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동편: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454462
이상범편: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458061
소정 변관식 화백은 1899년 황해도 옹진에서 출생하셨습니다. 화백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어린 화백을 기른 것은 외조부 소림 조석진 화백이었습니다. 조석진 화백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화백으로서 서화미술원을 심전 안중식 화백과 함께 열어 후진 양성에 주력하시기도 한 분이셨습니다. 그 덕에 화백은 어린 시절부터 예술 작품들을 접하면서 자랐습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화백의 첫번째 예술 활동은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졸업 후 화백은 1917년 외조부가 설립한 서화미술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1921년 선생은 서화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화단에 등단합니다.
그 이후 화백은 1922년 동연사라는 모임을 조직했습니다. 이 모임의 멤버로는 이용우, 노수현, 이상범 그리고 변관식 화백으로 그 당시 막 화단에 등단한, 신인 동양화가들 중 두각을 보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모임을 통해 화백과 화백의 동지들은 전통 회화의 새 방향을 모색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임은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전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화백은 1925년 김은호 화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배우게 됩니다.
그곳에서 화백은 고무로 스이운이라는 일본화가를 만나게 됩니다. 또한 도쿄미술학교에서 청강생으로서 4년간 학습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화백은 당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동양화 사조인 신남화풍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면 신남화풍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신남화는 새로운 남화라는 뜻입니다. 이 남화라는 것은 일본 전통 문인화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이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면서 근대성을 세우려 하던 일본 화단의 무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10년대 서양화가들이 남화를 후기 인상파적 관점에서 재발견하였고, 이를 통해 기존 남화의 표현 양식을 사용하되, 서양 인상파의 접근법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렸고 이것이 신남화라고 불리는 사조입니다.
변관식 산수도 고무로 스이운
위 그림이 바로 화백이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기, 1926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옆의 고무로 스이운의 그림과 한 번 비교를 해 봅시다. 수직적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물의 표현 등에서 유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단에 사용된 준법들을 살펴보면, 이미 화백은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법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화백은 1929년 귀국합니다. 화백은 1922년부터 귀국하기 전 해까지 총독부에서 주관하는 선전에 꾸준히 그림을 냈지만 귀국 이후 이를 포기합니다. 그 이후 서화협회의 간사를 역임하시면서 작품 활동을 펼치시다가 1937년 돌연 서울을 떠나 전국 유랑의 길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화백은 이 시기, 평생의 작품 소재가 되는 금강산에 방문하게 됩니다. 화백은 금강산에서의 사생을 통하여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더욱 단련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화백은 1942년부터 몇 번의 개인전을 가지고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화백은 전쟁을 맞이하지만 처가인 진주로 피난을 가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화백은 휴전과 함께 열리게 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속칭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됩니다. 그러나 국전은 빠르게 분열상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문교부가 독단적으로 예술원 회원들에게 국전심사위원 추천권을 준 것이 문제가 되어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술가들을 관리 통제하려던 문화인 등록령을 통한 국가의 폐쇄적 예술원 운영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낙선자들은 낙선작품전들을 여는 것을 통해 이에 항의하였습니다. 여기에 이어 대한 미술협회의 위원장 자리를 놓고 갈등이 일어나 한국미술협회가 떨어져 나오면서 이러한 갈등은 더욱 가열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화백은 이러한 혼돈상을 이기지 못하고 국전의 비리상을 폭로하고 나오시면서 1957년 미술계를 등지고 재야 화가로서의 길로 나아가십니다.
화백은 미술계를 등진 이후에도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갑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원각사 벽화입니다. 화백은 1959년 새롭게 지어진 원각사를 꾸밀 벽화를 의뢰받았습니다. 금강산의 진주담을 그린 그 그림은 높이는 12척에 넓이는 5척으로 높이 3.6m, 폭 1.5m의 대작이었습니다. 화백은 낮은 물론이거니와 밤에도 자다 깨 그림을 그리는 등 한 달 동안 이에 어김없는 애정과 열정을 쏟으시면서 그림을 그리셨고 이를 자신의 최고 작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각사 화재로 소실되어버렸고 당시 화백께서는 땅을 치시며 통곡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당시 이 벽화가 어땠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이 남아있습니다. 바로 1960년에 그려진 내금강 진주담입니다.
내금강 진주담
진주담은 폭포에서 떨어져 튀는 물방울이 마치 진주와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명소로 많은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되었던 명소입니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화백의 그림 세계를 제대로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절벽을 따라 화면의 우하단에 물줄기가 네 개 시원하게 내려꽂힙니다. 솔잎 하나도 놓치지 않는 모습은 사경산수화로서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또한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시, 위로 올려다보는 앙시 등 시점을 자유롭게 변경시키면서 풍경 속으로 들어간 화백의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적 변화는 우리에게 강렬한 긴장감을 선사해 줍니다. 이전 편에 소개한 이상범 화백의 내금강 진주담과 비교해 보는 것 또한 좋은 방법일 듯도 합니다.
이후 화백은 1969년 고희전을 갖는 등 활발한 전시, 창작 활동을 펼치시다가 1976년 작고하시게 됩니다.
ㄱㅇㄱ?
ㄴ 몰라 - dc App
ㅇㅏ 벽화 아쉽네여...
차라리 미술갤같은 곳에 올리면 더 낫지 않을까요? - dc App
TCCC// 다 망했어. - dc App
그래서 전쟁 때 예술가들 행적이나 작품들 위주로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별로 건질 건덕지가 없더라 - dc App
앗... - dc App
그리고 추천 좀 주라. 글쟁이는 추천을 먹고 자아 - dc App
자라 - dc App
추천글 파슈 - dc App
근대화기열전으로 보고 들어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