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중세 프랑스의 화폐제도는 단일한 체계가 아니라, 약 800년에 걸쳐 여러 정치·경제적 층위에서 누적된 복합적 구조물이었습니다.
그 중심은 카롤링거 시대(8세기 말)에 정립된 리브르(livre) – 수(sou) – 데니에(denier)의 1 : 20 : 240 비율 3 단위 체계이며, 이 체계는 이후 약 1천 년 동안 프랑스 왕국의 회계·조세·임금·지대의 기본 언어로 기능했습니다.
그러나 이 틀 안에서 실제로 유통된 주화, 주조권의 소재, 금·은의 비율, 그리고 계산 단위와 실제 주화 사이의 간극은 시대마다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리브르(livre) – 수(sou) – 데니에(denier)는 계속 언급되니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I. 카롤링거 화폐 체계의 형성(8세기 후반 ~ 10세기)
1. 피핀 단신왕과 샤를마뉴의 은본위 개혁
메로빙거 말기(7세기 후반 이후) 프랑크 왕국의 주화 발행은 지역 장인 단위로 세분화되었고, 금 기반의 트리엔스(triens: 솔리두스의 3분의 1) 체계는 로마-비잔틴 유산의 소진 및 와해 함께 사실상 붕괴하였습니다.
이를 정리한 것이 단신왕 피핀(Pépin le Bref)의 755년 개혁으로, 은 데나리우스(denarius, 프랑스어 denier)를 단일 기준 주화로 채택하고 1 솔리두스(solidus) = 12 데나리우스, 1 리브라(libra) = 20 솔리두스 = 240 데나리우스의 3단위 체계를 공포하였습니다.
카롤루스(Carolus Magnus)는 793 ~ 794년 무렵 이 체계를 제국 전체에 관철시켰습니다. 그는 리브르의 중량 기준을 약 407.9g의 순은으로 정하고 데니에의 이론 중량을 1.7g 전후로 상향 조정하였습니다.
이때 리브르와 솔리두스는 오직 회계 단위(unité de compte)로만 존재했고, 실제로 주조된 주화는 데니에 하나뿐이었습니다.
2. 『피트르 칙령』(864)과 은화 규격의 재확립
카롤루스 사후 바이킹의 약탈, 빌링 침입과 영주권 분산으로 9세기 중반 서프랑크 은화의 무게·순도는 지역마다 크게 어긋났습니다.
대머리 샤를(Charles le Chauve)은 864년 6월 25일 『피트르 칙령(Edictum Pistense)』을 통해 왕국 내 주조소를 10개소로 제한하고, 모든 새로운 데니에에 왕의 이름과 조폐소 도시명을 각각 표리면에 각인하도록 명하였습니다.
"Ut in denariis novae nostrae monetae Ex una parte nomen nostrum habeatur in gyro et in medio nostri nominis monogramma, ex altera, vero parte nomen civitatis et in medio crux habeatur." (Edictum Pistense, c. 11)
이 조항은 왕권에 의한 주화 유형의 표준화를 명문화한 첫 사례로 평가되며, 이후 등장하는 『GRATIA D-I REX』데니에 양식의 근거가 되어 '고정 화폐'가 되었습니다.
이 칙령의 실제 시행 범위가 불완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규격은 10세기 이후까지 모델로 남았습니다.
3. 데니에 카롤링기엔의 변질과 봉건 주조권의 확산
987년 카페 왕조 개창 무렵 데니에의 순은 함량은 이미 약 1.27g 수준까지 하락했으며(이른바 livre capétienne의 305.94g), 주조 권한은 왕의 공식 특권이라는 이론과 달리 수십 개의 백작·주교·수도원으로 실질 분산되었습니다.
페캉 매장지(Trésor de Fécamp, 10세기 후반 매장, 약 8,600매 이상의 데니에 수록)는 이 시기의 화폐 혼재 상태를 보여줍니다.
II. 봉건 시대의 화폐 분열(10세기 – 12세기)
1. 주조권의 분산과 monnaies féodales
10–12세기 프랑스는 법리상 왕이 주조권을 보유했으나, 사실상 수십 명의 고위 귀족과 교회 영주가 자기 영지 내에서 주화를 발행했습니다. 이는 regalian 권리의 분산이자 영주의 수입원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주화를 현대 프랑스 화폐사에서는 monnaies féodales(봉건 주화) 또는 monnaies seigneuriales(영주 주화)라 부릅니다.
2. 주요 지역 데니에
각 영주령은 자체 표준(중량, 순도, 환산 비율)을 가진 데니에를 주조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 샹파뉴 백작의 데니에 프로비누아(denier provinois, Provins).
-앙주 백작의 데니에 앙주뱅(denier angevin).
