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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텐부르크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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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학(版圖學). 지도 위로 미치는 한 세력의 강역과 영향력을 분석하는 학문. 당연히 세상에 그런 학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는 2차원의 지도와 달라서 유무형의 형태로 국경과 영토를 넘어 뻗어나가며 올바르게 생긴 국토와 못 생긴 국토를 굳이 가려내지 않는다. 지도 위의 점과 선은 그야말로 지도 뒤에서만 존재하는 망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지도 위의 망상을 한 번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어린 시절 사회과부도(혹은 지리부도)에 펼쳐진 수많은 지역과 나라를 보며 즐거움을 느껴본 적이 있고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다른 세계가 만들어진 과정을 만나보곤 했다. 독일이 동서로 분리되어 있고, 몽골이 거대한 제국이며, 이제는 사라진 이름의 국가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최강자였다.


다른 지구의 모습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어릴 적 고구려의 거대한 강역을 보며 신기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장 작던 신라가 통일신라를 완성하고, 알고보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발해가 그리도 거대했다는 걸 느끼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대륙 끝에서 끝까지 이어지는 몽골 제국. 본토보다 훨씬 거대한 식민지를 갖고 있던 스페인. 세계를 붉게 물들인 소련. 그들은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광개토대왕, 진흥왕, 대조영 등 그들만의 정복의 꿈을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세계. 


그 세계는 또 다른 꿈을 가진 자들을 움직여, 자기만의 선을 지도 위에 긋게 만든다. 그들은 정복의 꿈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며 지도 위에 자기만의 선을 긋기 시작한다. 지금 보이는 선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자기만의 선을 그어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보거나 과거의 제국을 부활시켜본다. 초등학교 시절 공책에서, 지리부도에서, 머리 속 상상에서 수많은 형태의 선이 그어져 이곳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대체역사이자 가상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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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에서 유행하는 가상역사물도, ‘당신들의 조국’도, ‘슈퍼 파워 2’나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에서 발매하는 게임들도 펜과 마우스를 잡은 자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다. 그리고 그 선과 강역, 판도에 이유가 붙기 시작한다. 짐승을 좋아해서, 근육을 좋아해서, 진정한 로마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세계 정복을 위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하기 위해. 


밀리터리를 좋아하는 인간들도 그렇다. 현실의 지정학과 과거의 역사, 미래의 군사기술은 지금과 다른 세계를 상상할 재료가 된다. 조선이 일찍 개항을 한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다른 세계, 냉전이 장기화된 세계, 국민당이 국부천대를 하지 않은 세계. 우크라이나 전쟁의 정지선, 가자 지구의 처분, 미국-이란 전쟁의 결과에 따라 어떤 미래가 생길지를 상상하고 선이 그어진다.


이번 여행 역시 세계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선을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타지키스탄, 카라바흐, 발칸, 수바우키, 발트 3국 등 오늘날 존재하는 선들은 실제 세상의 사람들이 욕망하고 다투고 끝내 만들어낸 선들이다. 그렇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유독 이질적인 곳 하나를 가기로 했다. 내가 그려놓은 가상의 선이 처음으로 시작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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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독일 북서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함부르크에 도착했다.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새해 새벽 2시까지 외국인들과 진탕 술을 마신 뒤 핀에어를 타고 도착한 함부르크는 눈이 강하게 내리고 있었다. 비틀즈와 융페르슈티크,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등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진한 눈발이 내리기에 시내 관광을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1월 1일에도 제대로 구경한 건 함부르크 중앙역에서 가까이 위치한 함부르크 미술관 뿐이었다.(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이야기만 해도 길게 시간을 할애해야 하나 일단은 생략한다) 새해를 맞이하고 새로운 세계를 보기에는 다소 애매한 도시. 이곳 가까이에 수병 반란으로 유명한 킬과 독일 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무덤이 그리 멀지 않지만 이번에는 그곳을 가지 않는다. 나는 함부르크 남쪽에 위치한 소도시 로텐부르크를 선택했다.


