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비스씨에게, 나는 1945년 12월15일에 한국에 처음 도착했다. (중략) 나는 사령관과 미소공위의 자문으로서 1948년 5월 말 공위가 붕괴될 때까지 일했다. 그때까지 나는 한국에서의 진행상황을 보면서 철저하게 실망했고, 용기를 잃었다. (중략) 이승만 활동의 한 예로서 나는 김두한의 이야기를 인용할 것이다. 그는 정치라는 모래사장에 던져진 가장 악취 나는 타입의 인물이다. 김은 알카포네가 대중적 은혜를 베푸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던 것과 비슷하게 여겨졌다. 그는 일본 경찰의 스파이였다. 그는 배가 가라앉는다는 것을 느끼자 꽁무니를 뺐고, 공산주의를 희롱하였다.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 반을 점령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을 찾은 것처럼 그는 새로운 빛을 보았다.’

‘그는 조직원 중 누구도 25세 이하가 아닌 상황이었지만 민주청년운동을 조직했다. 그의 청년그룹은 육군의 보급품과 관련해 부당이익을 취하고 중간에서 강탈하는 데 전문적이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적 반대자들의 본부를 습격하고 고문과 살인을 종종 실행했다. CIC(미군 방첩대)의 폭력대응팀이 그와 그의 그룹을 공격한 밤에도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같은 날 밤 하지에게 이들의 체포 소식을 알렸고, 그들을 미 군사법정에서 다룰 것을 요청했다. 하지는 ‘그것을 나에게 문서로 써서 다음날 아침에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답변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겨우 러치 장관(러치는 미군정 민정장관으로 하지의 보좌관이었다)을 거쳐 하지의 사무실로 갔다. 러치는 나의 권고에 대한 답변으로 ‘최근의 보고서처럼 버치의 이번 권고는 나의 한국화 계획을 뿌리에서부터 망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법정은 그들을 VIP로 대접하고 그들에게 22센트의 벌금을 물도록 했다. 나는 하지에게 이 모든 일에 대한 새로운 메모를 썼고, 하지는 나의 권고를 따랐다. 그는 한국 법원의 결정을 거부하고 미국 법원에서의 재판을 명령했으며,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승만은 미 태평양사령부에 있는 친구로 하여금 사형 집행을 2년간 미루도록 하였고, 2년 후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를 풀어주었다. 그는 새로운 정부의 영웅으로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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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는 뼛속까지 구라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