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참령과 강화진위대 사진)
보통 군대 해산 당시 해산에 반발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의 교전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 보통 남대문 전투거나 좀 더 관심있는 사람들은 원주진위대 봉기를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이야기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바로 강화 분견대와 일본군의 교전 이야기다.
원래 8월 11일날 해산 하기로 되어 있는 강화 분견대는 8월 9일 하사관인 지홍윤, 유명규, 하정도 등이 해산을 거부하기로 하고, 병사들을 모아 봉기를 제지하는 분견대장 부위 민완식을 축출하고, 무기고를 열어 무장하고, 500여명의 강화 주민들이 합류하는게 이들 봉기의 시작이다.
해산 거부를 주도한 하사관들은 봉기군을 지휘하여, 순사 주재소를 급습하고, 군청을 점령한 후, 일진회의 총무이자 군수 정경수를 처단한 다음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 강화도와 김포 반도 사이에 있는 염하의 갑곶 나룻터 부근에 병력을 매복시켜 상륙을 대비했다.
이에 일본군은 즉각 보병1개 소대 기관총 2정을 강화도에 급파했으나, 이들은 봉기군의 매복에 걸려 1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결국 일본군은 상륙을 해 갑곶 북쪽 고지를 점령 하고, 봉기군은 이들과 밤이 될 때까지 사격전을 벌인다음 강화성으로 철수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갑곶을 수색하면서, 민가를 불태운 다음, 봉기군을 추격해 강화성의 동문까지 진출 하였으나, 봉기군은 강화성의 성민과 방어선을 구축해 일본군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했다.
2일 후 11일 새벽 일본군은 기관총 2정을 이용해 결국 7시에 성문을 돌파했고, 봉기군과 일본군은 강화성내에서 시가전을 하루종일 전개했다.
그러나 오후 6시 일본군 2개 중대와 기관총 2정, 공병 1개 소대의 증원군이 강화도에 상륙하면서 불리해진 봉기군은 강화섬을 탈출해 반으로 갈라져 일부는 황해도로 이동하고, 일보는 서해안의 섬을 돌아다니면서 일본군과의 교전을 계속하면, 이들 봉기가 의병으로 전환되면서 끝이 난다.
이렇게 강화 분견대의 봉기가 끝나고, 정미의병전쟁에 합류 하는데, 이는 정미의병에 큰 힘이 되었다.
참고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84.의병항쟁사
남대문 전투도 그렇고 근대 전투에서 기관총 없으면 존나 존나게 불리하다는게 여실히 증명되는듯
ㄴ ㄹㅇ 기관총 없으면 겁나 불리한듯
무조건 추천
허미 이건 몰랐네 - dc App
ㅜㅠ 안타깝습니다 - dc App
상남자추
정미의병에 기여한거 없음. - dc App
하정도 단신으로 합류한게 티가 난것처럼 서술한건 당시 집필진에 하씨성을 가진 새끼가 있어서 그렇다. - dc App
223.62 // 근거는?
ㄴㄴㄴ근데 강화진위대가 내륙으로가서 의병에 참여한건 하정도 말고도 있지않나?
동일에 또 해주 전보를 거한 즉 강화에서 패하여 달아난 한병이 황해도 연해변에 출몰한다함으로 해주수비대에서 병정을 파송하였고...대한매일신보 8월17일자 기사임
이걸 영화로 만들면 대박치것 같은데 - dc App
http://www.ganghwado.co.kr/MAIN/SUB_A.ASP?GUBUN=VIEW&BCODE=A&SCODE=001&IDX=3646&PAGE=1&TNAME=TB_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