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세기 동안 유럽 보병의 주류 냉병기로 자리잡은 파이크는 어디서 기원했는가?







Der lange Spiefs ist keine schweizerische Erfindung. Er entstammt den Ebenen Italiens. Dort hatten ihn schweizer Reisläufer im Dienste der Welschen getragen. In einer Zeit, in der in der Schweiz noch die Helmbarte die allgemein übliche Kriegswaffe war, tritt uns in Italien der Spiefs entgegen und um 1327 war es den Bürgern Turins befohlen, Spielse von 18' zu führen.

긴 창(Spieß)은 스위스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평야에서 유래했다. 스위스 용병들이 이탈리아인(‘Welsche’)의 군대에서 복무할 때 그 무기를 사용했다. 스위스에서 아직도 일반적인 전투 무기로 할버드(Helmbart)가 쓰이던 시기에,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장창(Spieß)이 등장했다. 그리고 1327년경에는 토리노 시민들에게 길이 18피트의 창을 소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 Müller-Hickler, Hans: Studien über den langen Spieß (1906)



Unde en jewelik lantman in de zulven Vylande schal hebben to ewigen tyden ene troyen, enen yseren hud, en par wapenhanschen, enen schilt, ene worpbarden unde enen peck van zesteyn voten unde kortere nicht, by broke ener mark, unde dat schal en jewelik holden in den hilghen, dat id zin zy, wil men ene des nicht vorlaten, unde dat schal men holden de gogreven unde de sworen an jeghenwardicheyt twyger domheren to Bremen unde des rades in den Borchwalle schowen, alze dicke alze wy en dat affeschende zint.

(1390년 11월 25일)

이 같은 브레멘 주변의 농촌 지역(Vyland)의 모든 농민은 항상 트로옌(두툼한 보호용 외투), 철제 투구, 한 쌍의 건틀릿(무장 장갑), 방패, 투척용 도끼, 그리고 16피트 이상 되는 창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를 갖추지 않을 경우 1마르크의 벌금을 물게 된다. 또한 이는 브레멘의 두 성직자(Domheren)와 성벽 내 시의회(Borchwalle)의 감독 하에 지역 행정관과 선서자들이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할 사항이다. - Bremisches Urkundenbuch / im Auftr. des Senats der Freien Hansestadt Bremen hrsg. von D. R. Ehmck und W. v. Bippen, Bd. 4 (1886) [Urkunden von 1381 - 1410] p161



Sempre nello stesso anno, Gian Galeazzo ordinò al podestà e al capitano di Pavia di raggruppare 300 lance ferrate, lunghe almeno 10 piedi milanesi o più (circa 4,35 m) e di inviarle a Lodi, dove le sue forze si stavano confrontando con quelle dei fiorentini e dei loro alleati guidate da John Hawkwood.
같은 해(1397), 잔 갈레아초는 파비아(Pavia)의 포데스타(시 행정관)와 군사 지휘관에게 최소 밀라노 척도로 10 피에데 (약 4.35 m) 이상의 철제 창(lance ferrate) 300자루를 모아, 로디(Lodi)로 보내도록 명령했는데, 그곳에서 그의 군대는 피렌체군과 그 동맹군, 그리고 존 호크우드(John Hawkwood)가 이끄는 부대와 맞서고 있었다. - Balestrieri, pavesari e lance lunghe: la tripartizione funzionale delle cernite di Gian Galeazzo Visconti del 1397









모든 기록을 파악하진 못했으나 1906년 논문에 의하면 파이크의 기원은 북이탈리아이며 14세기 초반인 1327년경 토리노에서는 18피트 길이의 창을 소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 외에 기록으로는 1390년 북독일 지역인 브레멘의 법령에서 16피트 길이의 창을 소지하라는 기록이 있다

1397년, 초대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약 4.35 m 길이의 장창을 보내라는 명령을 남겼다.