Rotenburg (Wümme). 정식 명칭은 ‘로텐부르크안데어뷤메’로 니더작센주에 위치한 아주 작은 도시다. 한국에서는 낭만 가도에 위치한 바이에른주의 로텐부르크가 더 유명하지만 그곳의 정식 명칭은 로텐부르크옵데어타우버(Rothenburg ob der Tauber)로 엄밀히 따지면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로텐부르크를 검색하면 거의 모든 정보가 바이에른주의 로텐부르크를 알려준다. 한 마디로 인지도 최하의 별 것도 아닌 동네라는 뜻.


그렇지만 나에게는 뜻깊은 곳이다. 이곳은 내가 그리던 거대한 판도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월드 인 컨플릭트’(World in Conflict, 통칭 월컨)란 이름의 게임이 출시되었다. 지난 번에 언급한 ‘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가 FPS계에서의 현대전이란 무엇인지 보여줬다면 ‘월컨’은 실시간 전술 게임에서의 현대전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플레이어들은 1989년 냉전 시대 격화된 제3차 세계대전 속에서 보병-전차-항공-지원 4개 병종 중 하나를 골라 팀플레이를 통해 승리해야 했다. 더 많은 점령지를 유지하고 더 많은 적을 제압하면 약하게는 박격포 사격부터 화학무기, 네이팜, 중포 사격을 넘어 융단폭격과 전술핵공격까지 가능한 게임으로 한 때 시대를 지배했던 게임이다. 이미 서비스가 끊긴 지 10년이 넘어가지만 미군 공수부대가 미사일이 빗발치는 뉴욕에 상륙하고, 하늘에서 붉은색 낙하산과 함께 소련군 전차가 내려오는 게임 예고편은 오늘날까지도 압도적이다 못해 아이코닉한 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 시절 밀덕이라면 ‘월컨’에 매료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80년대 말 실제 세계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세계가 평화로워지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달랐다. 과거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대해 서술하며 ‘제3의 선택을 한 자’라고 평했는데 냉전 시대에 내릴 수 있는 일반적인 선택은 공격, 혹은 방어였다. 아마겟돈이나 심판의 날이라 부를 수 있는 제3차 세계대전만이 남아있는 것 같던 세계. 만약 냉전이 끝나지 않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지 않고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정면 충돌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 그걸 궁금해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월컨’은 그 궁금증의 편린이었다.


