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대학살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히틀러 외에 또 한 사람, 교황 비오 12세뿐이었다. 비오 12세 시성운동이 시작되면서 그가 나치에 항의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사실이 교회 안팎에서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교황의 타협은 '1933년 7월 조약'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주 독일 로마 교황청 대사인 유제니오 파첼리(후일의 비오 12세)가 막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부와 맺은 조약이다. 가톨릭은 이 족약에 따라 독일 안에서 종교의 자유와, "교회 문제를 자체적으로 규제하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하지만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나치의 국가 권력에 교회가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양해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조약을 대학살의 주요한 기반으로 여기고 있다. 후일 교황 비오 12세가 된 파첼리는 전쟁이 발발한 뒤 중립적 침묵이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태도를 취했다. 그 외에는 평화의 조정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없다는 것이었다. 바오로 6세는 이렇게 말한다. "항의와 비난의 태도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로웠을 것이다." 정식 항의는 오히려 해로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비오 12세의 침묵과 관련하여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역사학자 수전 주코티가 『바티칸의 창가』에서 지적했듯이 "교회는 대학살 기간의 교회사를 아직도 솔직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물론 비오 12세 자신도 나치즘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는 했다. "나치즘이 예수 그리스도를 오만하게 배신하고 예수의 말씀과 구원 사업을 거부하고 폭력과 인종과 피를 우상 숭배하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전복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발언은 1945년이 되어서야 나왔다. 당시 나치즘은 이미 몰락했고 수백만의 영혼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로버트 카츠의 견해에 따르면 비오 12세에게 1년 간격으로 좋은 기회가 두 번 있었다. 즉 교황이 용기를 내어 유대인의 강제 이송과 살육에 반대하는 의견을 발표할 수 있었다.(실제로 교황은 발표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히틀러가 유대인 말살 계획을 축소하여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졌을까? 교황이 목숨을 걸고 행동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런 희생적 행동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당겼을까? 사실 비오 12세는 마음 속으로 종전을 간절히 바랐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칠흑같이 어두운 시기에 그리스도의 대리인이 역사상 가장 무서운 악마였던 히틀러를 거세게 비판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교황 비오 12세에 대한 논란은 20세기 내내 끊임이 없었다. 바티칸이 그의 시성 운동을 펼치면서 그에 대한 논란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지는 듯하다. 논란은 히틀러의 조직적인 유대인 말살 저책이라는 끔찍한 악에 직면한 교황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정은 분명했다. 교황은 공개적으로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그는 세계대전이 가져온 죽음과 파괴를 두고 거듭 슬퍼했지만 "유대인"이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1943년 초 독일 주교들에게 그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는 힘껏 소리쳐 외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이 침묵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 침묵 정책은 가볍게 내려진 것이 아니었고 유대인 대학살 이외의 다른 심각한 사태도 감안한 것이었다. 교황은 나치의 대량 학살 보도가 연합군의 선전 공세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았다. 하지만 침묵이 그의 핵심 정책이 되었다. 교황이 연합국과 독일 양측에 완벽한 중립의 자세를 보여 주면서 평화 조정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바티칸 정책의 근간이었다. 