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치 카오루라고 V&R 플레닝 AV 레이블 사장이자 주로 스캇물이랑 애널물로 유명한 감독은 아버지가 외교관이라 어릴 때 팔레비 왕조의 이란에서 살았음. 팔레비 시절 이란이 어땠는지 자신의 저서 '유작'이라는 책에 썼는데 그 내용을 번역했음.




갑자기 시작한 이란 생활


 나의 일본 초등학교에서의 생활은 3학년까지 한 번 끝을 맞이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일의 일부로서, 이란에 이사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안 것은 불과 1주일 전이었다. 그 직전 2~3개월 전부터 토요일은 부모님과 내가 백화점 순환을 했었다. 그러나 보통 아버지는 쇼핑 같은 것과 먼 사람이라서 '어떤거?'라며 이상하다 생각해 들은 것도 있지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결국 그건 이란에 부임한 것 때문에 산 것이었지만,  1주일 전에 '이란에 간다'고 들은 것도, 초등학교 3학년에게는 무슨 일인가? 여느 때처럼 이해 불가능했다. 나의 감각으로는 알아차렸을 때는 이제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공항에 있었다.


 이란에 도착한 첫 날에는 호텔에 숙박했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한 것은 화장실이었다. 당시엔 양변기를 본 적이 없었기에 긴장해 발을 뻗었다. 그런 놀라울 뿐인 신생활이었으나 다음날 아침 식당에 뜻하지 않은 일이 닥쳐 아버지가 프랑스어로 아침을 주문하는 것을 봤다. '멋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처음 아버지를 동경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산 1960년대 이란은 아직 팔레비 왕조(모하메드 레자 샤 팔레비 2세)가 미국과 협력해서 정권을 쥐고 있던 시대였다. 지금의 이슬람교의 나라가 아닌 자본주의적인 서양 사회였다.


 이란에 머무르던 중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났었다. 그때는 경찰이 총을 들이대고 시민을 연행하고 정말로 생생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그때 아버지도 '위험하니깐' 도우미를 차로 보냈었지만, 도중에 아버지의 차는 돌아오는 길에 폭주해 둘러쌓여 움푹 파여 이제 유리 같은 것 없이 온갖 죽음에 한 걸음 자신을 간신히 도망쳐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사관에 보고하면 국제문제가 되기 때문에'라며 가만히 있었다.



이란에서 조우한 '아다치 카오루의 변화하기 이전의 풍경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의 2학기까지를 이란에서 지냈다. 일본에 있을 때는 어린 마음에 이란이 어떤 나라인가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4계절도 있고, 눈도 내리고, 매우 아름다운 나라였다. 내가 다닌 것은 현지의 미국 학교였다. 거기에는 외국인 뿐만 아니라 이란인 부유층 아이들도 여럿이었다. 당시 외국에는 일본인이 드문 것도 이유였지만 이란인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흔히 아이들의 외국어 실력이 오르는 것은 빠르다 해도 좋지만, 나도 3개월부터 5개월 후 정도에는 페르시아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영어, 친구들과는 페르시아어로 생활한 덕분이다.


 공식적으로는 없지만 일본인이 올 때에는 아빠로부터 '통역해줘'라는 말을 듣고 쇼핑에서 사귀기도 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른이 되어서도 영어는 때때로 사용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지만 페르시아어는 쓸 기회가 없기에 지금은 완전히 잊었습니다.


 어느 나라에도 아이들은 노는 것은 같고 이란에서도 친구들은 전쟁 놀이를 하며 종종 놀았습니다. 방과 후에는 친구 집에 놀러 가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꽤 부유한 가정이었습니다. 이란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친구가 담배를 뻐끔뻐끔 핀 것이다.


 '이란의 아이가'라고 하면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내가 사귄 친구는 모두 피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흡연력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이다. 당시의 이란에는 아이들도 노점에서 평범하게 담배를 살 수 있었다. 과연 밖에서 피우도록 한 것은 없었지만, 모두 친구의 집에 모일 때는 피웠다. 그렇다고 결코 불량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 좋은 친구였지만 왜인지 모두가 담배는 기본으로 피고 있었다.


이란 생활은 30살 정도의 여성의 도우미가 매일 와주었다. 부모님은 파티라든가 환영회 같은 게 자주 있어서 밖에 나갈 때가 많았고 여동생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 도우미와 내가 2인으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함께 2개의 큰 사건을 경험했었다.


 언제나 학교가 끝나면 대체로 혼자서 돌아왔지만 그녀가 마중 나와주었다. 어느날 오후 마중 나와준 그녀와 택시 타는 곳까지 걸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멀리 있었다. '뭔가?'라고 생각하며 가까이 갔다가 2~3명에게 둘러싸인 남자가 뭔가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것은 교수형으로 '공개처형'의 현장이었다. 날뛰는 남성을 묶고 깃발을 높이 걸도록 느끼는 작업에 위에 올라가 어느 순간에 움직임이 멈췄다. 관중도 의외로 조용했고 보도록 한 느낌이었다 생각했다. 당시 이란에는 일상적인 광경이었을지도 모른다.


 도우미는 과연 아이인 나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본 순간 '더는 보고 싶지 않아' 같은 특별히 충격이었단 감정은 들끓지 않았다. '아, 죽음은 이런 거구나' 정도였다.


 공개처형을 본 것은 앞으로도 전에도 그때 한 번 뿐이었다. 그것은 그닥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어린 마음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타인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다'라는 기분은 있도록 한 느낌은 들었다.


 또, 그 도우미는 아버지의 귀가가 늦은 때에는 숙박하며 아이 돌보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2사람이 있던 어느 날 밤, 어떤게 계기였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부엌에서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여기서 아이가 태어나는 곳'이라며 여자 성기를 보여주었다. 그때는 '헤에'란 느낌이었고, 그런 것에 흥미를 갖고 '또 보여줘', '기분 나빠'란 생각은 들지 않았고 특별히 어떻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체험이었다. 수도에서 소리가 났지만 부엌에서 보여진 것만은 명확히 기억한다.


 도우미와 둘만의 추억은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이야기해 왔지만, 어쩌면 '아다치 카오루'란 AV감독에게는 큰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출처- '유작' 2017년 아다치 카오루 저, 2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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