-투렌 지역 투르의 성 마르탱 수도원이 주조한 데니에 투르누아(denier tournois).
-파리 일원의 데니에 파리지(denier parisis)
-툴루즈 백작의 데니에 툴루쟁(denier tolosain).
-멜괴유 백작과 마글론 주교구가 공유한 데니에 멜고리엥(denier melgorien) 등입니다.
각 표준은 독립된 등가 체계를 형성했으며, 상인들은 현지 환율표에 의존해 환전을 수행했습니다.
3. 빌롱(billon)화와 은 함량의 하락
12세기 말 대부분의 지역 데니에는 이미 순은에서 멀리 떨어진 billon 합금(구리와 미량의 은)으로 주조되었으며, 색이 검게 변하면서 일반 명칭으로 monnaie noire(흑화)라 불렸습니다. 이 현상은 특정 군주의 의도적 변조라기보다, 은광 고갈과 화폐 수요 증가가 맞물린 구조적 퇴화였습니다.
III. 13세기의 재통합: 필리프 2세 오귀스트와 성왕 루이
1. 필리프 2세의 이원 본위제(1203년 이후)
필리프 2세 오귀스트(Philippe II Auguste, 재위 1180–1223)는 1193–1214년 사이 일련의 군사·외교적 성공을 통해 플랜태저넷 왕가로부터 앙주·투렌을 포함한 프랑스 중서부 대부분을 회수했습니다.
새로 편입된 지역은 파리 표준(데니에 파리지)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은 파리지를 국가 단일 표준으로 강제하는 대신 데니에 파리지와 데니에 투르누아를 모두 왕실 명의로 주조하여 병행 유통시키는 이원 본위제를 채택했습니다.
두 본위는 4 : 5 비율로 고정되어 16 수 파리지 = 20 수, 투르누아 = 1 리브르 투르누아였습니다.
이 비율은 14세기 화폐 변조의 와중에도 관성적으로 유지되어 양 체계 사이의 회계 환산을 가능케 하였으며, 파리지가 화폐(주화)로서 사멸한 뒤(1365년경)에도 계산 단위로서는 수 세기 동안 존속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2. 성왕 루이의 1266년 대개혁: 그로 투르누아와 에퀴 도르
성왕 루이(Louis IX, 재위 1226–1270)는 1266년 8월의 화폐 대칙령을 통해 기존 데니에 단일 권종 체계를 다권종 체계로 재편하였습니다.
새 기축 주화 그로 투르누아(gros tournois)는 순도 23/24 fin(95.83%)의 은, 중량 약 4.22g, 순은 함량 약 4.044g으로 주조되어 1 수 투르누아(12 데니에 투르누아)의 가치를 담지했습니다.
이는 약 500년 만에 솔리두스가 실제 주화로 부활한 것이자, 대규모 상업 거래에 적합한 고액 은화의 등장을 의미했습니다.
같은 해 루이는 서유럽 프랑크 세계 최초의 본격 금화 중 하나인 에퀴 도르(écu d'or)를 발행했습니다(중량 약 4.2g).
초기 에퀴는 대중 유통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14세기 중엽 헝가리 크렘니차(Kremnica) 금광 개발과 이탈리아 피오리노(fiorino, 1252–)·제노비노(genovino, 1252–)의 확산과 함께 부활하여 프랑스 금본위 화폐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IV. 14세기의 화폐 변조(mutations monétaires)와 franc의 탄생
1. 필리프 4세 미남왕의 debasement(1295년 이후)
필리프 4세 미남왕(Philippe IV le Bel, 재위 1285~1314)은 중세 서유럽에서 화폐 변조(debasement)를 조직적 재정 수단으로 처음 활용한 군주로 평가됩니다.
잉글랜드·플랑드르와의 전쟁 비용, 성직자 과세 분쟁, 기사단 재산 처분과 같은 재정적 압박에 직면한 왕실은 1295년부터 일련의 조치로 데니에 투르누아의 순은 함량을 점진적으로 감액했습니다.
1302년경에 이르면 주화 1매의 은 함량은 필리프 4세 치세 초의 약 1/3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1306년 왕은 역으로 '강세 화폐(forte monnaie)'로의 복귀를 선포했으나, 이는 채무자가 감액 주화로 빌린 채무를 강화 주화로 상환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해 파리에서 에티엔 바르베트(Étienne Barbette) 저택 약탈 등 폭동을 유발했습니다.
동시대인들이 왕을 ' faux-monnayeur(화폐 위조자)라 조롱한 것은 이러한 전후 맥락에서였습니다.
2. 백년전쟁기 발루아 왕조의 재정 압박
1337년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 사이에 시작된 백년전쟁은 프랑스 화폐제도를 극한으로 밀어붙였습니다.