비오 12세는 스탈린의 러시아가 히틀러의 독일보다 더 위협적이라고 생각하고, 무신론의 공산주의를 물리치지는 못하더라도 억누르기 위해 연합국과 전반적인 친선을 추구했다. 교회가 박해받는 유대인에게 마티칸이나 교회 안에 은밀하게 피신처를 제공했다는 점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생명을 구한 사람들 수에 대해서도 치열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증거를 내세울 수 있는 수천 명에서 증거 없는 수만 명에 이르기까지 다향한 숫자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바티칸 덕분에 다행스럽게 목숨을 건진 수천 명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살육 기계에 빨려 들어가 결국 시체가 되어 버린 수백만 명이다. 교황의 침묵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설득력 있는 대답은 바오로 6세가 1963년 교황 즉위식에서 내놓았는데 전반적으로 비오 12세를 옹호하는 어조였다. 바오로 6세는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의와 비난의 태도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로웠을 것이다." 만약 비오 12세가 공개적으로 나치를 비난하고 나섰다면 "본인(교황)의 희생은 물론,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 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비오 12세의 비판자들은 마찬가지로 시각을 달리해 비판했다. (하지만 바오로 6세처럼 권위가 있지는 못했다.) 그들은 대학살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때 침묵 정책보다 더 나쁜 대응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런 찬반양론은 196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독일 극작가 롤프 호크후트의 연국 『대리인 Deputy』이 1963년 공연되면서 빗발치는 논쟁이 다시 불붙는 것이다. 이 연극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교황의 침묵을 다룬 것으로서, 작가의 노골적인 교황 비난은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 연극에 뒤이어 교황을 은근히 비판하는 역사가 레온 폴리아코프는 누구든 비오 12세의 정책이 유익한 것인지 아니면 유해한 것인지 논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오로지 침묵만이 있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폴리아코프는 이런 견해를 내놓았다.(그 견해에 몇몇 가톨릭 작가들도 나중에 동조했다.) 항의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이기 때문에, 교황은 침묵하지 말고 결연하게 항의했어야 했다. 그 항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단하지 말고 말이다. 교황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미래의 역사가가 판단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바티칸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 후대의 사람들이 더 자세한 정보에 입각하여 더 현명한 판단을 해줄 것으로 믿은 듯하다. 그렇게 하자면 50년을 기다려야 했다. 바티칸은 비밀문서를 50년이 지나야 공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의 목소리가 너무 큰 탓에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모든 비밀문서를 공개할 것이라고 1965년에 발표했다. 사람들은 문서가 곧 공개되기를 기대했고 소동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그 후 20년에 걸쳐 전쟁 시기의 수많은 문서가 11권의 전집으로 출판되었다. 문서 공개 프로젝트는 그렇게 해서 완료되었지만 바티칸조차도 그 작업이 선택적이고 '편집'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바티칸 대변인은 "졍확하고 과학적인 기준에 따라 편집했다"고 말했다. 한편 많은 개인 연구자들이 찬성 혹은 반대의 입장에 서서 교황의 고치를 다룬 연구서와 분석서를 다양하게 출판했다. 아무튼 후대의 역사가들이 논객으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정보가 흘러넘치게 되었다. 하지만 교황과 관련된 문제가 1990년대에 다시 불거지면서 그들은 아직도 찬반양론 중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난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는 나치에 반대한 가톨릭 신자가 "아주 적었다"는 과오를 인정했고 나중에 사과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비오 12세의 사목 활동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성까지 추진함으로써 비오 12세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사실 2000년 성년의 중심 행사로서 비오 12세에 대한 시성의 전단계인 시복을 계획했다. 하지만 교황에 대한 비난이 다시 터져나오는 바람에 시복 행사를 2000년 대희년 이후의 어느 한가한 때로 연기했다.