오늘날에도 ‘ARMA 리포저’나 워게임 시리즈, ‘WARNO’ 같은 작품들 월컨의 정신적 계승작이라는 표현으로 월컨이 불러 일으킨 궁금증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도 그러했다. 나 역시도 게임을 통해 흥미를 갖게 된 냉전시대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가상의 1989년과 가상의 제3차 세계대전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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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흐름은 동일했다. 체제의 균열이 생긴 공산 진영이 자유 진영을 선제타격하고 양측간의 충돌이 격화된다. 양측의 균형이 좀처럼 깨지지 않자 공산 진영은 미국 본토를 타격하고 자유 진영은 한반도를 통해 중국으로 진격한다. 그러다가 핵전쟁 위기가 격화되자 소련군 내에서의 쿠데타가 일어나 강경파가 온건파로 교체된다. 그리고 평화 협상이 이루어져 전쟁이 끝난다. 지금 보면 그 전개는 톰 클랜시의 ‘붉은 폭풍’을 기본 베이스로 해서 당시 내가 게임과 소설에서 주워 모은 아이디어의 합성물에 가까웠다. 미 본토 타격은 ‘월컨’의 잔향이었고 한반도를 통한 중국 진격은 김경진의 ‘3차대전’에서 빌려온 상상에 가까웠다. 아직 인터넷도 잘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 군사 정보라곤 얻을 방법이 문학과 게임 뿐이었던 기구한 시절 아이디어의 총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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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구한 세계대전의 선은 세계 곳곳을 따라 그려졌고 가장 핵심적이었던 건 공산 진영의 바르샤바조약기구, 즉 조약군과 자유 진영의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NATO군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유럽이었다. 다른 곳보다도 가장 정보가 없던 이곳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구글 어스가 필요했지만 컴퓨터를 잘 몰랐던 그 시절 구글 어스 대신 눈에 들어왔던 건 거대한 종이 지도였다. 나는 그 종이지도에서 제3차 세계대전의 중심이 되어야 할 도시를 골라야 했다. 뭔가 대도시는 아니면서도 대도시에 붙어있고, 자료를 찾아보면 나올 것만 같은 곳. 그렇게 골라진 곳이 브레멘과 함부르크 사이 위치한 로텐부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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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로텐부르크는 지옥의 가마솥 한가운데 위치한 돌출부였다. 함부르크를 점령한 조약군은 지지부진한 진격과 갈수록 증원되는 미군에 머리가 아픈 상황이었다. 조약군은 전략기동부대인 작전기동군을 동원해 단숨에 네덜란드까지 진격해 미군 증원부대를 끊어내기 위해 돌출부인 로텐부르크가 신경쓰였다. NATO군은 수세에 처한 상황에서 돌출부로 남아있는 로텐부르크에서 조약군을 자극해 작전기동군의 기동을 유도하고 있었다. 일부가 정면에서 충돌하며 공격을 받아주면 그 사이 주력 기동부대가 측면으로 치고 들어가 작전기동군의 허리를 끊어야 했다. 그렇게 로텐부르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아니, 그렇게 설정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허술 설정들이다. 사실 그 시절 로텐부르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도시를 고른 것도 지도 위에서 고른 거였고 여기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도 않았다. 인터넷으로 기껏 찾아도 나오는 정보는 바이에른주의 로텐부르크고 자연스럽게 도시에 대한 묘사, 서술, 분위기도 진짜 로텐부르크가 아닌 바이에른의 로텐부르크처럼 꾸며졌다. 현실과 전혀 동떨어졌던 거다.


하지만 그 소설에서는 진지했다. 1990년 1월 4일 조약군과 NATO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2026년 1월 2일 나는 내가 쓰던 가상의 전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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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에서 로텐부르크로 가는 기차는 시작부터 험난했다. 기차표를 구하는 동안 주변에서는 난민들이 가득했고 새해 벽두를 노린 테러를 대비하는 경찰들이 많았다. 애써 기차표를 구한 뒤 플랫폼으로 내려갈 때도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렇게 내려간 중앙역도 막상 천장의 틈으로 눈 녹은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기차는 연착되었고 플랫폼도 바뀌어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가까스로 기차에 올라타 철로를 따라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새해 바로 다음날. 기차 안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동양인은 더더욱 없었다. 기차에서 내려다보는 하얀 풍경에는 높고 차갑게 생긴 나무들이 가득했다. 이곳은 북독일 평원. 우울하게 어둡고, 삭막하였다. 독일인들이 그래서 무뚝뚝하게 보이는 것이었을까? 57분 동안 기차를 타고 로텐부르크로 향하는 동안 주택은 점점 적어지고 나무가 늘어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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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로텐부르크역은 한산했다. 내리는 이들도 많지 않았고 이제 고작 4시를 지났는데 해가 어둑해지고 있었다. 에스토니아가 위도가 높아 유독 빨리 해가 지는거라 생각했는데 독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을 확인했다. 출발할 때도 강한 눈발 때문에 기차가 연착하고 플랫폼이 바뀌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기차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넉넉하게 2시간을 돌아다닐 걸 상정하고 6시 28분 기차를 타고 돌아오기로 하였다.


