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 연구 권위자 왕언메이(王恩美) 국립대만사범대 동아시아학과 교수는 

“(6.25당시) 국공내전 패전 후 투항한 국민당 군 출신이 상당수였던 중공군에 심리전의 효과는 상당했다. 

북한 인민군의 감시 때문에 집단 투항은 할 수 없었지만 개별 투항자는 속출했다”고 말했다. 

대(對)중공군 심리전에는 서울·인천 소재 화교학교 교사·학생이 동원됐다. 

이후 중공군 귀순자, 포로 숫자가 늘어나면서 화교학교 교사·학생들은 통역 임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심리전, 포로 심문 업무에 투입된 화교들은 전투부대로 참전하기도 했다. 주축은 월남(越南) 화교들이었다. 

1949년 4월 20일, 평양에서 조선인(북한인) 520명, 재북(在北)화교 50명 등 총 570명이 참여해 

한중반공애국청년단(韓中反共愛國靑年團)이 결성됐다. 

초대 단장으로 화교 위서방, 부단장으로 북한인 김명국, 화교 강혜림이 취임했다. 위서방, 강혜림 모두 전쟁 경험자였다. 



위서방은 1923년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에서 태어났다. 

평안북도 신의주에 거주하다 1945년 안둥(安東·현 단둥)경찰학교 졸업 후 

국·공내전 시기 국부군(國府軍·국민당정부군) 상위(上尉·대위 해당)로 참전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자 신의주로 돌아왔다가 평양 인근 장산탄광 노동자로 일했다. 

1925년 중국 산둥(山東)성 치샤(栖霞)현에서 태어난 강혜림은 국·공내전 시기 국부군 부대원으로 

공산당의 인민해방군과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었다. 

국·공내전 후 평양에 정착해 중화요리점을 운영했다. 두 사람 모두 반공 의식이 투철했다.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은 결성 후 북한 내 대(對)인민군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6·25전쟁 발발 후에도 게릴라전을 지속했다. 

전쟁 발발 직후 단원 수는 조선인 800명, 화교 200명 등 1000명에 달했다. 



1950년 10월 20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위서방은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을 만나 “한국군의 작전에 참여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참여를 허가 받은 위서방은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平壤華僑反共愛國保衛團)으로 재편해 정보 수집 업무를 수행했다. 



12월 5일 유엔군이 평양에서 후퇴했다. 위서방과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 단원 30명도 함께했다. 

위서방은 한국에 도착한 화교단원을 중국수색대로 재편했다. 

유엔군과 한국군 측은 이들의 참전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계급·군번은 부여받지 못했다. 



중국수색대는 중공군과 실전을 벌이기도 했다. 

화교 47명으로 편성된 부대는 1950년 12월 24일, 경기도 연천 고랑포리에서 중공군 4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중공군이 38선 이남까지 진출했다는 최초 증거였다. 



1951년 1월, 국군 제1사단 정보참모 김안일 중령이 대령으로 승진해 제1사단 제15연대장을 맡았다. 

중국수색대 소속·명칭도 제1사단 제15연대 중국인특별수색대로 바뀌었다. 

2월 2일, 중국인특별수색대는 경기도 과천전투에 투입, 관악산 탈환전에 참전했다. 



상대는 중공 인민위에서 내린 최우수 부대기까지 받았을 정도인 중공군의 정예부대였다. 

고지 점령을 위한 시도들이 번번히 큰 피해를 입고 실패하자, 제 15연대는 중국인특별수색대에게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강해림 열사가 이끄는 수색대원들은, 중공군으로 위장하고서 밤을 틈타 적진에 침투했다. 



국부군으로서 중공군과 싸워본 경험이 있었던 강해림 열사의 지휘 하에 

수색대원들은 적 진지 8곳을 수류탄으로 단숨에 격파하고, 15명의 적들을 포로로 잡는 맹활약을 펼쳤다. 

이에 힘입어 국군은 총공격을 감행, 마침내 관악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혜림 열사는 최후의 돌격 중 기관단총의 실탄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백병전을 벌이던 중 중공군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강혜림 "열사"인 이유는, 대한민국 국군으로서의 정식 계급을 받지 못해 추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강혜림 열사는 유골을 인수할 유가족이 없었다. 

때문에 그 유해는 부산화교소학교 교원에 임시 안치됐다. 

훗날 한국 정부가 주한 중화민국 대사관과 화교 전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4년 12월 12일 국립묘지(현 국립현충원) 제24묘역으로 이장했다. 

그에 앞서 1959년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그리고 2012년, 피 흘릴 의무가 없던 화교의 신분으로도, 대한을 지키기 위해 참전해 스러져간 그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화교수색대장이자 생전의 전우였던 위서방 대장과 함께, 새롭게 조성된 별도 묘역에 안장되었다.





“위서방·강혜림을 아십니까?” 華僑 출신 6·25전쟁 영웅들|신동아

강혜림(姜惠霖·장후이린/지앙훼이린) 열사 : 네이버 블로그










"대한 사람 강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