1343년의 시도된 "강세" 조치는 다시 혼란을 일으켰고, 이후 1350년대 장 2세 선량왕(Jean II le Bon) 치세에는 약 22회에 달하는 '질적 양화(debasement)'가 기록되었습니다. 1361년에는 그로 투르누아의 중량·순은 함량이 루이 9세 당시의 약 68%까지 감소했습니다.
3. Franc의 탄생: franc à cheval(1360)과 franc à pied(1365)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에 포로가 된 장 2세 석방을 위한 거액의 몸값(브레티니 조약, 1360년)을 마련하기 위해 왕은 franc à cheval을 발행했습니다(1360년 12월 5일 칙령).
이 금화는 1 리브르 투르누아 = 20 수 투르누아의 가치를 담지했으며, 주화 명문 'Johannes Dei Gratia Francorum Rex'에서 Francorum이 줄어 통칭 franc이 되었습니다.
1364년 즉위한 샤를 5세 현명왕(Charles V le Sage)은 부왕 장 2세가 남긴 재정·화폐 혼란을 정리하는 안정화 노선을 채택했습니다.
1365년 4월 20일 칙령으로 발행된 franc à pied는 금 함량 약 3.885g으로 franc à cheval과 동일한 가치를 유지하되, 주화 자체의 품질·순도를 강화했습니다.
샤를 5세는 조언자 니콜 오렘의 제안을 반영하여 주조량을 줄이고 품질을 높였으며, 이는 디플레이션과 함께 채무자 불만을 초래해 에티엔 마르셀(Étienne Marcel) 주도의 파리 봉기와도 간접적으로 연관됩니다.
4. 니콜 오렘의 De moneta(화폐론)
리지외(Lisieux) 주교이자 샤를 5세의 사제·고문이었던 니콜 오렘(Nicole Oresme, c. 1320–1382)은 1355–1360년 사이 Tractatus de origine, natura, jure et mutationibus monetarum(통칭 De moneta)을 저술하여 중세 유럽 최초의 본격적 화폐 이론서를 남겼습니다. 그의 핵심 명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화폐는 군주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소유물이며, 군주의 역할은 신탁관리인(custos)에 그칩니다.
군주의 일방적 debasement은 고리대금보다도 더 부정한 행위이며, 공공의 동의 없는 debasement은 폭군(tyrannus)의 표지입니다."
그러나 그의 규범적 주장과 별개로, 샤를 5세 이후 프랑스 왕국의 debasement 관행 자체는 종식되지 않았습니다.
V. 후기 중세: 은 기근, blanc, 그리고 제도의 종점
14세기 후반 ~ 15세기 중엽의 유럽은 존 데이(John Day)가 명명한 'bullion famine'(은 기근)의 시기였습니다.
아프리카·중앙유럽 은광 생산이 정체하고, 동방 향료 무역을 통한 은 유출이 계속되면서 유통 은의 절대량이 축소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에 대응해 순은 함량을 약 50% 수준으로 낮춘 은화 blanc(白貨)이 14세기 말 이후 그로 투르누아를 대체했습니다.
(3진법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3단위 체계로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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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가져왔으니 두캇에 관한글도 써오도록
@KOR0522-Petrus 그아악. 싫어! - dc App
@KOR0522-Petrus 두캇은 중세의 기축통화였다! 끝! - dc App
@윌리엄마셜 차단목록 딸깍 관리자기만 딸깍 차단기간 744년 딸깍
@KOR0522-Petrus 크아악! 한달만 시간을 다오... - dc App
세금도 돈으로 냈나? - dc App
양판소 보면 돈의 가치를 당연하게 쓰는거같아서 껄끄러운 한편으로 중세에선 어떻게 했나 항상 궁금했음 모서리 깎아내는건 저울로 달아서 대응한다 치면 아예 녹이고 잡쇠 섞어서 함량 낮춰 새로 찍어내는건 못 잡나?
정말 강력하게 처벌(삶고 찢고 베고는 기본)하는 중죄였지만 굉장히 흔한 범죄이기도 했고 대응 방법도 가지가지였다고 비중 재고 긁어보고(흠집 색이 진퉁과 다름) 심지어 맛도 보고 두드려서 소리 듣고 기타 등등
늑대와 향신료 보면 초반 은화 에피소드 중에 주인공이 다리 위에 좌판 깔고 동전 감정하는 사람들 찾아가는 내용 있는데 얘네가 하는 일이 이런 거 거기선 부딪쳐서 소리 듣는 것만 나오지만 실제로는 위에 쓴 것처럼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고 함
니는 3단위 체계가 3진법이냐?
3개의 단위를 하나로 묶어서 3진법이라고 한건데, ㅈㅅ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