로텐부르크는 작은 동네다. 기차역에서 10분만 걸어가면 시청이 나오고 시청을 중심으로 뻗은 상점가를 구경하면 일단 핵심은 다 구경하는 셈이다. 인구도 23,000여 명으로 전북 무주군과 비슷하다. 습지와 강, 중근세 건물들로 유명한 동네. 아쉽게도 1월에다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보니 제대로 구경할 시간은 없지만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한다는 마음으로 돌아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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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첫 전투가 로텐부르크 북동쪽에서 벌어졌다. 1월 4일 새벽, 조약군의 선봉으로 선 소련군 16근위전차사단이 NATO 방어선을 정면으로 들이박는다. NATO군 방어선은 대규모 포병 지원 하에 유지되고 있었는데 조약군이 더 강력한 포병을 끌고 와 전선을 난타하자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NATO군은 5시간의 공방전 끝에 뒤로 밀려난다. 방어선을 돌파한 조약군은 작전기동군의 주력인 소련군은 로텐부르크로 진입시키지 않고 북쪽으로 우회시키고 도심으로는 2선 부대인 체코슬로바키아군과 폴란드군을 투입시킨다. 도심에 남아있는 NATO군은 소개 작전을 실시한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은 그 소개 작전이 벌어지던 곳이었다. 본격적인 도심으로 들어가기 전, 눈에 띄는 구조물이 있었다.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가운데 틈을 두고 높이 솟아 있었다. ‘도시로 가는 관문’이란 이름의 구조물은 로텐부르크역에서 로텐부르크 도심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만 같이 놓여있었다. 도심의 관문을 상징하며 금빛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주변의 어둑해지는 풍경과는 완전히 대조되면서. 나도 이 관문으로 들어가면 내가 쓰던 글의 선 너머로 넘어가는 것일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선을 넘고 문을 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몸에 맞춰야만 했다. 내가 갖춰야 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상태로 관문을 지나갔다.


관문 바로 뒤는 주택가였다. 주택가로 들어가기 직전부터 잠잠하던 눈발이 다시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고 주택가의 주택들은 불이 꺼진 채 조용하였다. 자동차들만 없다면 사람들이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강물 흐르는 소리, 자동차 엔진 소리, 눈을 밟는 소리. 소리만 가득했다. 분명 내가 잘 안다 생각했던 공간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공간. 무언가 차분했다. 소설 속에서는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시끄러운 곳이었는데. 차분함 속에 5분여를 걷자 시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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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소설에서는 이곳이 최후의 저항선처럼 묘사되었다. 방어선이 뚫리고 조약군이 몰려오자 NATO군은 차량과 쓰레기통을 모아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그 뒤에서 저항하였다. 도심의 NATO군은 대전차로켓과 저격총으로 조약군이 도심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항전하는 사이 구출부대가 헬리콥터를 타고 시청에 내린다. 지상에서도 전차부대가 시청에 도달해 최후의 부대를 데리고 철수를 시도한다. 그러나 조약군의 레이저유도폭탄이 시청에 명중하고, 무너져내리는 시청에 전차와 헬리콥터들이 매몰되며 로텐부르크의 NATO군은 수뇌부가 전멸한다.


실제 시청은 무너져내릴 것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시청 앞 광장도 넓지 않았다. 5-6층 높이에 외벽은 유리의 비중이 높았다. 상상 속에서는 고풍스러운 근대식 건물이었는데 실제로는 현대적인 시청이었다. 이미 다 퇴근하였는지 2층부터는 모든 불이 꺼져 있고 1층에도 사람은 없었다. 1층에 있는 관광안내소를 찾아갔지만 닫혀있어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다. 이곳까지 왔는데 기념품이라도 하나 사고 싶었는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4.95유로 하는 빨간 컵은 꽤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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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해가 지났지만 아직 도시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남아있었다. 시내에도 열려있는 가게는 거의 없었다. 옷가게나 서점 등은 닫혀있고 열려있는 건 식료품점과 스포츠용품점 등이 전부였다. 도심만 놓고 보면 굉장히 어색했다. 지금까지 들렸던 도시들은 그 크기에 상관없이 새해를 앞두고 있어 조금은 분위기가 띄워진 상태였고 사람들도 많았다면 로텐부르크는 차분하고 고요해서 이질적이었다.


