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제시한 조건을 수용치 않는 주민들은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조리 붙잡아 가진 물건을 빼앗아야 한다.
프랑스군이 발을 들여놓은 곳엔 잡초도 돋지 못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의 '박애주의자'들이 뭐라 떠들어대더라도 말이다.
영광스럽게 내가 지휘한 모든 훌륭한 군인들은
만약 아랍인을 생포한채로 데려온다면
호된 매질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나한테서 받은바 있다.
여보게 친구여, 이것이 바로 아랍인들과 싸우는 방식이라네.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
모든 여성과 아이를 붙잡아 건물안으로 몰아넣는 것,
그들을 마르키즈(Marquesas) 제도나 다른데로 추방하는게 그 방법이라네.
우리앞에서 개처럼 기어가지 않는 자는 모조리 없애버리는게 그 방법이라네...
1843년 봄, 알제리 원정에서의 게릴라전을 표현한 몽타냑(Montagnac) 중령의 발언
몰락하기 얼마전, 샤를 10세는 추락한 부르봉家의 명성과 위엄을 회복시키고자 알제리 정복을 결의했다.
그점에서 '알제리 태수(Dey)가 프랑스 영사를 부채로 가격했던 사건'은 원정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내세우는데 제격이었다.
과거에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 충당할 군수용 밀의 구매계약을 오스만 제국의 알제리 태수와 체결한 바 있는데,
복고왕정은 계약 당사자가 나폴레옹인만큼 밀값 채무를 인정할 수 없으며, 상환 의무또한 없다는 논리로 회피했다.
계약 체결 31년째 되던해, 즉 1827년 4월 29일 밀값 상환을 전제조건으로 삼은 '최후통첩'을 통보하던 알제리 태수가
자신의 부채로 프랑스 영사 드발(Deval)의 뺨을 후려친 사건이 발생하면서 프랑스 정부 역시 '자국 외교관 모욕'을
구실삼아 최후통첩을 발령, 알제(Algiers)항 봉쇄에 나섰으나 별 효과가 없는 상태로 3년이 지났다.
'외부에서의 가시적 성과'를 통해 체제에 대한 반발을 무마한다는 술책은 위정자에겐 고금의 진리다.
반동노선으로 국내 여론이 들끓던 참에 국왕 샤를과 왕당파 재상 폴리냐크(Polignac)공(公)은
이같은 교훈을 새삼 상기하는 한편, 플랜테이션에 적합한 해외영토를 획득하고,
특히 알제 태수의 금고에 저장되었다는 엄청난 양의 금화에도 탐욕이 발동했다.
골칫거리 의회의 선거인단을 매수하고자 한푼이 아쉬운 이상, 알제리 원정은 성공만 한다면
일석삼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도박이었던 셈이다. 육군대신 부르몽(Bourmont) 백작이
인솔한 프랑스 원정대가 560여척의 선박에 승선해 툴롱을 출항한 것은 1830년 5월 16일.
프랑스군은 6월 14일, 알제에 상륙해 다음달 초까지 태수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며, 태수는 알제시와
자신이 다스리던 요새, 카스바(Casbah)를 부르봉 왕가에 헌납해야 했다. 원정 초기,
부르봉 왕가는 오스만 제국에 알제리의 주권을 전적으로 포기하라고 요구하진 않았다.
대신 프랑스군은 알제의 금고를 강탈, 5200만 프랑 상당의 금화를 빼돌렸으며, 그중에 약간의 돈은 7월혁명으로
촉발된 체제 변혁을 틈타 몇몇 사람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갔다. 샤를 10세가 축출되고
집권한 7월왕정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식민화 사업이 개시되고, 정복전의 범위도 확대되었다.
루이 필리프에게 충성을 거부한 부르몽의 후임으로 파견된 클로젤(Clauzel) 원수는 알제리를 전면적으로 점령하는 방안을 지지했다.
프랑스군은 일전에 부르몽이 했던 약속을 어기고 종교재산을 몰수했는데, 회교도들에게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다.
