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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 고개에서북괴군의 남하를 저지할 때의 일이었다.
병사들이 진지에 배치되어 있는데 적의 전차가 굉음과 함께 미아리 고개로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겁에 질린 병사들을 후퇴명령도 없이 무질서하게 도망을 쳐 북악산 기슭까지 와서는 그만 정신을 잃고 잠에 곯아 떨어졌다.
얼마 동안이나 잤는지 모르지만 숲속 긑처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발자국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소리는 내가 누워있는 바로 옆 오솔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시내 쪽에서는 적의 전차 궤도 소리와 함께 "만세! 만세!" 하는 군중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당장 내 곁을 지나가고 있는 무리의 정체가 절대 관심사였다.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북괴군 전투 보병의 대열이었다.
한 2개 보병대대쯤 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보병대열이 끝나는 가 싶더니 뜻밖에도 이번에는 여군의 대열이 나타났다.
어깨에 노란 견장을 단 여 장교가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여병들은 한결같이 스물 미만의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더러 따발총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무장이었고, 구급낭이나 통신기재 등을 들쳐메고 있었다.
여군 대열을 그리 길지 않았다. 금방 끝이 났다.
그런데 여군 대열의 맨 뒤 여성 하나가 대열에서 뒤로 처지더니 급히 허리띠를 풀고 어깨에 메고 있던 따발총과 전화기를 무거운 듯 땅에 풀어 놓았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까고 쪼그려 앉아 소변을 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소총을 움켜쥐고 여병이 용변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주저함 없이 "손들어"하며 여병 앞으로 뛰어 나갔다.
여병은 기겁을 하며 손을 번쩍 들고는 살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여병은 어딘지 모르게 침착하고 대담한 표정이었다.
나는 얼른 여병의 따발총을 집어 들었다. 여병의 품 안에서 군인증과 몇 가지 공산주의 정치 선전 전단문, 김일성 장군 개선기, 김일성 유격대 전사초 따위의 소책자가 나왔다.
소속이 어디냐고 물으니 4사단 18연대 문화부라고 하였으며, 계급과 직책을 물으니 계급은 없고 직책은 분대 선전지도원이라고 하였다.
선발된 열성분자로서 말단 세포책임자 같았다.
나는 여병을 데리고 소나무가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갔다.
여병은 곧 자신을 죽이는 줄만 알고 표정이 돌처럼 굳어 있었지만, 내가 묻는 말에는 거침없이 또박또박하게 대답했다.
고향은 평안북도 강계이고 현 주소는 평안남도 순안이라고 했다. 외가가 있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순천여자사범전문학교 재학 중에 당과 학교의 권고로 군대에 나왔다고 하면서 조국해방전쟁이 승리로 종결되면 학교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김성애"라고 또렷이 대답했다.
이런 저런 질문을 해보았으나 공산당이 옳다는 식의 교육에 뼈에 배인 철부지 소녀같이 보여 소지품을 빼앗고 가라고 놔 주었으나 당돌하게도 군인증과 김일성 관련 소책자를 돌려달라고 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잔소리말고 어서 가!"라고 소리치며 총대로 돌려세웠다.
그러자 여병은 할 수 없다는 듯 돌아서면서 "그럼 안녕하라요, 그리구 기 책 잘 간직하구 수령님 항일혁명 투쟁사 깊이 녕구하라요!" 이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산을 뛰어 내려갔다.
두어 번 내딛던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여병이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 그 자리를 떠나 북악산 중턱 숲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향했다.
이후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장호원에서 이천을 탈환하고 북상하고 있을 때, 길가 논 한가운데서 매복을 하고 있던 적 패잔병들에 의해 중대장을 비롯하여 7~8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부상당했다.
즉시 화력을 집중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20여 명이 죽고10여 명의 부상자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며 길바닥으로 기어 나왔다.
그 부상자들 가운데 소녀병도 끼어 있었다. 나는 앞으로 뛰어 나갔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한쪽 어깨에 피를 철철 흘리는 앳된 소녀는 내가 6월 28일 서울 북악산에서 잡았다가 놓아준 바로 그 북괴군 4사단 18연대 문화부 소속의 김성애였다.
나는 휴대하고 있던 압박붕대로 소녀병의 어깨의 상처를 싸맸다.
소녀병은 괴롭게 감고 있던 눈을 떠 나를 쳐다보았다. 살려달라는 애처로운 눈이었다.
나를 알아보겠냐고 물으니 순간 소녀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안심하라, 상처는 대단치 않으니까." 말을 하고 소녀병의 손을 꼬옥 쥐어 주었다.
"고마워요." 하면서 소녀병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작전관 서 대위에게 부상한 소녀병에 대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곧바로 구급차 대용의 소형 트럭에 실어 대대 후방 지휘소로 보내 응급치료를 한 후 포로 수용소로 후송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날 대대에서는 포로들을 후송할 차편이 없어 이천극장에 수용하고 있었는데 그날 밤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문제의 그 소녀병이 이천극장에서 새벽 2시쯤 변소 가는 척 하다가 경비를 맡고 있는 치안대 한 사람의 옆구리를 칼로 찌르고 달아난 것이다.
보통 악바리 계집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휴전 후 북한 호위국 여비서로 발탁되었다가 김일성과 불륜의 관계로 김일성의 아이, 그러니까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을 임신하여 1957년 김일성과 결혼했다.
6 25 당시 북괴군 4사단 18연대 문화부 소속이었던 그 앳된 여병이 훗날 김일성의 정식 처가 될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으랴.
동명이인의 여인이겠지 했으나 모 기관에서 입수한 김일성 처의 사진을 확인해 본 결과 지난 날의 그 여병 김성애가 틀림없었다.
- 이기봉 서술
* 손광주는 김성애가 1954년 김평일을 출산하고, 1963년 김일성과 정식 결혼하였다고 주장했다.
김성애 24년생이고 1950년 기준 26살인데 소녀병이 아니라 그냥 여군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