이 차분한 분위기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분위기는 글 속에 들어온듯한 기분을 조금 고양시키기도 하다가 이내 눈발처럼 차갑고 이성적인 생각으로 가라앉게 하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항상 붕 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초점을 잡기 어려웠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그린 판도의 시작을 보고 싶었는데 정작 하나도 느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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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조금 더 걸어가자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젊은 남성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바로 앞에는 케밥 전문점이 있고 개천 위 다리에는 사랑의 키스를 나누는 지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곳은 동명의 로텐부르크처럼 낭만 가도 위에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곳을 찾는 이들에게 낭만을 선물하고 싶은 것일까.


‘낭만’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지식백과에서는 낭만을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라 표현한다. 현실과는 동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보면 로텐부르크에 온 나도 낭만의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대하고 있는 셈이다. 머릿속에서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제3차 세계대전의 파편들이 보이고 있으니까. 흐릿하게, 1989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엉터리 도심 시가전과 2026년의 현실 속 실제 도심 시가지를 겹쳐 보려고 한다. 당연히 말도 안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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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도시로 들어오는 금빛의 관문을 넘어설 때 자기 자신을 문에 맞춰야 하는지 생각한게 떠올랐다. 어쩌면 이곳으로 들어오는 순간 내가 갖춰야 하는 변화는 낭만적 시선이었던 것 아닐까? 지금까지는 지도 위의 점과 현실 사이의 이질적인 면에 의아함을 보였다면 조금 더 감상적으로 이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 맞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은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도시 중 하나겠지만 내 지도와 글 속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비현실적으로 시끄럽던 곳이었다. 나는 생각을 조금 달리하며 도시를 더 돌아보기로 했다. 비정상적인 눈으로, 낭만적인 눈으로.


시청에 집결한 NATO군이 궤멸한 후 조약군은 도심 장악에 나선다. 지대공미사일로 무장한 동독군이 도심 서쪽으로 철수하는 헬리콥터들을 저격하고 정찰대가 기갑부대가 고가도로에 진입하는 순간을 노려 도로를 폭파, 도로에 묶어놓은 뒤 Mi-24 공격헬기들이 나서 포위 섬멸한다. 일부 부대는 서독군 복장으로 위장한 채 서독군 사이로 숨어들어 사보타지를 가한다.


NATO군은 이들을 피해 남서쪽을 통해 탈출을 시도한다. 계속 북동쪽으로 향하던 나도 눈보라가 심해지자 방향을 돌려 남서쪽으로 향했다. 맥도날드로 가는 표지판을 보고 등을 돌렸다. 작은 도시라 생각했는데 맥도날드가 있다니, 생각보다 교통의 중심지였나 보다. 관광 안내판을 보니 이곳에는 많은 조각상들이 있는 것 같다. 도심은 보행자 전용 도로로 설정되어 있는지 차량 진입이 통제되어 있다. 이곳에서 낭만을 찾아 걸어다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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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앞에는 말 조각들이 있다. 겉옷만 남겨둔 채 자리를 비운 주인과 주인을 기다리는 말, 그 가족인듯 바로 옆에 서 있는 두 마리의 말. 여름에는 그 앞의 분수에서 물이 나온다고 한다. 겨울에 분수를 즐길 수는 없지만 이곳의 분수에서 물을 마시거나 만지는 사람들은 말을 만나러 온 주인이 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겉옷에 눈이 쌓이는 한겨울, 말들은 여전히 주인을 기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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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남서쪽으로 걸어가자 버거킹이 나왔다. 여기서 버거킹을 보다니. ‘월컨’의 트레일러 영상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버거킹에서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월드 인 컨플릭트가 나오던 시절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도 버거타운이라 불리는 가상의 버거킹 패러디 식당이 나온다. 만약 이곳에 버거킹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글을 쓸 때 버거킹을 거점으로 최후의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을까? 트레일러 영상 속 상황을 그대로 역전해서 보여주는 그림이었을 거 같다.


