 찬성하였으나 징병제 실시는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았다.1903년 3월 고종 황제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조칙을 전격 반포하였다. 과거 5위도총부 하의 5위체제와 같이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전통적인 군제의 복귀를 명목으로 하여 국민들에게 징병제의 실시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원수부는 선비병(先備兵), 후비병(後備兵), 예비병(豫備兵), 국민병(國民兵) 등으로 징집하고 징병 연한을 17~40세로 하는 징병조례안을 검토하였다. 이는 일본의 군제를 모방하면서 전제군주제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여론은 양반층의 반발과 호적 제도의 미비가 징병제 시행의 걸림돌로 지적하고 있었고, 또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국민교육이 선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징병제가 국민을 국가방위의 주체로 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일정하게 국민의 정치 참여를 인정하고 국민 동원을 담보해 내지 못한다면 실시하기 어려운 제도였다. 또한 당시 민중의 소요와 반란을 각 지방의 진위대의 최우선 임무로 할 만큼 민중에 대한 위로부터의 압박과 압제를 수행하고 있었던 상황에서는 징병제는 곧바로 시행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