兩戰聯軍
연합군과의 두 차례 전투 (兩戰聯軍)
晩淸朝政腐敗,畏洋如虎,企圖用割地賠款的辦法,換取片刻的苟安,有敢愛國言戰者,則皆在不赦,結果却導致了八國聯軍進逼國門。父親經常痛心疾首地對我們說:「我國地大物博,人口衆多,其所以淪爲弱國,並非軍不效命,民不愛國,只因淸朝腐敗,鼠目寸光,只圖安逸,不修武事,自壞干城,開門揖盜。」父親說,所謂八國聯軍,名爲八國,但實際兵力不過3萬多人,且是一夥來華探險「掘金」的烏合之衆。不義之師,更做非人之事,是以聯軍士氣低沉,兵不戀戰。其所以能長驅直入,直搗京畿,主要原因是淸廷不修武事。父親提到此處,甚是痛心。他常向我們講的,一是慈禧太后挪用海軍專款修建頤和園,一是天津大沽砲臺的失守。父親說,大沽砲臺共分南北二臺,互爲犄角,修建數年,所費不貲。臺上裝有數十生地海防大砲數十門,火力强勁。所惜者,淸廷海軍當時喪失殆盡,漫長海岸,無法防守,大沽砲臺是被敵人前後夾擊,圍困多日,守臺軍民浴血奮戰,終因彈盡援絶,戰至臺毁人亡,始告失守的。父親常說,當時愛國軍民莫不咬牙切齒,決心與洋人一決雌雄,所可惜者,當權者懼洋怕事,對反洋義民非但不敢組織領導,反加鎭壓,對請戰軍隊三令五申,不准亂動。父親說,淸廷執迷不悟,仍信大刀長矛,軍隊裝備可以說落後到了莫可言宣的程度,除我所在的馬玉崑部的騎兵裝備尙好外,大多數淸兵仍以刀槍爲主,最新武器也不過是進口的洋裝火槍,稱爲洋槍隊,焉能對付聯軍的快槍快砲?但就在武器條件極端懸殊的情況下,愛國軍民以血肉之軀,敵先進的武器,軍民同心,各盡其能,如破壞鐵路橋樑,對聯軍明截暗襲,使其不能順利進軍。父親這時隨馬玉崑駐紮通州,淸廷聽到大沽失守,天津告急,洋兵馬上就要近逼京畿,這才大驚失色,急調馬玉崑率部迎阻聯軍,保衛京畿。
청나라 말기 조정의 정치가 부패하여 서양인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했고, 땅을 떼어주고 배상금을 무는 방법으로 잠시 동안의 구차한 평안을 얻고자 했다. 감히 애국을 말하며 전쟁을 주장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것으로 여겼고, 그 결과 도리어 8개국 연합군(八國聯軍)이 국문 앞까지 바짝 다가오는 상황을 초래했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자주 비통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나라는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며 인구가 많음에도 약소국으로 전락한 까닭은, 결코 군대가 목숨을 바치지 않고 백성이 애국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단지 청나라 조정이 부패하여 쥐처럼 눈앞의 이익만 보고 오직 안일함만 도모하며 무사(武事)를 닦지 않아, 스스로 나라를 지키는 방패를 허물고 문을 열어 도둑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이른바 8개국 연합군이라는 것은 이름만 8국(八國)일 뿐, 실제 병력은 3만여 명에 불과했고 게다가 중국에 와서 탐험하며 금을 캐려는(「掘金」) 오합지졸 무리(烏合之衆)였다고 한다. 불의한 군대인데다가 사람이 할 짓이 아닌 일까지 저지르니, 이 때문에 연합군의 사기는 침체되었고 병사들은 전투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거침없이 진격하여 곧장 경기(京畿) 지역까지 쳐들어올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은 청나라 조정이 무사(武事)를 닦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실 때면 매우 마음 아파하셨다.