 폴리아코프 등 후대에 와서 교황을 비판한 사람들은 이젱 거의 잊혀지고 있다. 철저한 문서 고증에 의한, 교황의 침묵 정책에 대한 검토는 지금까지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바티칸 문서국에 들어 있는 일부 비밀문서가 여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교황의 정책을 판단하는 데에는 별로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문서 검토가 거의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교황 12세 관련 문서들을 이미 30년 이상 샅샅이 조사해 왔다. 비오 12세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강력한 문서는 이미 공개되었다. 만약 공개되지 않은 문서 중에 교황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치명적인 것이 있다고 한다면 바티칸 측에서도 감히 비오 12세의 시성을 추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결코 만만한 교황이 아니며 그가 전임 교황의 시성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 숨겨진 비밀문서 같은 것은 더 이상 없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정보가 넘치는 오늘날 역사가, 극작가, 사상가들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그들의 '대체 역사'를 전개해 볼 수 있다.



 비오 12세는 두 번씩이나 용기를 내어 항의문을 작성하여 발표하기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침묵으로 돌아섰다. 이제 그 두 번의 '위기'에 관한 정보가 다양하게 나와 있다. 교황의 공개적인 항의는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두 번의 위기는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을 것이다. 


 바티칸이 비오 12세의 시성을 비밀리에 심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증언은 두 번의 위기 가운데 첫 번째 것을 생생하게 보고하고 있다. 그것은 독일인 수녀 파스킬리나의 증언이다. 그녀는 비오 12세가 교항이 되기 전에 그리고 교황으로 재위하던 내내 교황 사저 관리인 겸비서 수녀였다.


 때는 1942년 여름이었다. 나치는 동유럽에서 아인자츠그루펜 살인 기동 부대를 가동하여 이미 잔악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사실 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 사건과 파실자 숫자는 부정확하게 세상에 알려졌고, 서구 언론은 수십만 명이 살해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의 기사를 게재하고 있었다(6월 26일자, <보스턴 글로브>기사. 학살당한 폴란드 유대인은 70만 명을 넘어섬).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백만 명이나 되는 유럽 유대인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유대인 말살 계획'은 겨우 몇 달이 지났을 뿐이었다. 몇 년 동안 시제품 단계에 있었던, 대량 학살 기계와 광범위한 관리 시스템은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유대인을 죽이는 공장 설비를 갖춘 여섯 군데의 강제 수용소는 완전 가동되기 시작해고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지에서 7, 8월에 강제 이송되어 온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또 쇠고기를 써는 것 같은, 살인 기계가 고안되고 운영되었다. 유대인들이 오전에 기차에서 내리면 그들은 저녁 무렵이면 한줌의 재가 되어 강에 뿌려졌다. 옷과 머리카락은 독일로 보내기 위해 포장되었고 금이빨은 따로 모아서 금괴를 주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몇 달만 지나면 세계는 역사상 가장 암흑기에 들어서게 되어 있었다. 외부 세력계에서는 이제 더 이상 강제 이송 규모가 비밀이 아니었다. 당사자들을 제외하고 이 희생자들에게 닥칠 운명은 세상에  점점 더 분명하게 알려야겠다. 바티칸에서는 그들의 가련한 운명을 알고 있었다.


 파스킬리나 수녀의 말은 이렇다. 당시 네덜란드 주교들은 강제 이송에 반대하여 거세게 항의했다. 나치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 출신의 가톨릭 신자 4만 명을 일제히 검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교황은 그런 검거 소식을 바로 들었다. 수녀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점심 때 교황께서 깨알같이 쓴 종이 두 장을 든 채 주방에 들어오셨어요. 그분이 말씀하셨죠. '이건 오늘 저녁 <옵세르바토레 로마노>에 실릴 항의 서한이오. 하지만 이제 생각을 달리해야겠어요. 만약 주교 서한이 4만 명의 생명을 희생시켰다면 비난의 어조가 훨씬 강한 이 서한은 유대인 20만 명의 생명을 희생시킬 수도 있소. 나는 이런 큰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가능한 한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사람들을 구조하는 게 났겠어요.' 저는 기억해요. 그분은 주방에 계시다가 서한을 찢어버리셨죠."


