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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는 공화주의자들을 포함한 국민 대다수가 페텡의 휴전 협정을 환영하며 안도했다.

당시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빼앗고, 프랑스를 "관광국"수준으로 전락시킬 속셈임을 프랑스인들은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의 경제는 독일에 종속되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페탱의 소극적인 저항은 이러한 현실을 저지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했다.

1943년까지 독일은 프랑스의 산업 생산량의 40%, 농업 생산량의 15%를 수탈했다.

프랑스산 육류의 1/4, 절반이 훨씬 넘는 항공기, 자동차, 기계가 제 3제국으로 약탈되어 실려갔다.

수입이 거의 없고 물가도 미친 듯이 오르면서 배급 체계와 임금 통제가 실시되었지만

인플레이션은 만연하여 1940년에서 1942년 사이에 물가는 2배로 뛰었다.

암시장이 창궐했지만 국민들의 건강이 극히 피폐해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독일 점령군이 프랑스 농산물을 약탈하면서 고기와 설탕 등 프랑스인들이 받는 일일 배급량은

독일인들의 절반 이하로 줄었고, 1943년에는 하루 1200칼로리에 불과했다.

비시 정부 당시 프랑스인들의 평균수명이 무려 8년이나 줄었고, 남녀 어린이들의 평균 신장은

7cm이나 작아진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히틀러와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이러한 프랑스인들의 굶주림이

1차 대전 직후 순무로 연명해야 했던 독일인들의 악몽같은 기억에 대한 복수라고 여겼다.

게다가 프랑스가 착취당한 것은 물자만이 아니었다.

독일에 잡혀 있는 150만 전쟁포로들의 아내들은 이미 더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을 뿐더러

1943년에 강제 노역 기구(STO)가 만들어져 100만이 넘는 프랑스의 장정들이

독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 앤터니 비버 "제2차 세계대전"과, "케임브리지 프랑스사"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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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탱마마 빵이 너무 작은레후...어째서 레후?
작은레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