회교 구호기관의 재산, 부동산 등의 공공재산은 추방된 투르크계 주민들의 재산과 마찬가지로 몰수되었으며,
알제의 모스크는 성당으로 개조됐다. 알제리인들은 처음엔 여기저기 분산되어 산발적으로 저항했지만,
얼마안가 압델 카데르(Abdel-kader)를 중심으로 단결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은 알제리 수피교 형제단의 지도자로 1832년 제(諸)부족이 참석한 회의에서 당시 24세에 불과했던 아들이
'에미라(emir, 신앙인들의 지도자)'로 인정받게끔 하였다. 전력의 열세를 자각한 압델 카데르는 시간벌이란
목적에서 일종의 휴전협정인 '데미셸(Desmichels)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지만,
결국 클로젤은 토벌전을 재개하라는 훈령을 본국 정부로부터 하달받았다.
1836년 겨울, 콩스탕틴 공방전에서의 패배로 클로젤이 소환되자 연안에만 국한된 제한적 점령정책으로 선회하여
뷔조(Bugeaud) 장군이 형식상 투르크령 알제리의 2/3에 해당한 나머지 영토에서 압델 카데르의 통치권을 승인해주는
'타프나(Tafna) 조약'을 체결, 유화책이 견지됐다.
1839년 가을, 알제리 전체 영토의 완전한 식민화를 기조로 한 술트(Soult) 내각이 강경노선으로 기울자
전쟁은 재차 전면전으로 변질, 이때부터 압델 카데르가 항복하는 1847년까지 8년간 매우 잔인한 양상을 드러낸다.
신임 알제리 총독에 임명된 뷔조는 알제리 정복전쟁의 가장 대표적이자 상징적인 인물로
지방귀족 출신의 견실하고도 독선적 타입인 군주주의자였으며 1834년 4월, 트랑스노냉(Transnonain)로(路)의
학살사건 당시 진압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사막과 산지를 배경삼은 아랍인 게릴라를 상대하는데 있어 유럽식 전술만으론 역부족임을 간파한
그는 기습공격과 원주민들의 생필품 소각, 모든 장애물의 철저한 파괴를 병행시킨 소위 '라치아(Razzia)'라는
전투 교리를 근대식으로 응용했던 것이다.
1840년 1월 25일, 하원 연설에서 뷔조는 그의 게릴라 대책을 명료하게 설파했다.
"아프리카에선 한가지 소득원밖에 없습니다. 농업 소득이 그것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씨를 뿌리고 수확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소득원을 장악하는거 말고는
그곳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부대의 지휘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려고 합니다.
'장군, 장군의 임무는 그 아랍인들을 추격하는게 아니오.
그건 전혀 쓸데없는 짓이오. 장군의 임무는 귀관의 관할지역에서
아랍인들이 씨를 뿌리거나 수확하지 못하게 하고, 가축에게 풀을 먹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라고 말입니다."
"나는 포로가 되거나 부상당한 우리 병사들의 목을 베는 이방인들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박애정신보단 프랑스의 이익을 항상 우선시할 것입니다."
1844년 8월 14일, 이슬리(Isly) 전투에서 모로코군을 격파한 뷔조는 압델 카데르에게
망명지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모로코 술탄에게서 받아냈다.
이슬리 전투는 알제리 서쪽, 모로코와의 경계 근처에서 잠깐 벌어진 전투로
'새로운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전투'라고 프랑스 언론에 과대하게 선전, 보도되었다.
뷔조가 젊은시절 나폴레옹 근위대 직속의 일개 소위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참전했던
군력을 의식한 프로파간다이긴 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 전공(戰功)으로
'이슬리 공작(Duc d'Isly)'의 작위를 제수받은 뷔조는 이듬해 초 하원에서의 또다른 연설을 통해 초토화를 계속 암시하며 알제리인들을 위협했다.
'나는 당신들의 산으로 진격할 것이며, 당신들의 마을과 수확물을 불태울 것이고, 당신들의 과일나무들을 베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들 스스로를 탓하라!'
