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의 맹렬한 포 사격이 멈추고 나니 천지가 고요했다. 미군과 우리들은 할 일이 없어졌다.
나는 호기심에 미군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 가 구경하러 나섰다. 식사는 레이션이었다.
모든 것이 깡통에 들어 있어 뚜껑만 열면 먹게 되어 있었다. 커피만은 물을 끓여서 마셨다.
보급이 빈약한 우리와 천지 차다. 한 끼에 한 박스라니 부럽기만 했다.
그들은 잠잘 때는 오리털 큰 주머니 속에 들어가 지퍼를 올리면 밖의 냉기는 완전히 차단되어 추위를 모르고 잤다. 우리와 비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옷을 입고 모자도 쓴 채 누워 잤다. 옥수수 대로 만든 자리에 누워 있는 것만 해도 잠자리가 좋은 편이었다. 식사도 하루 세 번이면 감사하게 생각했다.
무슨 일에든지 월급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나 우리는 받아본 적도 없거니와 달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어 있으나마나였다.
갑자기 부대 안이 웅성거렸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무슨 일이고.”
“중공군 포로다.”
나느 일순간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같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이제는 모든 것이 틀렸구나.
크리스마스 전에 종전된다는 꿈은 산산 조각나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어깨 너머로 보니 중국군은 두 명이다.
군복은 상하가 솜옷으로 돼 추위에는 견딜 만했다. 모자는 방한모였다. 나이는 25~26세 정도로 젊은 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입은 것은 우리 것보다 방한이 잘 되는 군복이었다.(우리들은 덕천에서 오버와 동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나 자신이 20여 일 후에 포로가 될 운명임을 그때는 꿈에도 생각 못하면서, 그들이 비록 이민족이지만 전쟁에 패한 포로라는 것에 대해 동정심이 생겼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고, 앉아서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전우들은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 깔깔 웃고 있었다. 나는 얼마 후에 그들이 차편으로 후송되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날도 조용히 지나고 있었다. 밤은 칠흑 같다. 나는 무엇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났다.
나는 특별한 상황도 없는데 웬일인가 하고 밖으로 나갔다. 누가 밤하늘을 쳐다보며 무턱대고 통을 쏘고 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총을 쏘느냐고 옆의 전우에게 물었다. 우리가 여기에 주둔해 있으니 적이 공격 못하게 위협사격을 한다는 설명이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일등병이 뭐라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총소리를 내면 적이 공격하지 않는다니 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적에게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는 어리석은 행위일 뿐인 것이다.
1950년 11월 7일경 중국군은 전 전선에서 공격다운 공격 없이 의문의 후퇴를 시작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중국군은 유엔군을 작전에 유리한 곳까지 유인하고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작전상 부대를 후방으로 이동시킨 것이었다.
벌써 중국군은 유격대의 선발대가 38선 부근까지 와 있을 때였다. 이런 중국군의 작전을 미처 감지 못한 우리들은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도취해 있었다.
우리는 중평리에서 북창(北倉)을 거쳐 덕천(德川)으로 이동했다.
북창에서 덕천으로 가는 길은 어찌나 살벌한지 낮에도 으스스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길은 양쪽의 가파른 산을 사이에 두고 계곡을 따라 북창에서 덕천까지 이어졌다.
만약 퇴로가 차단되면 전멸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었다.
덕천은 평안남도 북부 대동강 상류 유역의 덕천 분지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동쪽에 영원군(獰遠郡)과 맹산군(孟山郡)이 있어, 남쪽은 북창군에 접해 있다.
또 덕천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묘향잔맥(妙香山脈)의 일부인 용문산(龍門山, 1,180m)과 사덕산(966m)이 둘러싸여 있다.
산악지대의 골마다 대동가의 지류인 마탄강, 시량강 등 10여 개의 크고 작은 하천이 영원과 맹산 등지로부터 흘러들어 개천(价川)으로 흘러간다.
우리의 작전이 결국 중국군이 의도한 것이었음을 그 당시는 아무도 몰랐다. 한국군 제2군단은 이곳에서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격이었다.
중국군은 자기들의 작전에 우리들이 말려드는 모습을 산속에 숨어서 미소 지으며 보고 있었다. 우리와 교대했던 미 제2사단도 11월 30일 중국군의 공격으로 비참하게 패퇴했다.
나는 이런 과정을 거쳐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포로로 잡혀 절벽 위에서 총살당하기 직전이었다.
처음 우리를 야단치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중국군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무슨 호령인 듯했다. 그 소리에 대항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10여 명의 중국군은 조용했다. 나는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뒤돌아보았다.
바지에 붉은 줄이 있는 중국군이 우리의 등에 총을 겨누던 중국군에게 야단을 치고 있었다. 나는 바지에 붉은 줄이 있는 중국군은 처음 보았다.
총을 겨누던 중국군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우리에게 총을 겨누던 중국군이 총칼로 우리에게 앞으로 가라는 몸짓을 했다.
한 중국군을 따라 우리 일행 중 둘은 먼저 따라 가고, 나는 또 다른 중국군을 따라 눈길을 걸었다. 우리는 한 농가에 도착했다. 중국군이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방안에는 벌써 30여 명이 앉아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흑인 병사도 있었다.