그가 자주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첫째는 서태후(慈禧太后)가 해군 전용 자금을 유용하여 이화원(頤和園)을 건축한 것이고,
둘째는 천진(天津) 대고포대(大沽砲臺)의 함락(失守)이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대고포대는 남북 두 개의 포대로 나뉘어 서로 기각지세(犄角, 앞뒤로 막음)를 이루었으며, 수년에 걸쳐 지어져 들어간 비용이 막대했다. 포대 위에는 수십 센티미터(生地) 해안포(海防大砲) 수십 문이 장착되어 있어 화력이 막강했다. 안타까운 것은 청나라 해군이 당시 거의 궤멸되어 기나긴 해안선을 방어할 방법이 없었으며, 대고포대는 적에게 전후방에서 협공당해 여러 날 포위되었고, 포대를 지키던 군민이 피투성이가 되어 분전했으나 결국 탄약이 떨어지고 지원이 끊겨 포대가 파괴되고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운 끝에야 비로소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당시 애국 군민들이 이를 갈지 않는 이가 없었고 서양인들과 승패를 겨루고자 결심했으나, 안타깝게도 권력을 쥔 자들이 서양인과 사건을 두려워하여 반양의민(反洋義民)을 감히 조직하고 이끌기는커녕 도리어 진압을 가했고, 전투를 청하는 군대에게는 거듭 명령을 내려(三令五申)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청나라 조정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큰 칼(大刀)와 긴 창(長矛)을 믿었으며, 군대의 장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었다. 내가 속해 있던 마옥곤(馬玉崑) 부대의 기병 장비가 그나마 나은 것을 제외하면, 대다수 청나라 병사들은 여전히 칼과 창을 위주로 삼았고, 최신 무기라고 해봐야 수입한 서양제 화창(洋裝火槍)에 불과하여 양창대(洋槍隊)라 불렸으니 어찌 연합군의 빠른 총과 빠른 포(快槍快砲)에 맞설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이토록 무기 조건이 극단적으로 차이 나는 상황 속에서도, 애국 군민들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으로 선진 무기에 맞섰고, 군민이 한마음으로 각자의 능력을 다하여, 철도와 교량을 파괴하고 연합군을 상대로 드러내놓고 차단하거나 몰래 기습하여 그들이 순조롭게 진군하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이때 마옥곤을 따라 통주(通州)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청나라 조정은 대고포대가 함락되고 천진이 위급하며 서양 병사들이 곧 경기를 바짝 위협할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크게 놀라 얼굴빛이 질렸고, 급히 마옥곤에게 부대를 이끌고 연합군을 맞아 저지하여 경기(京畿)를 보위하라고 지시했다.