소설에서는 이곳을 따라 NATO군이 후퇴하고 후퇴를 돕기 위해 미 7군단과 1개 전투비행단이 동원되었다. 로텐부르크에 있는 부대는 최전선에서 오랫동안 항전하는 부대로 설정되었고 베테랑들이었다. 장비는 다시 만들 수 있어도 사람은 다시 만들 수 없기에 NATO군은 후퇴하는 부대 엄호에 최선이었을 거다. 그랬다면 이 버거킹은 후퇴하느냐 죽느냐를 가르는 터닝 포인트 지점일 것이다.


나는 버거킹에서 더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대신 다시 역으로 향했다. 본래는 이곳에서 2시간을 있을 계획이었지만 눈이 더 세차게 몰아치고 볼거리를 찾기도, 먹을 거리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문을 연 식당도 치킨너겟을 파는 푸드트럭 하나. 이곳까지 와서 현지 음식도 아닌 치킨너겟을 먹기는 그랬다. 차라리 조금 일찍 움직여서 함부르크로 돌아가는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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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53분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돌아왔다. 역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플랫폼과 대기실에 많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기차 시간이 이상했다. 4시 55분에 도착했어야 하는 함부르크행 기차가 33분째 연착 중이었던 것이다. 눈이 더욱 매섭게 내리고 있었다. 함부르크로 가는 기차도 5시 55분으로 바뀌어 있고, 그조차도 제시간에 올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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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맞으며 기다리는 시간. 플랫폼에서 몇 개의 팜플렛을 집어들었다. 로텐부르크 관광안내서는 독일어로 빼곡해서 제대로 읽기 어려웠지만 이곳을 여행하며 얻은 유일한 기념품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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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세차고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열차가 지연되는 시간만큼 더 많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아까까지 느꼈던 로텐부르크의 고요와 차분함과는 다른 세상이 느껴진다. 로텐부르크를 떠나려고 기다리는 동안 그 다음 전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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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텐부르크를 뚫은 작전기동군은 순식간에 후방으로 몰아친다. 20시간 만에 로텐부르크 서쪽에 위치한 브레머하펜, 올덴부르크가 무너지고 NATO군은 브레멘을 포기하고 후퇴한다. 작전기동군은 네덜란드 엔스헤데 근처까지 찌르고 들어가 150km가 넘는 거리를 진격한다. 20시간 만에 150km를 진격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 하지만 NATO도 계획이 있었다. 미 1보병사단, 캐나다 용기병연대, 서독군 11장갑척탄병사단 등이 작전기동군의 충격을 받아내며 기동방어를 하듯 작전기동군이 더 깊숙하게 들어가도록 유도한다. 전선을 지키던 NATO군은 절반이 증발하지만 조약군이 작전기동군 측면과 후방을 방어하기 위해 계속해서 병력을 분산시키는 틈을 노린다.


여기서 NATO가 반격을 개시한다. 브레멘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영국군 라인군단과 미 7군단 예하 8개 기갑사단이 작전기동군의 허리를 찌르기 시작한다. 작전기동군의 후방 제대와 보급,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미 해군항공대와 프랑스 해군항공대가 전폭적인 항공 지원으로 제공권을 장악하자 작전기동군이 위험에 빠진다. 조약군은 주력 1근위전차군을 돌려 NATO군 8개 기갑사단과 정면으로 충돌시키고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군으로 NATO 기갑부대의 측면을 노려 역으로 섬멸을 시도한다. 양측 전차 5천 대가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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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이 이 도시 근처 어딘가에서 충돌하겠거니 생각하는 사이 쏟아지는 눈 속에서 드디어 기차가 도착했다. 기차는 이미 사람들로 바글바글하고 그 위로 올라타는 사람들도 바글바글했다. 다들 기차가 지연되며 오랫동안 묶여있었던지라 피로하고 초조한 모습이었다. 나도 그러했다. 슬슬 데이터도 떨어지고 배터리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기차는 그대로 멈춰 있었고, 오히려 반대편 플랫폼에 다른 기차가 도착했다. 그 기차도 똑같이 함부르크로 가는 기차였다. 계속되는 지연으로 기차가 비슷하게 도착해버린 거다. 갑자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 못했는데 갑자기 승객의 절반이 일어나 짐을 챙겨 건너편으로 가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했다.