Pierpont Morgan Library New York, Maciejowski Bible, MS M.638, fol. 10r








Pike라는 용어 자체로는 13세기 말 네덜란드 등의 법령이나 기록에서 존재하나 그것이 12 피트 (약 3.6 m) 이상의 장창을 의미하는지는 아니면 송곳 형태의 무기를 의미하는 것인지 확인된 바 없기 때문에 본 글에서 길이가 명확히 확인된 바로는 14세기 북이탈리아 지역이 최초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파이크나 장창이라고 인식할만한 용어의 사용이나 기록을 보면 대략적으로 북이탈리아 및 저지대 도시가 시작임을 추측할 수가 있다.











Niccolò Mauruzi da Tolentino at the Battle of San Romano (probably c. 1438–1440)








Up until the time of the Battle of Arbedo, the main weapon of the Swiss was the halberd. After their defeat, they developed a new tactic, protecting their halberdiers with a cordon of pikemen.

아르베도 전투(1422)까지 스위스군의 주된 무기는 할버드였다. 그들의 패배 이후, 스위스군은 파이크병으로 방어선을 구성하여 할버드 병사를 보호하는 새로운 전술을 발전시켰다.


Erich Anderson, 'The Battle of Arbedo: The rise of the Swiss pike", Medieval Warfare, Vol. 2, No. 3, IN THIS ISSUE: The revival of infantry tactics in the Late Middle Ages (2012), pp. 21-26




The Swiss adopted the pike as a weap-on during the fifteenth century and perfected its use to the point that they were able to defeat the Holy Roman Empire and its landsknechts in the Swabian War of 1499.

스위스인들은 15세기에 파이크를 채택하여 그 사용법을 완벽하게 숙달해, 1499년 슈바벤 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그 란츠크네히트들을 패배시킬 수 있었다.


Olivier Bangerter, "The Swiss pike: The weapon, tactics and countermeasures", Medieval Warfare, Vol. 5, No. 1, Theme - Traitors in the Middle Ages (2015), pp. 44-48







통념상 파이크 진형의 원조로 평가되는 스위스는 기록으로 따지면 파이크를 뒤늦게 도입한 후발주자에 가깝다.


1422년 아르베도 전투 이전까지 스위스군은 할버드 위주의 군대였으며, 전투 당시 밀라노 기병들이 하마하여 할버드보다 긴 랜스로 진형을 짜서 스위스군의 돌격을 패퇴시키고 항복 직전까지 몰아가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후로 파이크를 도입하는 법령을 내렸다.










Douglas Miller, The Swiss at War 1300-1500 (Men-at-Arms 094), Osprey Publishing









1443년 취리히의 장부에 따르면 파이크는 대략 20% 정도로 20년 만에 비율이 매우 늘어나긴 했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특별하다고 할 비율은 아니었다.


파이크는 휴대하기 매우 불편하며 (졸르투른 무기고에 의하면 16세기 스위스 파이크 유물의 길이는 4.15-5.07 m, 무게는 2.18-3.14 kg에 이른다.), 그 불편함으로 인해 용병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인 약탈을 방해했다.


1512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스위스 지휘관들은 부대 안의 할버드가 너무 많아, 밀라노 동맹군에게 파이크를 지원해달라 요청해야 했다.


이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파이크를 자르거나 버리려고 했으며, 1515년에도 스위스의 각 주 정부는 파이크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파이크를 잃어버린 자에 대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스위스군 내에서 파이크의 비율은 1500년 쯤에 절반, 1525년 파비아 전투에 이르면 2/3 정도가 파이크병이었다.(Olivier Bangerter, "The Swiss pike: The weapon, tactics and countermeasures")








그러나, 그들은 그 이전까지 기병에 무력하지 않았다.













Burgkmair Hohenzollern Sigmaringen MS 03





The Swiss demonstrated early in their history that a halberd used in formation was enough to prevent knights from breaking the ranks of a solid infantry line. This was the case at Laupen in 1336, where the Bernese and their Swiss allies faced the local knights with success. It was the case again in 1422 at Arbedo. The Milanese author Andreas de Bellis was struck by the fact that these 'barbarians' were not afraid of the cavalry charges they had to face. They simply attacked the horses with their swords and halberds and then killed the dismounted knights (quoted in: Wilhelm Oechsli, Quellenbuch zur Schweizergeschichte, p. 143). Only when the Milanese leader Carmagnola ordered his men to dismount and use their lances as pikes did he manage to secure a victory. The same had almost happened at Sempach in 1386, where the Duke of Habsburg led his dismounted knights against the Swiss, only to be defeated when the latter managed to create a breach in his formation.