聯軍兵分數路,直指北京,雖經沿途軍民協力奮戰,終因武器相差甚大,難以戰勝。馬玉崑所率鐵騎,首先與登陸英國皇家步兵第七和第十一兩個聯隊遭遇於楊柳靑附近的三賢廟。洋兵初到中國,人地生疏,如盲人騎瞎馬,但是中國人的個別天主教徒和基督教徒,當時人稱二毛子者,甘爲漢奸,願作諜報,馬部行動早被二毛子報知聯軍,英兵便停止前進,布陣以待,意欲一擧消滅馬部。馬玉崑派出的搜索部隊,也探知對方情況。據父親對我們說,當時聯軍武器雖然優越,可是比起現在仍相差甚遠,英皇家步兵兩個聯隊,除士兵皆有英式短步槍外,只配備水壓重機槍八挺,並擁有十生地以下小口徑砲兩門,編制是步砲混合,戰術也十分可笑。英軍估計馬部迎戰定是採取全隊出擊,中央突破,所以他們便想用集中火力,一擧全殲的辦法。那時尙沒有壕溝戰術,英軍布陣一律採用三路橫隊,前排臥射,中排跪射,後排立射,砲兵根本不設陣地,機槍威力也不很大,因爲子彈帶的彈距甚寬,半天一響,主要還是靠大砲與排子槍。馬玉崑洞察此情況,深知漢奸諜報隨時通風,就故弄玄虛,迷惑敵人。他令各級將領及大批騎兵在大營前面集合,作戰前訓示。馬本人頭戴紅頂花翎,身穿黃馬褂,騎黑色戰馬,後面高擧大紅傘蓋,慷慨激昂,勉勵部屬。馬講話冗長無章,東拉西扯,先說英國這光景只有三箇小島,只會販賣大煙,不幹好事,英法聯軍那光景就來北京發了橫財,林則徐算是恨透他們了。這次來中國,又想發財,我們必須用趙子龍在長坂坡大戰曹操的威風,殺它箇七進七出。馬講話滔滔不絶,占時甚久。而在此同時,按照他的事先部署,父親率所部騎兵分作兩路,偃旗息鼓,從敵軍左右繞過警戒線,迂廻其後,突然攻其不備。敵兵正用望遠鏡注視前方,以爲馬部騎兵整裝待發,萬沒想到鐵騎已飛至。父親身先士卒,衝入敵陣,振臂高呼:「弟兄們,跟我來殺洋人啊!」士兵早已仇恨在心,誰願後人?一陣白刃掩殺,敵人不戰自亂,奪路爭逃,互相踐踏,死傷慘重。打掃戰場時,粗計這一戰鬪殺死殺傷英軍共500餘人,生俘1000餘人,繳獲「哈巴狗子砲」(卽重機槍)三挺,火砲一門,英製短步槍多支。
연합군 병력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곧장 북경을 향했고, 도중에 군민이 협력하여 분전했으나 무기 격차가 너무 커서 결국 승리하기 어려웠다.
마옥곤이 이끄는 철기(鐵騎, 정예기병)는 가장 먼저 상륙한 영국 왕립 보병 제7, 제11 두 개 연대와 양류청(楊柳靑) 근처의 삼현묘(三賢廟)에서 조우했다. 서양 병사들은 중국에 처음 와서 사람과 지리에 생소하여 마치 장님이 눈먼 말을 탄 것과 같았으나, 중국인 중 일부 천주교도와 기독교도, 당시 이모자(二毛子)라고 불리던 자들이 기꺼이 매국노(漢奸)가 되어 첩보를 자처했기에 마옥곤 부대의 행동은 일찍이 이모자들에 의해 연합군에 보고되었다.
이에 영국 병사들은 전진을 멈추고 진을 쳐(布陣) 대기하며 마옥곤의 부대를 일거에 섬멸하려고 했다. 마옥곤이 파견한 수색 부대 역시 상대방의 상황을 탐지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에 따르면, 당시 연합군의 무기가 비록 우월하긴 했으나 현재에 비하면 여전히 매우 차이가 났다고 한다.
영국 왕립 보병 2개 연대는 병사들이 모두 영국식 짧은 보총(短步槍)을 가지고 있는 것 외에 수압기관총(水壓重機槍) 8정(挺)을 배치했을 뿐이며, 10 cm(生地) 이하의 소구경 포(小口徑砲) 2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편제는 보포 혼합(步砲混合)이었고 전술 역시 매우 우스웠다. 영국군은 마옥곤 부대가 응전할 때 필시 부대 전체 출격 및 중앙 돌파를 채택할 것으로 짐작했기에 화력을 집중하여 일거에 전멸시킬 방법을 생각한 것이었다.
그때는 아직 참호 전술(壕溝戰術)이 없어서 영국군은 진을 칠 때 일률적으로 3로 횡대(三路橫隊)를 채택하여, 앞줄은 엎드려 쏴(臥射), 중간 줄은 무릎 앉아 쏴(跪射), 뒷줄은 서서 쏴(立射)를 했다. 포병은 아예 진지(陣地)를 구축하지 않았으며, 기관총의 위력도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탄띠(子彈帶)의 탄 간격(彈距)이 너무 넓어서 한참 만에 한 발씩 발사(半天一響)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대포와 일제사격(排子槍)에 의존했다.