절반은 내렸고 절반은 남아있다. 두 기차 모두 멈춰있고 모두 함부르크로 향한다. 여기서는 결정을 해야 했다. 여기서 그대로 기다릴지, 아니면 방금 안내방송에서 중요한 발표가 있었던거라 가정하고 옆으로 옮기는 거였다. 긴 여행 동안 얻은 결론은 남들이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는게 속이 편하다는 거였다. 나도 기차에서 내려 옆 기차로 옮겨탔다.


옮겨탄 기차에서도 사람들은 뭔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바닥에 앉아있는 사람들, 짐을 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위기의 사람들. 이들도 모두 독일인은 아닐 것이리라. 나처럼 독일어를 모르지만 남들이 움직이니 똑같이 움직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도박이 맞았다. 내가 옮겨 탄 기차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찾아왔으며 눈보라가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기차를 타고 함부르크로 빨리 돌아가야 하는 나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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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사람으로 가득해 돌아가는 내내 서 있어야 하는 기차 속에서 그 전투를 곱씹어 보았다. 양측 합쳐 5천 대가 넘는 전차가 맞붙은 전투는 머릿속, 지도 속에서는 그야말로 장대한 전투였다. 그 어릴 적에는 읽었던 소설들이 ‘데프콘’, ‘3차대전’ 같은 작품이었기에 1개 사단이 사라지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심심하면 사단 몇 개가 사라지고 10만 명쯤 죽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1개 사단이 궤멸하는 건 현실에서도 엄청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와서 보니 이 넓고도 어둡고 추운 북독일 평원에서는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다시 읽어본 글에서는 1월 4일 밤 11시 32분부터 대규모 전차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전투는 다음날 아침 8시가 되어서야 끝난다. 이곳에서는 아침 8시에 해가 뜨지 않는다. 주야간 장치도 부족하고 제한되던 1989년과 1990년을 배경으로 하였는데 정말 잘 싸울 수 있었을까? 따뜻한 옷과 음식, 핫팩, 히터를 갖고 있는 2026년의 여행자도 쉽지 않은 계절에 강철덩어리에서 추위와 피로에 맞서면서? 실제로는 말도 안되지 않았을까.


그 말도 안되는 전투 후 NATO군은 ‘후퇴 대신 진격 중지와 상태 유지, 그리고 유사시 신속한 후퇴’를 지시하며 우회적으로 후퇴를 지시한다. 이를 위해 가용 가능한 모든 공군력을 동원해 조약군을 타격하고 가까스로 작전기동군의 진격을 네덜란드에서 저지시킨다. 하지만 전선의 서독군을 비롯한 조공 부대는 완파되었고 그 사이 독일 중부 에센에서 진행한 역공세가 실패한다. 로테르담의 항구로 수송선단을 밀어넣기 힘들어진다.