 많은 역사가들은 1999년에 공개된 파스킬리나 수녀의 증언을 읽고 그 증언의 가정적(家庭的) 분위기, 혹은 교황이 그런 중대사를 주방에서 말했다는 상황에 불편함을 느꼈다.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파스킬리나 수녀의 증언에 인용된 숫자는 실제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한 예로 파스킬리나 수녀의 회고에 나오는 유대 출신 개종자 4만 명은 실제로는 92명이었고 이런 개종자 전체 수도 6백 명을 넘지 않았다. 아무튼 네덜란드 주교단의 항의 사건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건이다. 또 파스킬리나 수녀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예수회 역사가 피터 검펠의 주장도 의심할 근거가 없다. 비오 12세를 가장 잘 아는 옹호자인 검펠은 바티칸 성성의 비오 12세 성인 추대에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교황은 그때 유대인 박해에 반대하는 공개 항의문을 발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네덜란드 주교단의 발언에 대한 나치의 반응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교황은 공개적 항의가 유대인의 어려움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고 결론짓고 서한을 불태웠다." 검펠의 말에 따르면 서한은 두 장이 아니라 넉 장이었다.


 교황이 <옵세르바토레 로마노>지에 나치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는 대체 역사를 검토하기 전에 먼저 비오 12세의 두 번째 기회를 살펴보자. 당시는 약 1년이 지난 1943년 10월이었다. 교황은 침묵 정책을 포함하여 포괄적인 평화 전략을 추구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6천 명씩 죽어 가고 있다는 정확한 보고를 받았다. 연합국은 전쟁의 국면이 유리하게 돌아가자 바티칸의 외교 정책을 무시하고 나치 독일에 대하여 강경 일변도로 나갔다. 연합국은 서유럽에서 단독 강화란 있을 수 없고, 독일의 무조건 항복만을 거듭 주장했다. 교황의 전략적 측면에서 보면 교황에게 더욱더 나쁜 것은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되어 무솔리니가 왕에게 체포된 것이다. 새로 집권한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연합국 측에 가세했다. 이런 사태 발전에 그 어느 때보다도 화가 난 히틀러는 12개 사단을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시켜 로마를 점령했다. 바티칸의 치외 법권을 존중하겠다는 베를린의 화약이 있었지만 독일 군대는 바티칸의 주변을 둘러쌌다. 더욱더 심한 것은, 로마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당시 나치는 교황을 제거 대상으로 꼽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교황 자신은 로마의 유대인들이 강제 이송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침묵 정책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의 순간을 맞이했다.


 1943년 10월 16일 새벽, 아돌프 아이히만의 특공대는 로마의 심장부를 덮쳤다. 나치가 지목한 25개 '구역'과 게토를 집집마다 샅샅이 뒤진 365 SS경찰대는 몇 시간 만에 천여 명의 유대인을 체포했다. 교황청의 창문에서도 연행되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일찍이 교황이 이런 심한 모욕을 받은 적은 없었다. 비오 12세는 바로 그날 아침 서둘러 마련한, 전례 없는 외교적 행동을 펼친다. 즉 로마에 와 있던 독일 주교에게 교황의 위협적인 항의 서한을 베를린에 전하라고 지시한다. 주교는 서한을 작성해서 나치 외무부에 전한다. 그 주교는 이 서한에서 일제 검거를 즉각 중단할 것을 '다급하게' 호소하고 경고한다. "만약 중단하지 않는다면 교황께서 이런 행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힐 것입니다." 또한 그날 오후 교황의 개인 비서는 전례 없이 위협적인 서한을 나치 점령군 사령부에 전달한다. 이때는 일제검거가 사실상 끝났지만 비오 12세의 국무 장관이 간청해서 로마 주재 독일 대사가 교황청에 회신을 보낸다. 로마 주재 독일 대사는 주교가 바티칸의 대리인임을 인정하고 교황의 심기를 달래기 위하여 로마의 유대인을 이탈리아 내의 노동 봉사에 활용하겠다고 확인해 준다. 교황과 총통은 일찍이 이처럼 첨예하게 대치한 적이 없었고 남은 문제는 누가 먼저 양보할 것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일주일 뒤, 로마 주재 독일 대사는 일제 검거에 대한 바티칸의 분위기를 살피면서 베를린의 외무부에 다시 보고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방에서 압력을 받고 있지만 교황은 로마의 유대인 강제 이송에 대한 공개적인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다." 대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비오 12세는 이런 태도가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와, 로마 주재 독일 당국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기 위해 이 미묘한 사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일제 검거로 연행된 천여 명의 유대인들은 이미 아우슈비츠의 기차역에 내렸고 모두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었다. 그 후 나치 점령군들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면서 또다시 로마 유대인 1천 명을 마구 붙잡아서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로마 주재 독일 대사는 두 번째 보고서에서 이렇게 보고한다. "이 사건은 독일-바티칸 관계에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완전 정리되었다."