마옥곤은 이 상황을 통찰하고 한간(漢奸)들의 첩보가 수시로 적에게 정보를 흘린다는 것을 깊이 알았기에, 일부러 허세를 부려 적을 미혹시켰다. 그는 각급 장령 및 대규모 기병을 대영(大營) 앞에 집합시키고 전투 전 훈시(訓示)를 했다. 마옥곤 본인은 머리에 홍정화령(紅頂花翎)을 쓰고 몸에 황마괘(黃馬褂)를 입고 검은색 전마를 탔으며, 뒤에는 커다란 붉은 양산(大紅傘蓋)을 높이 들게 한 채, 강개격앙하여 부하들을 격려했다. 마옥곤의 말은 장황하고 두서가 없었으며 이리저리 횡설수설(冗長無章,東拉西扯)했다.
먼저 영국은 이 시절에 작은 섬 3개뿐이었고 오직 아편(大煙)이나 팔 줄 알았지 좋은 일은 하지 않았으며, 영프 연합군 시절 북경에 와서 횡재(橫財)를 했기에 임칙서(林則徐)가 그들을 뼛속 깊이 미워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중국에 온 것도 또 횡재하려는 것이니, 우리는 반드시 조자룡(趙子龍)이 장판파(長坂坡)에서 조조(曹操)와 크게 싸웠던 위풍을 살려 적진을 일곱 번 들락날락(七進七出)하며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했다. 마옥곤의 말은 끊임없이 이어져 시간을 매우 오래 끌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그의 사전 배치에 따라, 아버지는 소속 기병 부대를 두 길로 나누어 이끌고 깃발을 내리고 북소리를 멈춘 채(偃旗息鼓), 적군의 좌우로 경계선을 우회하여 뒤로 돌아간 뒤 갑작스럽게 방비하지 않은 곳으로 돌격했다. 적병들은 마침 망원경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마옥곤 부대의 기병이 정비를 마치고 출발을 기다린다고 생각했기에, 철기(기병)가 이미 날아오듯 도착(飛至)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솔선수범(身先士卒)하여 적진으로 돌진하며 팔을 치켜들고 크게 외쳤다.
"형제들, 나를 따라 서양놈들을 죽이자!"
병사들은 이미 마음속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으니 누가 남보다 뒤처지길 원하겠는가? 한바탕 흰 칼날이 덮쳐 죽이자, 적들은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혼란에 빠 도망칠 길을 앞다퉈 찾고 서로 짓밟아 사상자가 참혹하고 무거웠다. 전장을 청소할 때 대략적으로 계산(粗計)해 보니 이 전투에서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힌 영국군이 총 500여 명이고 생포한 자(生俘)가 1,000여 명에 달했으며, '합파구자포'(哈巴狗子砲, 기관총) 3정, 화포 1문, 영국제 짧은 보총 다수를 노획(繳獲)했다.
聽父親說,英國皇家步兵被父親所部迂廻襲擊以後,激起了聯軍總司令瓦德西的暴怒,他認爲這一慘敗是八國的奇辱,發誓要追蹤消滅馬玉崑所率全部騎兵,以洩其憤。瓦德西下令,命沙俄哥薩克騎兵三個團約3000人,傾巢出動,快速追擊,誓與馬玉崑的騎兵在疆場上一見高低。這時天津業已陷落,八國聯軍已迫北京。據父親說,當時京漢及京津均已通火車,聯軍在大沽登陸之後,本可以乘火車朝發夕至,直指京畿,但是鐵路早被我軍及義民破壞,聯軍只好陸地行軍,進度緩慢。清廷因京畿危殆,急調馬玉崑率部星夜返衛北京。兵至楊村,恰與追蹤復仇的哥薩克騎兵遭遇,展開了一場慘烈的拼搏。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영국(英國) 왕립(皇家) 보병步兵)이 아버지가 이끄는 부대에 우회 기습을 당한 후, 연합군 총사령관(聯軍總司令) 발더제(瓦德西, Waldersee)의 격노(暴怒)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 참패가 8개국의 크나큰 치욕이라고 생각하여, 마옥곤(馬玉崑)이 이끄는 기병(騎兵) 전부(全部)를 추적하여 섬멸함으로써 그 분노를 풀겠다고 맹세했다.