조약군은 NATO군을 밀어내며 로텐부르크와 그 배후 도시들을 모조리 밀어버리는데 성공하면서 네덜란드까지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네덜란드 방면이 크게 뚫려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등을 타격 범위로 넣어 NATO 보급로를 위협할 지점까지 닿았다. 그 사이 독일 남부 람슈타인 공군기지를 점령하는데더 성공한다. 그렇지만 NATO 기갑부대와 충돌한 1근위전차군이 격파당하고 500기가 넘는 항공기를 상실했다. 보급부대 피해도 극심해 다시 한 번 더 대규모 공세를 진행할 여력을 상실한다. 조약군은 공세가 아닌 수세 전환을 고려하고 핵무기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내가 썼던 글 속에서 가장 컸고 가장 장대했던 전투는 이렇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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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대한 전투는 실제 세상과 전혀 닮지 않았었다. 로텐부르크에서 본 건 내가 쓴 글이 얼마나 현실과 떨어져 있는지를 제대로 알려주는 ‘진실’이었다. 15년도 전에 썼던 글은 그 당시 즐겼던 소설과 게임, 영화의 파편들을 닮았고 군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묘사만으로 가득했다.


주인공들도 그러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지능은 작가의 지능보다 뛰어날 수 없다.’ 이 출처 불명의 격언은 오늘날 모든 창작계를 관통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백번 공감하고 이해하는 표현이다. 위의 내용을 서술하며 생각해보니, 그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머리가 뛰어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미 결론을 생각하고 시작했고, 모티브로 삼은 작품들이 많다보니 그들의 흐름을 따라가기만 했기 때문이다.


직접 판단하며 싸우는 이들이 아니라 합을 맞춰 싸우는 존재들. 인터넷도 제대로 보기 힘들고 지리부도와 지도 위에서 판도를 논하던 아마추어가 만들어낸 아마추어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내가 굳이 긴 시간 동안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동안 이곳을 시간내서 올 이유는 하나도 없는 곳이다. 오히려 아우슈비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 등이 훨씬 의미있는 곳들이고 함부르크에서도 다른 좋은 곳들을 찾아도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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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곳에서 낭만의 눈으로 보았을 때, 글 속에서, 선 위에서 이들은 나름대로 처절하게 싸웠다. 나만의 판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엎치락 뒷치락하던 가상의 존재들은 전혀 현실과 닮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닮아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흉내를 내고 있었다. 수십 개의 국적과 수백 개의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들은 내가 보여주고 싶던 판도 위에서 그들의 예견된 운명을 놓고 제3차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어야 했다. 정작 그 글을 쓰던 나는 그 세계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다시 보면 기본적인 ‘다나까’도 쓰지 않고 서로 국적이 다른데 말이 통한다던지, 심심하면 1개 사단이 전멸하고 밤에도 야간투시경 없이 백발백중으로 맞추고 있었다. 그저 숫자와 단위, 데이터만 알 뿐 현실은 하나도 모르기에 나온 비현실적인 전투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 판도 위에서 열심히 싸웠다. 글을 쓴 나는 이제 와 그 허술함을 자조하지만, 그 안의 인물들만큼은 저마다 최선을 다해 바보 같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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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또다른 형태의 선을 긋는 행위다. 다른 점이라면 지금까지는 타인이 짜놓은 판도와 스크립트 위에서 나만의 판도를 그어가며 만들어야 했다면 여행을 하면 그 선들을 넘어 직접 다른 선을 긋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로텐부르크에서 본 건 내가 전혀 상상도 못한 지도 위 판도를 실제로 마주하는 첫 순간이었다. 그건 생각 이상으로 조용하고 어두워 쌀쌀한 현실을 보여주며 과거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곳은 낭만의 눈으로 현실을 느끼고 내가 만든 세상을 조금 더 헌신적으로 보게 만들어줬다. 내가 그린 선은 현실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그려진 선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될 것이다. 이곳 독일은 실제 지도와 땅 위에서 진짜 지옥이 펼쳐졌던 곳이다. 지도와 글 속에서 치열한 것은 그보다 훨씬 나은 걸지 모르겠다.


그곳을 마주하기 위해 다음날 나는 나치 독일과 동독의 심장이자 서독의 외로운 섬, 서방의 급소던 베를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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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