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 프랑스군의 분열과 군기문란에 대한 보고가 잇달아 들어왔다.
독일의 비밀 무기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문과 간첩들에 대한 근거없는 공포가 공황 상태를 일으켰다.
"독일 여군 공수부대가 수녀복을 입고 후방으로 강하했다."
"독일군이 정신병원에서 징집한 환자들을 자폭특공대로 선봉에 세웠다."
"독일군이 스위스 밑으로 땅굴을 파 (남프랑스의)툴루즈에서 쏟아져나왔다." 같은 어처구니없는 소문들이 번져나갔다.
간첩 색출의 광풍이 몰아쳐, 무수한 장교와 사병들이 그들을 프랑스 군복을 입은 독일군으로 생각하고
겁먹은 병사들에게 무작위로 총을 맞았다.
그러한 종잡을 수 없는 참패를 설명할 유일한 방법은 배신뿐이라는 듯, 프랑스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Nous sommes trahis(우리는 배신당한거다)!"
덩케르크에서는 배에 공간이 없으니 개인 물품은 버리라고 했는데도 짐 꾸러미를 챙겨온 프랑스 병사들을
빡친 영국군들이 (빠져죽을 깊이는 아니니까) 항구 벽 바깥의 바다로 내던지는 추태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프랑스군 대부분이 항복 준비를 한다는 사실에 오히려 아직 얼떨떨했다.
제 62보병사단의 한 병사는 "어느 한 도시에 우리가 가장 먼저 입성하자
그곳의 프랑스군들이 이틀 동안 바에 멍하니 둘러앉아
우리가 그들을 포로로 잡으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프랑스군의 현실이며, 소위 "군사대국의 면모"였던 것이다." 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중략, 2년 뒤) 1942년, 롬멜의 이집트 침공 계획 중 테세우스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제 1단계는
영국군의 방어선을 측면에서 포위하는 것이었다.
이 방어선은 토브룩에서 서쪽으로 80km떨어진 해안의 가잘라에 있는 방어진지로부터
마리-피에르 쾨니그 장군의 제1자유프랑스 여단이 지키는 사막의 전초기지 비르하케임까지 뻗어 있었다.
이 지역에는 7개의 진지가 있었는데, 각각 보병여단들이 대포와 철조망, 지뢰밭을 다음 진지까지 쳐 놓고 방어했다.
후방에는 리치 장군이 기갑예비대를 배치해 역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롬멜은 어떻게든 토브룩을 점령할 생각이었다.
이 항구를 점령하지 못한다면, 독일군 보급 트럭들이 트리폴리에서 전선까지
장장 14일간을 왕복하며 기름을 마구 퍼먹게 될 터였다.
...(중략) 5월 27일 새벽, 비르하케임 동남쪽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제3인도 차량화여단이
이탈리아군 아리에테 기갑사단의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비르하케임에서 외롭게 진지를 지키고 있던 쾨니그 장군의 자유프랑스1여단은
밤새 사막에 울려퍼지는 전차 엔진 소리를 들으며 날이 밝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감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정찰대가 적이 이미 프랑스군의 뒤에 있으며 보급선이 차단되었음을 확인했다.
쾨니그 장군의 휘하 병력 약 4천 명 중 절반은 외인부대였으며, 나머지는 식민지 병사 2개 대대와 해병대로 이뤄져 있었다.
이탈리아 아리에테 사단 전차들은 영국군 인도 여단을 궤멸시킨 여세를 몰아
마리 피에르 쾨니그 장군의 제 1자유프랑스 여단을 향해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프랑스 포병들이 프랑스제 75mm야전포와 보포스 대공포로 전차 32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단 6대만이 겨우 철조망과 지뢰밭을 통과했지만, 프랑스 외인부대는 버벅거리고 있는 이탈리아 전차 위에 기어올라
좁은 틈이나 해치를 통해 전차 안에 총을 쏘아 제압해버렸다.
이탈리아 전차부대의 공격이 어리석게도 보병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프랑스군은 용맹하게 싸워 적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히고, 연대장을 포함한 91명의 포로를 잡았다.
또한 독일 제 90경보병사단과도 소규모 교전 끝에 물러가게 했다.
드골은 "1940년 6월의 치욕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가 독일에 당당히 맞섰다."고 이날의 일을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롬멜의 과감한 계획은 기대했던 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었다.
비르하케임에 있는 프랑스군이 순식간에 무너지리라는 롬멜의 기대와 전혀 달리, 프랑스군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이제 롬멜은 크게 고심하게 되었고, 참모장은 아프리카 기갑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 작전은 대규모 위력정찰에 지나지 않았다고 국방군 총사령부에 보고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는데, 영국군 역시 전차를 충분히 모아 독일군을 역습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중략)영국군은 '오븐', 독일군은 '소세지 전골'이라 부르며 서로 치를 떨었던 전투가 5월 31일까지 이어지는 동안,
롬멜은 휘하 주력을 영국 150여단 쪽에 투입했다.
전차와 야포, 슈투카를 동원한 엄청난 맹공격이 가해졌다.
여단은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며 독일군의 혼을 빼놓았다.
그러나 서쪽에서는 영국군 지휘관들이 반격에 계속 실패하면서, 그들의 형편없는 지휘능력을 입증해 보이고 있었다.
다시 기회를 잡은 롬멜은, 남쪽으로부터 가잘라 전선을 붕괴시키기 위해
비르하케임에 있는 프랑스군을 격파할 것을 제90경사단과 이탈리아군 트리에스테 사단에 명령했다.