 타임머신에 안전하게 탑승한 우리는 이제 시간을 역행하여 1942년 여름으로 돌아가서 바티칸 주방의 대리석 바닥에 부드럽게 착륙한다. 우리는 현재 그 후의 모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교황에게 조언하기가 쉽다. 우리는 교황을 정중하게 설득하여 항의 서한을 불태우지 말고 로마 신문에 게재하게 한다. 네덜란드 주교단의 비난보다도 "훨씬 강력한 어조"를 담은 그 서한을 전세계 가톨릭 신자에게도 보낸다. 당시 전세계 가톨릭 신자 수는 5억 명 정도인데 독일인은 약 3천 500만 명 정도였다. 교황의 서한은 히틀러의 강제 이송 명령과 대량 학살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한다. 바티칸 방송국은 <옵세르바토레 로마노>에 실린 기사와는 별도로 전세계 시민을 향해 유대인 말살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방송한다. 주교들은 어디에서든지 교구 신자들에게 항의 서한을 읽어 주고 세계의 기독교인들, 유대인들, 특히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힌다. 사형 집행인들과 나치 옹호자들이 연합군의 선전 공세라며 은폐하고 있는대학살은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 이제 유대인은 멸종의 운명에 처해 있다. 비오 12세는 이렇게 대학살을 고발하면서 1942년 내내 대서양 양쪽에서 교황에게 간절히 바랐던 것을 직접 실천한다.


 또한 교황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대한 예방 조치를 구체적으로 취하지 않은 서방 강대국들에게도 강한 경고를 보낸다. 당시 나치는 죽음의 수용소로 일방 통행하는 수송 철도를 완전 가동하고 있었다. 연합국에서는 희생자들을 구출하기 위한 물밑 작업을 진핸하고 있었지만 진척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제 비오 12세가 공개적으로 항의를 시작하자 대중의 분노는 들끓고 무관심의 벽은 허물어졌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7월 집회, 12월의 '애도와 기도의 날', 1943년 4월 버뮤다에서 있었던 영미 양국의 구출 회의는 공허한 말 잔치로 끝나지도 않고 또 버뮤다 행사처럼 실패작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연합국은 이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민 심사를 안화하는 것에서부터 죽음의 수용소로 향하는 철도의 폭격, 그 후 수용소 자체를 폭격하는 등 다양한 대응책을 내놓는다.


 히틀러는 이런 사태 발전에 물론 격분한다. 대노한 그는 "돼지 새끼들을 제거하기 위해" 바티칸을 침범하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교황청이 현재 히틀러의 동료 독재자인 무솔리니의 보호 아래 있어서 총통의 세력은 미치지 못한다. 파시스트이든 아니든 이탈리아 정부가 바티칸으로 행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총통은 아무리 화가 나도 하루 6천 명 이상을 죽이지는 못한다.(파스킬리나 수녀의 증언처럼 하루 4만 명을 죽이는 것은 조직적으로 불가능하다.) 종교를 기준으로 가톨릭 신자만을 박해한다는 아이디어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다. 독일 사회의 각계각층에 뿌리내린 가톨릭 신자는 히틀러 자신을 포함하여 제국 인구의 3분의 1이나 된다. 그러므로 히틀러에게는 선택의 길이 두 가지밖에 없다. 유대인 말살 계획의 숫자를 줄이거나, 아니면 점증하는 구출의 목소리와 교황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말살 계획을 축소하는 대안을 그럴 듯하다. 1941년 8월, 독일 사제단의 항의를 받고 히틀러는 안락사 프로그램(불치병 환자의 '자비스러운 살인')을 중단했다. 그때부터 히틀러는 학살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런 관대한 처분의 전례는 현재에 비해 훨씬 규모가 작았을 때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처럼 사람들의 분노가 들끓자 히틀러도 똑같이 분노하면서 두 번째의 대안(교황의 요청을 무시)을 선택한다. 그는 그런 일이 없다고 의뭉을 떨면서 살해 대상 명단을 더욱 늘린다.


