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건으로 부터 오래됐다면 오래된것같기도 하다.
한달전의 그 립스틱자국의 오해 이후로 아직도 손목이 얼얼한것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어서,
지금은 손목시계마저도 거부감이 들어 쉬이 차고다니지 못한다.
물론 그런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아내는 큰맘먹고 사준 명품시계를 내가 안차고다닌다고 자꾸만 투덜거린다.
...트라우마 만들어준게 누군데..
다행인건 내가 지하철에서 어느 여자와 부딪혔고-심지어 나이 지긋한 아줌마-그로인해 셔츠에 립스틱 자국이 남았다는 사실을 아내가 비교적 일찍 믿어줬다는것이다.
...물론,내 처절한 발악이 빛을 발하기도 했다.

\'자기야,자기 내가 자기 립스틱 색깔까지 따지는거 알잖아,나 이런 진~한톤은 딱 질색이라고!딱봐도 아줌마들이나 바르고 다니는 그런건데!\'

비굴했던 기억을 뒤로한채 엘리베이터에 탄다.
11층을 누르고 기지개를 켠다.
왜하필이면 11층일까,하필이면 우리집 호수가 1102호가 되잖아.0하나만 빠지면 딱...
어우,싫다.

\"삑삑삑삑삑삑..띠로링-치킥\"

\"다녀왔어..\"

\"얘기좀?\"

\'다녀왔어?\'같은 상냥한 인사를 기대했건만,
싸늘한 아내의 반응에 내 머릿속을 관통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ㅈ되따...\'

침착하자.이럴때일수록 심리전에 능해야만한다.
일부러 백화점까지 가서 사온 오리지널 글레이즈드 도넛이 제 역할을 다해주길 빌며,
슬며시 다가가 아내를 뒤에서 껴앉으려...
했었다.

\"자기야 내가 오늘 조오금 늦었..어헛!\"

아내의 팔꿈치가 순식간에 아랫배를 치고들어오자 난 순간적으로 아내의 어깨를 휘감으려던 팔을 풀었고,이내 내팔은 아내에게 잡혀서 등뒤로 꺾어지고,난 밥상위에 엎드려 아내에게 깔린 모양새가 되버렸다.
음,등으로 뭔가 물컹한게 느껴지는데. 나쁘지않네, 이자세.

\"아..!아야 아,아,아-아아앗!내가 잘모태써!!내가 잘못해써어..\"

\"뭘 잘못했는데?\"

막상 물어보니 기억이 안난다.뭘 잘못했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답해야한다.분명 아직 그녀가 모르는 잘못까지 내가 샅샅이 고하게 만들작정으로 펴는 유도신문일지도 모른다.

\"어..오늘 늦게들어온거?\"

\"아니.\"

\"오늘 무슨 날이었어?\"

\"아니.\"

\"심부름 시킨거 있었어?\"

\"아니.\"

아내는 나를 거칠게 식탁위로 던지곤 내 얼굴앞에 프린트 뭉치 하나를 내보였고,
거기엔..내 노트북의 최근방문기록과 즐겨찾기,
결정적으로 성인용품사이트의 스크린샷이 들어있었다.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 받기엔 자기가 노트북에 남겨둔게 너무 많아서 말이야..\"

\"..잘못했습니다.\"

식탁위에 걸터앉은 그녀가 도넛박스를 눈치채곤,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눈빛이 아주 약간 부드러워졌다.

\"그리고말야,장바구니 목록에 흥미로운게 들어있던데.\"

떨리는손으로 페이지를 넘기자,관심가는 아이템을 선택해 모아둔 장바구니 목록이 나왔다.

\'하아..이 병신머저리말미잘새끼야..이걸 왜 안지우고..\'

좀 덜 민망한것들만 추려서 고해보자면 대충 이렇다.
여성용 죄수복컨셉 비키니,
털수갑&족갑세트,
크롬도금 공재갈...

아,충분히 민망한가.

\"자기,이런거 봐..?\"

변명의 여지가 없다.
빠져나갈구멍?당연히 없다.
뭐라 말해야할까.
쓸모없는 대뇌야 제발,회사에서 외근나갈 핑계 생각해낼때처럼 팽팽 돌아봐라.

\"근데 왜하필 털수갑이야?\"

\"응?어...\"

뜬금없는 질문이 갑자기 훅 들어오자 나도모르게 멍해졌다.
입이 마음대로 뭔가를 술술 토해낸다.

\"어..철제수갑은 자기가 직장에서 많이 볼거아니야?그래서 침대위에선좀 포근한 분위기로 해볼까 해서...\"

안경 아래로 보이는 눈에 당혹스러움이 가득차고 볼이 붉어진다.입안 가득 물고있던 도넛이 금방이라도 터져나올것같았지만 그녀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간신히 삼켰다.

\"이사람이 지금 미쳤나..!아니,..그걸 침대에서 쓸 생각을 다..!후우..\"

그녀는 기가차서 그런지 열받아서 그런지,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해대며 다른곳을 본다.

\"나도 변태같다고 생각하긴 하는데..음..내취향이 이런거 뭐 어쩌겠어..\"

\"..때릴거야?\"

\"..어?\"

이젠 내가 당황할 차례인가보다.뜻밖에도 아내는 내가 하려는게 뭔지 알고있는듯했다.
스팽킹까지는 생각 안해봤는데..
아니,일단 침묵으로 대응하자.

\"그..사이트..보니까,채찍같은것도 있고..
그렇길래..그쪽이면 그런거 할거아냐...\"

괜시리 웃음이 실실 나온다.
그쪽으로는 취향없는데.

\"아니..ㅋㅋ,ㅎ.때리는 플레이는 별로 안좋아해,나도.그냥 묶어놓기만 할꺼야ㅋㅋ\"

\"지금 웃어?\"

(침묵)

음,너무 나댔다.
나 지금 웃을상황 아니지,참.

\"난 자기가 막 여자들 때리는 그런 변탠줄 알고 진지하게 고민했단말야..근데 그게 웃겨?\"

그 먹을거 좋아하던 아내가 도넛을 내려놓는걸 보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솔직히,SM에 취향이 있던것도 아니었다.
단지 너무 잡혀사니 침대위에서만이라도 내가 주도권을 잡고싶어서 그랬을뿐.

\"아니야..그런거 아니고..그..\'낮져밤이\'라는거 한번 해보고 싶었어,나 그런 변태아냐.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런거지?그런거 맞지?\"

시무룩해진 리트리버같은 그녀를 옆에서 껴앉고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자기를 소중히 여긴다는 제스처를 그녀가 알아주길 바라며 그저 머리만 쓰다듬었다.

\"나도 남편인데,너무 아내한테 잡혀사는 느낌을 가끔 받거든.그래서,아마 이런쪽으로 욕망이 표출됬던것같아.

\"으음...\"

좀 먹혀드는것같다.적어도 이만큼 이빨을 털었으면 범죄자대하는것마냥 남편을 대하는건 만두겠지...

\"근데 어느쪽으로 잡혀산다는 느낌을 받았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내가 물어왔다.

\"방금처럼 호신술처럼 제압한다던가,수갑으로 묶어서 취조하는것처럼 식탁에서 심문한다던가 하는 부분들.\"

\"음,그래서 그걸 그만해줬으면 좋겠다는거지?\"

\"그렇지,내가 이래도 가장인ㄷ..\"

\"안돼.\"

WHAT THE,
방금 뭐라고요?

\"왜냐면 난 S취향이거든,ㅎ.\"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는 손에든 도넛을 베어물었다.




궁금한 사람은 없겠지만 전편에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