발더제는 제정 러시아(沙俄) 코사크(哥薩克) 기병(騎兵) 3개 연대(三個團) 약 3000명에게 총출동하여 빠르게 추격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전장(疆場)에서 마옥곤의 기병과 단번에 승부를 겨루겠다고 맹세했다. 이때 천진(天津)은 이미 함락되었고, 8개국 연합군은 이미 북경(北京)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경한(京漢, 북경과 한구) 및 경진(京津, 북경과 천진) 구간에 모두 이미 기차(火車)가 다니고 있어서, 연합군이 대고(大沽)에 상륙한 후 본래는 기차를 타고)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도착(朝發夕至)하여 곧장 경기(京畿)를 향할 수 있었지만, 철도(鐵路)가 이미 일찍이 아군(我軍) 및 의민(義民)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어쩔 수 없이 육로로 행군해야 했고 진도가 느렸다.
청나라 조정(清廷)은 경기가 위태로워지자, 급히 마옥곤에게 조서를 내려 부대를 이끌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북경으로 돌아가 호위하도록 했다. 군대가 양촌(楊村)에 이르렀을 때, 마침 복수를 위해 추적해 온 코사크 기병과 조우하게 되었고, 한바탕 참렬한 사투(拼搏)를 벌이게 되었다.
據父親說,這次的遭遇戰是騎兵對騎兵的主力戰。馬玉崑命令父親率部執行這一任務。當時父親已任翼長,所率全翼騎兵約 2000餘人,略少於敵,但彼此在武器裝備上不相上下,所不同的是我軍使用的是白蠟杆長槍,哥薩克兵使用的是鐵製帶倒鉤的長矛,矛頭帶有魚尾形小旗。父親說,哥薩克騎兵的長相不中不西,面目猙獰,人高馬大,氣勢逼人。兩軍相遇之後,並未立卽殺在一處,彼此不謀而合地要顯耀出不鼓不成列的古代騎士氣槪。雙方整頓隊形,皆採一字層層橫隊。父親率統領、管帶、門旗手趙洪波及親兵等走在隊前,驅馬當先,敵軍各個團長也在隊前指揮。先是緩緩接近,待相距只有四五百米,父親一聲口令,全隊放馬奔騰,豪情奔放,無懼無畏。所有戰馬四蹄翻飛,馬的前蹄均高過馬耳,快到不能再快的速度。哥薩克騎兵也加快馬速。雙方越馳越近,終於在一聲天崩地裂的巨響中,兩軍殺在一處。父親說,兩軍相遇,真是白刃一交,生死立決。口令聲,吶喊聲,我軍殺敵呪罵聲,雙方騎兵落馬驚叫聲,兵刃撞擊聲,受傷者之呻吟聲,馬嘶聲,軍號聲,匯集一起。父親說,哥薩克騎兵雖人高馬大,自恃有力,但他們不會馬上槍法,只知憑其笨力用帶鉤長矛刺出抽回,直來直去,別無他技。我軍平素熟練馬上槍法,如馬上七把槍,是白蠟杆槍用全力一抖,直徑大如車輪,可以將敵軍武器碰擊出手,又可以上下左右四面殺敵,槍到敵倒。父親說,當騎兵對騎兵混戰一處時,敵我之馬只錯一鐙之隔,哥薩克騎兵的長矛一刺不中,我騎已緊挨其身,他們要想抽矛再刺,已難盤旋。敵騎兵被我方白蠟杆貫胸,瞬間落馬一片。我軍的弱點在於槍杆係木製,敵人吃虧以後,紛紛棄矛用刀,力大刀快,我軍白蠟杆多被敵刀削斷,於是我軍喪生敵刃者爲數頗衆。門旗手趙洪波眼見自己弟兄傷亡慘重,目眥盡裂,一怒之下,脫掉上衣,將辮子盤在頸上,把門旗一捲,權當武器,大喝一聲赤膊闖入敵群,連刺敵騎數十人。可惜他奮殺太久,精疲力竭,終被敵軍用馬刀攔腰一砍,斬爲兩段,上身落馬,下半身仍穩騎馬上,消逝於亂軍之中。父親每憶及此情景,不禁落淚。當時父親的白蠟杆子槍也被敵人削作兩段,數十個兇悍的哥薩克騎兵圍戰父親一人。父親寡難敵衆,且戰且退,猛然翻身下馬,躍入路旁青紗帳內。散兵地理生疏,不敢窮追,只圍着青紗帳放了幾排子槍,便離去了。這時馬玉崑親率騎兵來援,接殺敵軍,父親也出了青紗帳,重整所部,與馬玉崑並肩掩殺敵人。哥薩克騎兵原已被父親率部殺傷大半,不敢再戰,其長官帶着千餘人逃去。於是哥薩克自詡擧世無敵的神話破滅了。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이번 조우전(遭遇戰)은 기병(騎兵) 대 기병의 주력전(主力戰)이었다. 