6월 3일, 쾨니그의 프랑스군 1개 여단은 자신들을 공격해오는 압도적인 적 2개 사단을 또다시 물리쳤다.
영국군도 구원군을 보냈지만, 독일 제 21기갑사단과 충돌하는 바람에 물러나야 했다.
독일 공군은 그동안 그토록 무시하던 레지아 아에로니우티카(이탈리아 왕립 공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똥꼬쇼 끝에
지중해 전역에서 가용한 사실상 모든 슈투카와 폭격기를 긁어모아 전선에 쏟아부었다.
악에 받친 프랑스 식민지병들은 낙하산을 타고 격추된 슈투카에서 탈출한 독일군 파일럿들을 잡는 족족 죽여버렸다.
산 채로 구워지는 듯한 더위와 숨막히는 먼지, 극에 달한 갈증과 굶주림 속에서도
쾨니그 장군의 프랑스군들은 묵묵히 참호를 더 깊게 파서 더 거센 공세에 대비할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곳에서 오래 버틸수록, 영국 제8군을 철수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끈질긴 프랑스 진지에 분노한 롬멜이 마침내 스스로 진두지휘에 나섰다.
6월 8일, 독일 포병대와 슈투카 편대가 비르하케임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야전병원에 떨어진 폭탄 한 발에 부상병 17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2년 전과 달리 프랑스군의 멘탈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어느 장교는 한 포반의 최후의 생존자인 외인부대원이
한쪽 손이 날아갔는데도 이를 악물고 75mm포탄을 피가 철철 흐르는 팔목으로 떠받치면서 재장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6월 10일에 마침내 비르하케임이 무너졌을 때, 프랑스군 수비대는 모든 포탄을 다 써버린 상태였다.
프랑스군을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부대인 영국 제7기갑사단이 그날 밤 철수해야 했기에
쾨니그는 알아서 탈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쾨니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남은 병력들을 대부분 독일군 포위망에서 빼내는 데 성공했는데,
처음에는 들키지 않았지만 얼마 후 집중 포격을 당했다.
배짱과 실력을 겸비한 영국군 운전병 덕분에 쾨니그의 지휘차량은 무사할 수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큰 피해에 발광한 히틀러가 포로로 잡은 외인부대원을 모두 학살하라는 정신나간 명령을 내렸다.
물론 동부전선에서 이런 노골적인 학살명령은 소세지 먹고 맥주 마시듯 일상사에 불과했지만
대놓고 미개르만 살인 강도떼던 동부전선과 달리 '국방''군'코스프레 정도는 하던 서부전선에선 아직 전례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이 학살을 그동안 안했던 건 아니고)
히틀러의 기적의 논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인즉, 독일인 외인부대원은 민족의 반역자이니 당연히 죽어 마땅하고
외인부대의 프랑스인 장교들은 비시 프랑스에 반역한 반란군이니 역시 죽어 마땅하며
독일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나머지 외인부대원들은 돈에 팔린 용병들이니 어쨌든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롬멜뽕들 행복회로 속 사막의 고결한 여우 기사 이미지는 물론 좆거품이지만
어쨌든 나치 평균보다는 나은 인성의 소유자는 확실했던 롬멜은
히틀러의 명령을 못 들은 척 외인부대원들이 영국군 포로들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쾨니그와 그의 부대원들이 대부분 무사히 탈출하여 영국군과 합류에 성공했다는 희소식을
영국군 참모총장 앨런 브룩 장군에게 전해들은 드골은, 그날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다.
드골이 훗날 회고하기를 "감동으로 가슴이 뛰고, 자랑스러움에 흐느끼며, 기쁨으로 눈물이 흐르는"
자기 자신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드골은 이 순간이 '프랑스 부활의 시작'임을 알고 있었다.
비르하케임 역은 파리의 6호선 지하철 역 이름이다.
파리 15구에 있고, 에펠탑과 가장 가까운 역이라 관광객이 몰리는 역이다.
이 역은 1906년 4월 24일에 그르넬 역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했으며,
<비르하케임-에펠탑>으로 1949년 6월 18일에 개명되었다.
비르하케임 역 인근에 있는 비르하케임 다리에는 다음과 같이 적힌 기념판이 있다.
"1942년 5월 27일부터 6월 11일까지 리비아의 비르하케임에서,
자유 프랑스군 제1여단이 독일의 롬멜 장군이 이끄는 2개 사단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냈고,
전 세계에 프랑스가 결코 싸움을 그만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펄-럭
출처
앤터니 비버 "제2차 세계대전"
쟤네 엥발리드에 저 전투 존나 뽕터지게 전시해놨더라 - dc App
정보츄!
추
엘랑이아닌데 엘랑의 이미지로 너무 굳혀져서 ㅠㅠ - dc App
"휘하 병력 약 4천 명 중 절반은 외인부대였으며, 나머지는 식민지 병사 2개 대대와 해병대"
"배짱과 실력을 겸비한 영국군 운전병 덕분에"
흠...
흐으으으음...
엘랑인이 아니라 가능했다
쾨니그 지휘차량이 그거임? 독일군에서도 쓰는 차라 밤중에 독일군 행군대열에 꼈다가 안들키고 탈출한거?
엘랑인없는 엘랑군
데스앗 데에엥 데에엥
순혈엘랑은 없네
엘랑인 100퍼였으면 엘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