 독일의 선전 장관 요세프 괴벨스는 독일 국민의 칠흑 같은 고립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검열과 심리적 위렵을 강화했다. 하지만 신뢰성 상실로 인해 밀어닥치는 거센 분노의 파도를 막을 수 없다. 연합국은 독일 국민에게 나치가 자행하고 있는 유대인 대학살을 알리는 수백만 장의 전단을 공중 투하하면서 이제 비오 12세의 항의 서한도 함께 뿌린다. 독일의 가톨릭 신자들이 그 편지의 진위 여부를 의심할 때, 독일 사제들은 그것이 진실임을 알려 주고 신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킨다. 이렇게 하여 독일 내의 저항 운동은 확산된다. "비합법적 명령을 따르지 말라"는 독일 병사의 봉급 명세서에 인쇄된 문구는 이제 강력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고위 공직자들이 과감하게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우고 결국 행동에 나선다.


 하지만 교황이 행한 가장 큰일은 아주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린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지금까지의 행동 노선을 완전히 바꾼다. 그들은 현재까지 유대 공동체가 위협을 받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지도자를 나치 조직에 보내 선처를 호소했다. 이를테면 최종 말살 계획보다 정도가 덜한 대안을 협상하기 위해 나치를 찾아간 것이지만 그것은 잘못된 전략이었다. 이 일과 관련된 유대 위원회의 계획은 완전 실패한다. 그들의 의도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 그들은 나치의 정책에 추종하고 협조한 오명만 남긴 것이다. 가장 치명적인 착오는 유대인의 무장 봉기를 유대 위원회가 적극적으로 말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황 비오 12세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유대인은 학살에 처해질 운명이라는 점을 밝히자 사정은 달라진다. 유대 위원회의 유화적인 대응책은일거에 분쇄되고, 유대인들은 악마 같은 적을 상대로 하는 유일한 전략인, 치고 빠지는 저항 운동을 전개한다.