그해 6월, 그는 알제리 북동부 셸리프(Chélif)의 주민들이 일으킨 저항을 진압하기 위한 명령을 부하들에게 내렸다.
'그 악당들이 동굴속으로 도주하면, 카베냑(Cavaignac)이 스베아족(Sbéhas)에게 했던 것처럼 할 것!
그자들을 모조리 여우처럼 연기로 질식사시킬 것
.' 저항군을 연기로 질식사시킨 최초의 사례는 1844년 6월 11일에 있었다.
프랑수아 캉로베르(François Canrobert, 훗날 元帥로 진급) 소령은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이렇게 증언했다.
"프랑스인이 임명한 지방관리들과 입식민들을 스베아족이 살해하자, 우리는 그들을 징벌하러 갔다.
이틀간 그들을 맹추격한 끝에 우리는 깎아지른 거대한 절벽앞에 다다랐다. 그 절벽엔 동굴 모양의 깊은 구멍이 나있었다...
그곳에 아랍인이 숨어있었다. 우리는 동굴 입구를 폭파하고, 가시덤불 단을 쌓았다. 저녁이 되자, 가시덤불에 불을 붙였다.
이튿날, 몇명의 스베아족이 동굴 입구로 기어나와 우리측 전초병들에게 투항했다.
그들의 동료, 아내들, 자식들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것이 최초의 '동굴 사건'이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았다.
카베냑 대령은 언제나 그랬듯이 신중을 기하면서, 연기로 질식사시킨 그 사건으로 죽은 아랍인들의 숫자에 대해 길게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림전쟁에서의 펠리시에 원수>
뷔조의 명령에 따라 테네스(Ténès), 체르첼(Cherchell), 밀리아나(Miliana)를 연결한 삼각지대에서
1845년 6월 18일, 애마블르 펠리시에(Aimable Pélissier) 대령은 다흐라(Dahra) 협곡의 동굴속으로 피신한
8백명의 사람들을 주저없이 연기로 질식사시켰다.
어느 병사의 표현에 따르면, 거대한 동굴속에 시신은 760구였다. 60명만이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로 동굴밖으로 기어나왔다.
40명은 끝내 살아남지 못했으며, 10명은 위독해져 야전병원으로 이송되고, 걸어갈 기운이 남아있는
나머지 10명은 석방되어 자기 부족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 파멸에 대해 눈물을 흘릴수밖에 없었다...
엘랑이 엘랑했네 - dc App
유럽짱깨 인성 어디 안가죠
개새끼들아
마마가 당한 테에엥... 일가실각 테챠아아앗!
사람이 아니무이다..
파시즘 만세!
근데 애초에 이게 맞지 않나? 압도적인 질적 양적 열세에서도 게릴라 전술이 성립할수 있는 결정적 이유가 침략군의 인도주의에 기대는 건데. 산지가 많아서 한국전쟁때 빨치산 청소에 개고생을 했던 한반도 지형이지만 일제시대 때 조선 독립군들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된 것도 쪽바리군이 저런 식으로 게릴라를 지원해주는 민간인들을 학살해서 그런거고.
역시 엘랑스는 담당일진 갓틀러가 필요하다
게릴라전에 대응하겠다고 뻘짓하다가 예산 날려먹고 사상자 늘어나고 정치적 공격을 받는리 (1) 아얘 점령을 포기하고 물러나거나 (2) 인본주의 쌩까고 전부 갈아버리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는데
몽고애들이랑 똑같이 했네
여윽시 자유평등박애의 국가
영국에선 젠트리 이상의 계급만 신사적이고 프랑스에서 박애는 카페에서만 있는 것.
근대니까 가능했지 21세기였으면 자국법원에서 전범으로 기소 확률 90%임.
유럽짱깨;;
저러니까 알제리가 독립했지
이슬람 담당일진이네?
저항의 씨앗을 아예 뽑아버리네
샌드니거들한테 정당한 대우를 해준거 뿐인데 아직도 박애주의 찾고계신 박애주의자들 넘치네 ㄷㄷ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