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8월 1일에 시위혼성여단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가 봉기를 일으켜 남대문 전투를 치렀다.
서울에 주둔한 부대들은 일찌감치 통제를 당하고 있어서 탄약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그래서 병영 내에서 농성하던 2개 대대는 공병과 포병(당시엔 기관총도 포병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의 화력에 밀려 무너졌고 병영 밖으로 도피할 때 대거 사상자를 냈다.
지방의 부대인 진위 대대들도 순차적으로 해산 예정이었다. 군부에서는 서울로 대대장들을 불러들여 해산 명령을 하달했다.
군축 때문에 진위보병 5대대(원주진위대)의 규모는 2개 중대 250명 수준이었다. 아래에 소대급인 여주 분견소가 있었다.
선임 중대장인 정위(대위) 김덕제와 대대당 1명만 있는 특무정교(원사) 민긍호는 대대장인 홍유형이 서울로 간 사이에 봉기를 준비했다.
1907년 8월 5일, 부대 내에 취사시설이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부대 폐쇄를 앞두고 식당을 닫았는지 진위 5대대의 장병들은 민가에 나가서 점심을 먹었다.
봉기군은 이 어수선함을 이용해 점심 먹고 돌아오는 길에 무기고를 공격해 탄약 2만 5천 발 이상을 확보했다.
봉기군에 협력하는 민간인들에게 총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에 반대하는 장교 6명은 구금되었고, 이동 중에 탈출하여 서울로 가서 자수했다. 이들은 부하들을 통제하지 못한 지휘권 문제로 징계를 받았다. 구금된 모두가 무사히 탈출한 걸 보면 사실 탈출한 게 아니라 석방됐을 가능성도 있다.
봉기의 성공으로 여주분견소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원주 본대로 합류하였다.
민긍호와 김덕제는 부대를 둘로 나눴다. 민긍호는 경기도 동부와 충청도 동부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고, 김덕제는 강원도 동부에서 함경도로 북상하여 활동했다.
민긍호는 일본군과의 교전으로 1908년에 전사했고, 김덕제는 국내에서 의병 세력이 소멸하자 연해주로 건너갔다. 1920년까지 일본의 감시대상이었는데 그 뒤로는 소식이 끊긴다.
강화진위대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원래 진위 1연대 1대대로 800명 규모였던 강화진위대는 조선 시대부터 수도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래서 조선군에서 정예 병력으로 보았고 친군 심영 시절에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는 병력으로 서울의 친군 장위영과 파병되기도 했다.
근데 농민군을 얕봤는지 친군 심영은 농민군에게 황룡촌 전투에서 1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그래서 농민군에게 반감이 커서 전주성 전투 후에 패주하는 농민군을 추격 섬멸할 것을 요구했으나, 선임 부대인 친군 장위영이 농민군과 협상을 위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랬던 강화도의 군 부대는 1905년 군축 이후 수원진위대에 속한 소대급 분견소로 축소되어 있었다.
강화진위대의 마지막 대대장이었던 이동휘는 군축 이후 무보직 상태로 있었다.
1907년 8월 9일, 이동휘와 지홍윤, 유명규(둘은 민간인이지만 관료 출신이다)가 부대로 들어와서 봉기를 주장하여 사병들이 호응하였다.
무기고를 열고 무장했는데, 당시 분견소의 장교는 2명이다. 중위와 소위급인 부위와 참위 1명씩이었다.
이들은 초급 위관이어서 당시 무보직이지만 참령 계급을 갖고 있는 이동휘에게 저항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50명의 장병과 500명 정도의 민간인이 봉기에 협력했다.
일본군이 와서 강화도에 상륙하자 이들은 바다를 건너 황해도 해주로 넘어가 정미의병에 가담했다.
일본은 장교단의 돌출을 막기 위해서인지 군축 이후에 장교들을 무보직 상태로 그냥 두고 재교육 목적으로 육군연성학교에 배치했는데
1907년 9월에 싹 다 제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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