마옥곤(馬玉崑)은 아버지에게 부대를 이끌고 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아버지는 이미 익장(翼長)을 맡고 있었고, 이끄는 전 익(翼)의 기병은 약 2000여 명으로 적보다 약간 적었지만, 서로 무기 장비 면에서는 막상막하(不相上下)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군(我軍)이 사용하는 것은 백랍간(白蠟杆, 중국 물푸레나무) 장창(長槍)이었고, 코사크병(哥薩克兵)이 사용하는 것은 철제(鐵製)의 미늘(倒鉤) 달린 장모(長矛)로, 창끝(矛頭)에는 물고기 꼬리 모양(魚尾形)의 작은 깃발(小旗)이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코사크 기병의 생김새는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닌 것(不中不西)이 얼굴은 흉악(猙獰)하고, 체격이 건장하며 말도 거대하여(人高馬大), 기세가 사람을 압도했다고 한다. 양군(兩軍)이 조우한 후, 즉시 한데 뒤엉켜 살육전을 벌이지 않았고,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북을 치지 않으면 대열을 이루지 않는 고대 기사(古代騎士)의 기개(氣槪)를 과시하려 했다. 쌍방은 대형(隊形)을 정돈하고, 모두 일자(一字) 층층 횡대(層層橫隊)를 취했다.
아버지는 통령(統領), 관대(管帶), 문기수(門旗手) 조홍파(趙洪波) 및 친병(親兵) 등을 이끌고 대열 앞(隊前)으로 나아가 말을 몰아 앞장섰고, 적군(敵軍)의 각 연대장(團長)들도 대열 앞에서 지휘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접근(緩緩接近)하다가, 거리가 4, 500 미터(米) 정도 남았을 때 아버지의 구령(口令) 한 번에 전 부대(全隊)가 말을 내달려, 호기가 넘치고 두려움이 없었다.
모든 전마(戰馬)의 네 발굽이 질주했고, 말의 앞굽(前蹄)이 모두 말의 귀(馬耳)보다 높이 올라갔다할 정도로 더 이상 빠를 수 없는 속도였다. 코사크 기병도 말의 속도(馬速)를 높였다. 쌍방이 달릴수록 점점 가까워졌고, 마침내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巨響) 속에서 양군이 한데 어우러져 살육전을 벌였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양군이 맞붙었을 때 정말이지 흰 칼날이 한 번 교차하면(白刃一交), 생사(生死)가 즉시 결정되었다고 한다. 구령 소리(口令聲), 함성(吶喊聲), 아군이 적을 죽이며 내뱉는 욕설(殺敵呪罵聲), 쌍방 기병이 낙마(落馬)하며 지르는 비명(驚叫聲), 무기와 날(兵刃)이 부딪치는 소리(撞擊聲), 부상자의 신음(呻吟聲), 말의 울음소리(馬嘶聲), 군호 소리(軍號聲)가 한데 뒤섞였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코사크 기병은 비록 체격이 건장하고 말이 거대하여 힘이 센 것만 믿고, 마상 창술(馬上槍法)은 할 줄 몰랐으며, 오직 그 우둔한 힘(笨力)에 의지해 미늘 달린 장모를 찔렀다 뽑는 것만 알고 앞뒤로 곧게 왔다갔다만 뿐, 별다른 기술이 없었다고 한다. 아군은 평소 마상 창술에 숙련되어 있어, 마치 말 위에서 일곱 자루의 창(七把槍)을 쓰는 듯했는데, 이는 백랍간 창을 전력으로 한 번 흔들면 직경(直徑)이 수레바퀴(車輪)만큼 커져 적군의 무기를 부딪쳐 떨어뜨릴 수 있고, 또 상하좌우 사방으로 적을 죽일 수 있어 창이 닿으면 적이 쓰러졌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기병 대 기병이 한데 혼전(混戰)을 벌일 때 적과 아군의 말은 단지 등자 하나 차이의 간격(一鐙之隔)이었고, 코사크 기병의 장모가 한 번 찔러 명중하지 않으면 아군 기병이 이미 그 몸에 바짝 붙었기(緊挨其身) 때문에 그들이 창을 뽑아 다시 찌르려 해도 이미 방향을 틀기 어려웠다고 한다. 적 기병은 아군의 백랍간에 가슴이 꿰뚫려(貫胸) 순식간에 추수하듯 낙마했다.