스위스인들은 그들의 역사 초기부터, 진형을 이루어 사용될 경우 할버드만으로도 기사들이 강력한 보병 전열을 돌파하는 것을 막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했다.1336년 라우펜 전투에서 베른과 스위스 동맹군이 지역 기사들을 상대로 성공을 거둔 것이 그 예였다. 1422년 아르베도 전투에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밀라노 출신 작가 안드레아스 데 벨리스는 이 '야만인'들이 자신들이 맞닥뜨린 기병대 돌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단순히 검과 할버드로 말을 공격한 후, 말에서 내린 기사들을 죽였다 (인용: Wilhelm Oechsli, Quellenbuch zur Schweizergeschichte, p. 143). 밀라노 지휘관 카르마뇰라가 부하들에게 말에서 내려 창을 파이크처럼 사용하라고 명령했을 때야 비로소 승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 일어날 뻔했는데, 합스부르크 공작이 말에서 내린 기사들을 이끌고 스위스군을 공격했지만, 스위스군이 그의 진형에 균열을 만들어 내며 결국 패배했다.


Olivier Bangerter, "The Swiss pike: The weapon, tactics and countermeasures", Medieval Warfare, Vol. 5, No. 1, Theme - Traitors in the Middle Ages (2015), pp. 44-48








오히려 기사들의 돌격과 고정되지 않는 신체의 마상전투는 질량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일 경우, 할버드와 검을 들고 발을 땅에 딛고, 튼튼하게 몸을 지지하며, 자유롭게 움직이는 스위스군의 난전에 취약했으며, 이는 1336년 라우펜 전투부터 1422년 아르베도 전투까지 거의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달라지지 않았다.


적군의 대응책은 결국 난전에 강한 스위스군을 상대로, 말에서 내려 그들의 할버드보다 더 긴 랜스로 난전에서 밀어내는 것이었다.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성공할 뻔했으며, 1422년 아르베도 전투에서 결국 스위스군을 몰아냈고, 궤멸시키기 직전에 이르렀으나 소수의 보급대를 증원부대로 착각하여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The French soldier Blaise de Montluc, who encountered the Swiss on numerous occasions, commented on the Swiss preference for gripping the pike rather forward, allowing greater motion control, unlike the German Landsknechts, who tended to hold their pikes at the far end: "But you must take your Pikes by the middle as the Swisse do, and run head-long to force and penetrate into the midst of them, and you shall see how con-founded they will be." (Blaise de Montluc, Commentaries 1.88)


프랑스 군인 블레즈 드 몽뤽(Blaise de Montluc, 1502-1577)은 여러 차례 스위스군과 맞닥뜨린 경험이 있었는데, 그는 스위스 병사들이 독일의 란츠크네흐트(Landsknechts)들과 달리 창(pike)을 잡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스위스 병사들은 창을 좀 더 앞쪽에서 잡아 더 큰 움직임의 통제력을 얻었으며, 반면 란츠크네흐트들은 창의 끝부분을 잡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스위스인들처럼 창의 가운데를 잡고, 머리를 들이밀며 돌격하여 그들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얼마나 혼란에 빠지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블레즈 드 몽뤽, 『회고록(Commentaries)』 1.88)


Erich Anderson, "The Battle of Arbedo: The rise of the Swiss pike", Medieval Warfare, Vol. 2, No. 3, IN THIS ISSUE: The revival of infantry tactics in the Late Middle Ages (2012), pp. 21-26








뿐만 아니라 그들은 파이크를 단순히 기병 대응용이 아닌 적을 밀어내고 기존의 할버드보다 먼 거리에서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난전에서 활용했다.


파이크는 단순히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서만 도입된 것이 아니었으며, 기병 대응에 도움이 될지언정 그것이 전부거나 대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결국 기병 vs 보병의 대결 구도와 통념이 파이크의 역할을 가둬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