나는 평남 북창에서 덕천까지 진격하면서 미군을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이 미군은 어디에서 포로가 되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부엌에 앉아 있기로 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양 무릎에 얼굴을 박고 등을 굽혀 양손으로 다리를 안았다.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슬픔보다는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았다.
총살 직전에서, 이제 살았다는 기쁨으로 긴장과 추위를 녹이기 위해 부엌에 불을 피웠으나 솟아나는 눈물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죽음을 면했지만,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낯익은 전우는 한 사람도 없었다. 고독이라는 외로움도 처음 맛보았다.
잠이라고는 한숨도 못 잤다. 아침이 되었다. 중국군이 와서 우리말로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낮에는 일체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며, 불을 피워서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거듭 강조하고 나갔다.
이 많은 사람 중에서 무엇 때문에 나를 총살하려 했는가. 나 혼자 생각해보았다.
중국군이 나의 가슴에 총검을 찌르고, 나는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잡혔다. 아무런 저항도 못한 나를 총살에 처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문득 앉아서 내 군복을 살펴보니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나를 총살하려 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내가 부상자를 치료하다보니 많은 피가 내 군복에 묻어 있었고, 피투성이인 나를 보고 백병전(白兵戰)에서 중국군을 많이 죽인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하루를 꼬박 굶었지만, 배고픔을 모르고 지냈다. 다시 아침이 되었다. 새벽의 찬바람은 말할 수 없이 추웠다. 밥이라고는 없었다. 통 옥수수 삶은 것을 모자에 받아서 먹었다.
스무 알이 될까 말까 하는 양이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옥수수를 보니, 먹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마지못해 한 알을 입속에 넣고 물어보지만 돌처럼 단단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것만을 먹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앞날을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현실에 만족해야만 했다.
낮 시간에 중국군 병사가 와서 나와 또 다른 한 사람을 지명하여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웬일인가 의아해 하면서 집 밖으로 나왔다. 불려나온 사람은 또 다른 집에서 나온 두 사람과 모두 네 사람이었다.
중국군은 우리들에게 들것에 누워 있는 중국군 부상병을 어깨에 메라고 했다. 들것이라야 나무에 가마니를 묶은 것이다. 어깨에 메니 무겁기가 말할 수 없었다. 사람의 무게에다 솜 외투와 침구 같은 부속품까지 메니 어깨에 통증이 왔다.
들 것은 생소나무로 만들어져 요동이 심했다. 산을 올라갈 때 앞사람은 들것의 나무를 손에 쥐고, 뒤의 사람은 어깨에 메야 가마니위의 부상병이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내려갈 때는 반대다.
눈 쌓인 산길은 미끄러워 걸음의 진도가 한없이 늦었다. 낮에는 철두철미하게 산길로만 갔다.
그들은 아군 비행기가 보이면 총을 쏘았다. ‘휘지나래(비행기가 온다)’라고 중국말로 외쳤다.
이 말이 아군 비행기가 온다는 신호다. 이럴 때 들 것이 요동치면, 가마니 위의 중국군 부상병이 죽는다고 고함을 쳤다.
겨울 해는 짧다. 산길을 하루에 20킬로미터 정도로 걸어서 북쪽으로 이동했다.
폭풍우가 지나간 듯 고요하기만 하다. 한 차례 격전이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낮인데도 움직이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나는 눈길이 미끄러워 짚으로 신발을 묶었다.
우리는 휴식을 취하려고 민가에 들어갔다. 중국군들이 우리들을 둘러쌌다. 불과 20여 일 전에 우리가 중국군 포로를 봤듯이.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되레 중국군에게 둘러싸였다.
일단의 중국군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나간 후, 우리는 10여 명의 다른 중국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라고 주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보았다.
어제의 적인데 이상하다.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한문으로 필담(筆談)을 하거나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야기 중에 내가 놀란 일은 이들은 과거 국부군으로 싸우다가 모택동 군의 포로가 되어 한국전쟁에 중국군의 자격으로 참전했다는 것이다.
중국군은 분대장 ・ 소대장 ・ 중대장 등의 직책으로 조직되어 있다며 한 중국군이 자기들의 분대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분대장도 파안대소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대장을 반장, 소대장을 연장이라고 불렀다. 장교와 사병의 구분은 간단했다. 바지에 붉은 줄이 있으면 장교, 없으면 사병이다. 계급장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수천 명이 떼 지어 우리에게 겁도 없이 달려오던 중국군 인해전술의 첨병은 국부군 포로 출신이었다.
분대장 한 사람만 모택동의 팔로군 출신이고, 그 외 인해전술 참가 부대는 국부군 출신의 포로들인 것이다. 후방 부대라서 이런 가 했더니 전방 부대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성분을 중시한다. 중국군에서는 국부군 출신 성분은 이용 가치가 없다.
그러니 국부군 출신들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출신성분을 극복하려 했다.
결국 중국군 인해전술이라는, 세계전쟁사에서 볼 수 없는 전법의 첨병은 모두 국부군 출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노련한 국부군 고참 하사관도 분대원일 따름이다.