아군의 약점은 창대(槍杆)가 나무로 만들진 것(木製)이라는 데 있었는데, 적들이 손해(吃虧)를 본 후 일제히 창을 버리고 칼을 쓰자(棄矛用刀), 힘이 세고 칼이 빨라(力大刀快) 아군의 백랍간이 적의 칼에 깎여 부러지는(削斷) 경우가 많았고, 이에 따라 아군 중 적의 칼날에 목숨을 잃은 자의 수가 꽤 많았다.
문기수 조홍파는 자신의 형제들이 참혹하게 사상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눈초리가 다 찢어질 정도로 분노하여, 화가 치밀어 오르자 상의를 벗고(脫掉上衣) 변발(辮子)을 목에 감은 뒤(盤在頸上), 문기(門旗)를 둘둘 말아 당장의 무기로 삼아 큰소리를 지르며 맨몸으로(赤膊) 적진에 뛰어들어 연달아 적 기병 수십 명을 찔렀다. 안타깝게도 그는 너무 오래 분투하여 기력이 다해, 결국 적군이 휘두른 마도(馬刀)에 허리가 베여(攔腰一砍) 두 동강이 났고(斬爲兩段), 상반신(上身)은 낙마했으나 하반신(下半身)은 여전히 말 위에 안정적으로 올라탄 채(穩騎馬上) 섞인 군대 속으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이 광경(情景)을 떠올리실 때마다 눈물을 금치 못하셨다.
당시 아버지의 백랍간 창도 적에게 깎여 두 동강 났고, 수십 명의 흉포한 코사크 기병이 아버지 한 명을 에워싸고 싸웠다. 아버지는 적은 수로 무리를 대적하기 어려워 싸우면서 물러나다가, 맹렬하게 몸을 뒤집어 말에서 내려 길가의 푸른 수수밭(青紗帳) 안으로 뛰어들었다. 흩어진 적병들(散兵)은 지리(地理)에 생소(生疏)하여 감히 끝까지 쫓지 못하고, 단지 수수밭을 에워싼 채 여러 차례 일제사격(排子槍)을 가하고는 떠나버렸다.
이때 마옥곤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지원을 와서 적군과 맞붙어 싸웠고, 아버지도 수수밭에서 나와 소속 부대를 재정비하여 마옥곤과 나란히 적을 덮쳐 죽였다. 코사크 기병은 원래 이미 아버지가 이끄는 부대에 의해 태반(大半)이 살상된 터라 감히 다시 싸우지 못했고, 그 상관(長官)은 1,000여 명을 데리고 도망쳤다. 그리하여 코사크가 세상을 들어 무적(無敵)이라고 자처하던 신화(神話)는 파멸하고 말았다.
记父亲赵倜的前半生
자오티(趙倜, 1871-1933)의 아들 자오쉰룽(趙尋龍)이 후에 생전 아버지의 증언에 기반한 아버지의 전반생을 글로 적은 것에서 발췌
기병맞다이라니 꼴루
존나 많은 글자+ 존나많은 한자 맛있음
분노해서 상의 탈의하고 돌진하는 거 수호지에서 봤는데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