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b0d121e0c176b660b8f68b12d21a1d2fff51


제1차세계대전이 참전국들의 집단 기억에 자리잡고 있다. 19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세대는 어린 시절에 대전쟁에 참전한 친족과 교류할 수 있었기에, 이것은 감정적인 기억이다. 전쟁이 일어난 원인의 허무함과 엄청난 사상자 때문에 대전쟁은 지금도 국가적 비극으로 기억되고 있다. 주인공들이 지속적인 평화를 이룩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 이런 감정을 강하게 만든다. 


수십년 동안 군인이 신간 출판물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었기 때문에 사건 그 자체는 소홀히 취급되어, 지금은 사실상 논의되지 않게 되었다. 그 출판물들은 감내할 수 없는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숭고한 자기희생을 보여준 이들에게 전쟁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조명한다. 


이것은 어느 국가에서나 동일한 현상이나, 제1차세계대전을 떠올리는 방식엔 각자 차이가 있다. 전쟁의 다섯 주요 교전국이 군사적 측면을 바라보는 시야엔 뚜렷한 비대칭성이 있다. 프랑스에선 베르됭 전투를 전쟁의 핵심 전투로 간주한다. 영국에선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솜 전투가 그 어떤 사건보다도 영국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러시아에선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라는 대사건으로 인해 복잡한 관점을 취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승자의 기억과 패자의 기억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 독일에선 제1차세계대전을 전쟁의 참상이라는 관념적인 비판과 연관된 순수 역사적인 기록으로만 간주하며 먼 과거로 여길 뿐이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상반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위대한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헝가리인들에겐 트리아농이라는 단어가 대전쟁에 대한 기억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국가마다의 서사가 이러한 강력한 굴성에 영향을 받아 대전쟁에 대한 파편적이고 편향된 인식이 형성되는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 예를 들어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발생한 서부전선은 1차대전의 가장 큰 작전전역으로 부당하게 간주되고 있다. 1917년 말까지 이어진 독일과 러시아의 전투는 매우 치명적이었다. 거기서 같은 시간 동안의 서부전선에서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러시아군에게 포로로 잡힌 군인의 숫자가 프랑스군과 영국군에게 항복한 독일 병사보다 많다.


각 작전전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대부분의 저자가 각 전투를 별개로 취급하는 폐쇄적인 접근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자들은 자기가 속한 국가에서 일어난 사건에만 집중하고, 자기가 속한 국가에서 보유한 기록에만 의존한다. 이들이 드물게 사용하는 외국 자료는 주요 정치인, 군인의 회고록과 일기 뿐이며, 그마저도 자기네 언어로 번역된 적 있는 것들 뿐이다.


회고록과 일기는 기독교 성인전식 편향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잘못된 정보 서술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고, 전쟁의 주요 국면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고 있다. 


영국, 더 넓게는 영어권 국가들에서 제1차세계대전 100주년은 대전쟁 군사사의 근간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록보관소, 언론, 지도, 일기, 서신, 공적 보고서 등 1차 사료의 상당한 확충을 바탕으로, 약 100여 편의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한 수많은 학술 저작들이 출간되었다. 이들 국가에서 전쟁사는 역사학 과정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기에,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프랑스에선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100주년에서 추모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군사 작전을 전문적으로 다룬 포괄적인 저작을 발표한 저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 극소수의 저자는 자신의 연구 주제를 진전시키기 위해 기초적인 조사부터 스스로 해야 했기에 그 공로가 매우 크다. 사실, 프랑스 학계는 제1차세계대전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군의 바슈 장군이 지적했듯이, 프랑스 역사학계는 수만 권의 단행본으로 구성된 기존의 방대한 문헌 목록이 개선될 여지 없는 방대한 체계를 구축했다고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저작들의 대부분이 역사적 가치가 없는 기독교 성인전이며, 전문가들에게 꾸준히 비판을 받고 있다.


프랑스엔 대전쟁과 관련된 세계 최대 규모의 기록보관소가 있다. 종전 직후부터 프랑스군 군사사편찬부가 20년 넘게 공들여 수집한 당시의 문헌만 수천만 개에 달한다. 하지만 프랑스 학자들은 그동안 이 귀중한 자료를 방치했다. 엘리자베스 그린할프가 말했듯이, 영국 학자들도 이 기록보관소를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이 사료들은 그들의 대학에서 이루어진 훌륭한 연구 성과를 더욱 풍성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줄 핵심적인 토대임에도 말이다. 


그러나 최근 세 가지 요인이 대전쟁을 인식하는 학계의 방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첫째, 프랑스 당국이 100주년을 기념하여 1차 사료 디지털 아카이브화에 상당한 자원을 투입해 당시 군사작전과 관련된 문서의 대부분을 디지털화 하는 데 성공했다. 디지털로 변형된 이 자료들은 모든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고, 지금까지 사용되어 온 출처들을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이 과학적 엄밀함을 증대시켰다. 종이를 다루던 과거에는 시간과 노력의 제약 때문에 조사 대상을 미리 한정시켜야만 했으나, 디지털 세상에서는 그럴 필요가 적다. 여러 정보에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출처의 역사적 가치를 검토하고 편향성을 제거하기 위한 교차검증과 데이터 대조 분석이 가능해졌다.


언론 매체 또한 이러한 혁명을 촉진했다. 1914~18년 당시의 주요 일간지 및 주간지들은(영어든 타 언어든)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필수적인 데이터를 담고 있다. 그동안 학자들은 기사 목록화나 색인이 존재하지 않아 특정 자료를 찾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합당한 이유로 이 자료들을 외면해 왔다. 하지만 이제 당시의 신문들이 디지털화 되었으므로, 간단한 키워드 검색만으로 어떤 정보든 즉각적이고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언어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장벽이 아니다. 특히 프랑스 사료를 다루는 영어권 연구자들에게 더욱 그렇다. 인공지능의 기계번역 덕분에 어떤 언어로 쓰인 문서든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2021년에 출판된 1916 la bataille des cinq empires 서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