 이렇게 해서 1943년 바르샤바 게토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죽음의 수용소(특히 트레블린카, 소비보르, 아우슈비츠)에서도 봉기가 일어난다. 나치의 진압 시도는 더욱 힘들어지고 몇몇 봉기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동시에 세계 여론에 굴복한 연합군은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철도를 폭격하고 또 가스실마저 파괴한다. 아이히만의 강제 이송 조직은 붕괴된다. 사전에 위협을 알아 챈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서든지 뿔뿔이 흩어지고 연합국과 스위스 같은 중립국은 그들을 신속히 받아들인다. 각국은 교황청에서 시작된 잇따른 도덕적 압력으로 유대인의 이민 심사를 완화한다. 항의하는 교황 앞에서 로마 유대인을 일제 검거하는 야만적 사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전쟁 막바지에 헝가리 유대인 43만 명을 강제 이송하려 했전 나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로마 유대인에 대한 검거 또한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그래도 많은 유대인들이 죽었겠지만 유대인 멸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우리는 만약에 교황의 적극적인 항의가 있었더라면 유대인 희생자 600만 명과, 비 유대인(집시, 여호와의 증인, 러시아 전쟁 포로, 정치범, 동성애자, 기타 부랑자라고 판단된 사람들) 희생자 500만 명 중 90%는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바티칸 주방으로 출발하기 전에 우리의 타임머신에 약간의 고장이 발생하여 두 번째 목적지, 1943년 10월 16일의 로마로만 되돌아갈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미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이제 아주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먼저 1942년에서 1년이 지난 지금, 대학살 희생자 수는 엄청나게 불어나 3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더 이상 영원의 도시라 할 수 옶는 로마 시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 히틀러는 7월에 바티칸 '돼지 새끼들'을 비난하면서 교회가 이탈리아 왕의 측근을 지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왕의 측근들이 무솔리니를 체포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공수부대를 로마로 보내 왕과 새 정부 관리들을 체포하는 계획을 급히 세웠다. 괴벨스의 말에 따르면 "바티칸을 장악하려는 것이다." 괴벨스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바티칸 침범을 단호히 반대했다는 사실을 기록에 남겼다. 바티칸을 공격하면 '세계 여론'에 엄청나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날 늦게 총통도 바티칸을 침범하지 않는 데 동의했다. 바티칸 침범은 병참 측면에서도 곤란한 점이 많았다.(하지만 그는 포로가 된 무솔리니를 구출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으나 결국 구출하지 못했다.) 3개월 후, 히틀러는 이제 군사적으로 바티칸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입장에 서 있고 지난 7월보다 더 화가 났다. 9월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10월 13일에 다시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배신'했기 때문이다.


 교황이 로마 유대인 일제 검거에 항의하면서 베를린과 대치하는 순간을 예리하게 분석한다면 상황은 다음과 같다. 그는 바티칸 내부에서 현재 알려진 대로 이미 비난의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새벽의 현장 급습에서 체포된 유대인 1,060여 명은 교황 서재에서 1km도 안 떨어진 곳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들 가운데 3분의 1은 남자이고 3분의 2는 여자와 어린이였다. 그들은 아우슈비츠행 유개 화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뒤, 로마 주재 나치 외교관의 실수로 교황은 그들이 하차한 후에 당하게 될 운명을 알게 되었다. 10월 6일, 로마 주재 독일 대사 직무 대리인 젊은 영사 아이텔 모엘하우젠은 닥쳐올 일제 검거를막으려는 의도에서, 베를린의 외무부 앞으로 보낸 메시지에 문제의 유대인들을 가리쳐 "정리"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이것은 독일 외교관이 공식 문서에 적나라한 용어를 쓴 첫 번째 경우였고 영사의 이런 말실수는 곧 바티칸에 알려지게 되었다. 교황도 로마 유대인을 실어 나르는 기차가 당장 출발하려고 이미 가까운 티부르티나 기차역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 이제 항의 서한을 발표하고 <옵세르바토레 로마노>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미디어에 항의 기사를 싣게 한다.