군복을 오래 입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요령과 통솔력이 있는 법인데, 전투 경험까지 많다는 것은 엄청난 이점이었다.
우리와 같이 단 며칠의 훈련만 받고 일선에 온 군인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 그래서 이들이 유효사거리 밖에서 보인 행동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던 것이다.
적진을 향해 선 채로 유유히 걸어오는 그들을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인해전술의 맨 앞장은 국부군이며 그 노련함은 오랜 전쟁 경험에서 온 것이라고 나 혼자 생각해보았다.
우리들은 그들과 작별 인사와 함께 악수까지 하면서 헤어졌다.
민족은 달라도 전쟁에서 같은 포로 신세 경험을 가진 자들끼리는 서로를 정말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들은 멀리 떠나는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우리들은 산길로 산길로만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인도하는 중국군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지리에 밝은가 하는 탄복을 절로 자아내게 했다.
그들이 진격했던 길이라고 가정한다 해도, 밤길 행군인데 어찌 이리 잘 알고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지도도 없이 그들은 우리들의 앞에서 또는 뒤에서 거침없이 걸어갔다.
중국군의 면밀한 부상병 운반은 탄복을 자아냈다.
청천강(청천강)이북은 유엔군 비행기도 잘 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상병을 트럭이나 기타 운반 수단에 의해서 후송해도 큰 문제가 없었을 텐데 굳이 들것으로 화풍(화풍) 광산(광산) 부근까지 운반했다.
2주일 간 의 행군 중에 낮에는 물론 밤에도 중국군 트럭은 보지 못했다. 철두철미하게 산길을 따라서 행군했다.
중국군이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때는 외가닥 나무 졸대를 어깨에 얹고 그 양쪽 끝에 물건을 매달아 춤추듯이 산으로 들로 옮겼다.
중국군에는 중화기가 없었다. 중국군이 소화기로만 막강한 화력을 가진 유엔군을 상대로 정규전을 벌인다는 것은 매우 불리했다.
그러니 철두철미하게 유격전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를 인솔한 중국군은 우리들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무서원(경찰)에게 인계했다.
내무서원 복장은 인민군 복장과 같았다. 단지 인민군은 모자와 바지의 줄이 붉은색이고 내무서원은 녹색인 것이 달려있었다. 계급장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나는 포로로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무서원과 첫 대면을 했다.
역설적이게도 중국군은 타민족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관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무서원은 같은 민족이지만 이념적으로 적대시하게 되어 감정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었다.
그동안 동족 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유엔군과 중국군이 개입하여 대리전 양상으로 벌어진 상황이기에, 내무서원이 우리를 어떻게 대할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몇 마디 묻고 바로 총살할까. 아니면 감옥에 보낼까. 그들이 과연 우리를 어떻게 할까.
나는 어린 나이지만, 죽음이 내게 닥쳐왔다고 생각하자 모든 것을 잊고 삶을 체념했다. 나는 운명의 순리에 몸을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내무서원은 40세가량의 나이에 사나운 눈매를 가졌으나, 우리에게 잘 대해줬다. 잠시 그 자리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내무서원은 우리들을 가파른 산길로 안내했다. 눈 쌓인 산길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 때로는 발목까지, 때로는 무릎까지 파묻히곤 했다.
멀리 시멘트 기둥에 ‘화풍 광산’ 이라고 쓰여 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아! 나는 이제 여기서 광부로 일하다가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땅굴 속에서 나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며 또 올라갔다. 보초가 보이는데도 보초는 인민군 복장이다.
내무서 에서 우리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군에서 관리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박진홍 회고
광산노동 저거 시켜도 되는거임?
제네바협약이란게 현대에서도 안지켜지는데 저때라고 지켜졌을리가 있나 총살 아니면 노동형이지
군사적이거나 위험한 노동은 금지되는데 광산이니 위험에 포함될 수 있을지도 벌목까진 허용하는 거 같던데
@ㅇㅇ(218.39) 무슨 총살타령이야 독소전쟁이나 제3세계 전쟁이 오히려 전쟁의 예외임
뭔가 잘 하던게 최소 하나이상 있었으니 잠시나마 한국 미국 밀어낸 거구만
국민당 출신들을 소모하고 싶던 공산당 + 공을 세워 공산 중국에서 인정받고 싶은 국민당 출신 병사들의 구도가 흥미롭네
그러게 전쟁이란게 생각보다 단순하지가 않네 전쟁으로 정적을 줄이고 싶어하고 전쟁으로 출세하려고 하고..
사병들 개인 장구류 신경 안 쓰는 건 유구한 전통이네. 짱개군보다 허접한 피복류를 배급받은 국군이라니
이건 뭔 - dc App
그래서 뭐 어떻게 되었다는건데? 뒤가 없어?
이후 박진홍은 포로교환때 남쪽으로 돌아옴
미국놈들은 50년대에도 오리털이 들어가있는 침낭에서 잤다고?? 존나 부럽네ㅅㅂ 나는 2020년대에도 이상한 솜이나 들어가있는 침낭에서 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