 1943년 가을, 교황의 충격적인 항의 서한은 1942년 중반의 항의 서한처럼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전반적인 영향력을 가질 것이다. 특히 위험한 지대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 가령 헝가리 유대인들에게 생존의 시회를 훨씬 더 많이 주었을 것이다. 항의 서한이 너무 늦어서 로마 유대인의 출발을 막을 수는 없지만 유대인들은 자신이 노동 수용소로 가는 게 아니라 죽음의 수용소로 간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또한 5일에 걸쳐 아우슈비츠로 가는 동안 여러 번의 도주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1942년과 1943년의본질적인 차이는 총통의 딜레마이다. 총통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항의하는 교황의 운명도 결정된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비오 12세의 옹호자인 교황 바오로 6세는 전시 교황의 항의가 오히려 희생자 수를 더 늘렸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그는 비오 12세 본인도 "물론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바오로 6세는 근거가 미약하지만 오래전부터 알려진 히틀러의 교황 체포 문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체포 계획에 의하면 "교황이 도피하려고 할 때 사살하라"는 조항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빛을 본 문서는 시성 관련 문서 속에 들어 있는데 이탈리아 SS부대 사령관 칼 볼프 장군의 진술서이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히틀러는 교황을 체포해서 독일로 이송하는 상세한 작전을 세우라고 볼프 장군에게 지시했다. 교황이 포로가 된 것은 두 차례 역사적 전례가 있다(14세기와 18세기.) 1943년 7월의 괴벨스처럼, 볼프는 이런 계획을 단념하도록 히틀러를 설득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공로라고 할 것도 없었다. 교황을 체포했을 때의 부작용을 히틀러에게 말해 준 것에 불과했을 테니까 말이다. 교황이 1943년에 공식 항의한다는 대체 역사는 침묵 정책에 비하여 폭발력은 더 있었겠지만, 히틀러가 그 상황에서 어떤 이득을 보았을 것 같지는 않다. 교황이 침묵을 하고 있어야만 계속 침묵을 강요할 수 있었을 텐데, 교황이 먼저 공개 항의로 치고 나왔기 때문에 별 다른 강요 수단이 없었을 것이다. 히틀러가 다소 분노를 가라앉혔다면 1942년 시나리오와 똑같은 입장에 놓이고(학살 규모를 줄이든지 항의를 무시하든지) 결국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분노를 터뜨려서 그리스도의 대리인을 암살하거나 납치한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교황의 목소리는 이제 하늘을 뒤흔든다. 그에 뒤이은 반향은 창세기에 나오는, 하느님이 이집트 파라오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



 역사가 스티븐 앰브로스는 『만약에』 1편에서 이렇게 썼다. 대체 역사는 단일 사건의 변경에 그쳐야지 더 많은 사건들의 변화를 가정하게 되면 "사태는 아주 복잡해지고 대체 역사는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앰브로스 교수가 그렇게 했듯이 우리는 흐릿한 수정 구슬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살표보며 미래를 예측해 보자.


 반유대주의는 나치즘을 결속시킨 접착제였다. 히틀러는 잘 파악하기 어려운 외부의 적이 곧 "국제적 금융 세력인 유대인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으로 독일인의 피해 의식을 자극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1939년, 히틀러는 독일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예언했다. 유대인들이 일찍이 "하이에나의 웃음소리"로 자신의 예언을 비웃었지만, 만약 유대인이 또 다른 세계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면 그때는 유대 민족을 아예 멸종시켜 버리겠다고 말했다. 유대인은 그 누구도 당시나 그 후에나 히틀러를 비웃지 않았지만 그는 전쟁 중에 똑같은 예언을 반복하면서 여전히 유대인의 웃음소리를 환정으로 듣고 있었다.


 만약 교황의 공개 항의로 유대인 말살 계획이 1942년 혹은 1943년에 폭로되었다면, 그것은 세계 대전의 군사적 측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확실히 독일 내의 반체제 세력은 더욱더 공세적으로 저항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런 힘의 모멘트가 있었더라면 반 나치 저항 세력은 이제 노골적으로 나치에게 반기를 들고, 서방과의 유리한 평화 조약을 맺으려고 애쓰면서 그들의 도덕성을 스스로 허물어트리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 나치 저항 세력은 정부 내 고위직까지 확대되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독일군 총사령부에도 반 나치 세력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여사 기록에 따르면, 유대인 멸종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6개월 전에 이미 중단되었다. 그때 부총통 히믈러는 판세가 글렀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죽음의 수용소를 철거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우리의 대체 역사처럼 실제 역사가 전개되었더라면 대량 학살은 물론 전쟁 자체도 일찍 끝났을 것이다. 이런 결과는 틀림없이 역사에 긴 그늘을 그리워 역사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대체역사가 어디에서 끝날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체 역사라는 게임을 상상할 때에는 늘 이런 역사 외곽의 어두컴컴한 불확정성을 가정해야 한다.



출처: 만약에 2, 로버트 카츠 외 24명 저, 이종인 옮김, 세종연구원, 2003년, 415~4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