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이전 남북 모두의 기계공업 발전에 영향을 끼쳤음.

일단 1920년 개소 직후부터 평양5대공장 중 하나로 꼽혔지만, 당시부터 민간 기계공업의 성장에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님.

평양상업회의소의 일본 기업인들은 그렇게 기대를 했던 모양이기는 한데, 조선군개요사에서는 건설초 평양제조소의 산업발전에의 영향을 부정함

하지만 상황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급변하는데, 1937년 즈음부터 일본이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조선에도 본격적인 군수공업을 세움.

이때 일본은 남경성공업지대, 즉 영등포-부평으로 이어지는 축선을 기계공업의 메카로 키우고자 했고 인천부가 여기 적극적으로 호응했음.

그래서 1940년부터 속속들이 들어서고 문을 연 것이 인천육군조병창과 그 인근 각 일본계 대기업들의 기계공장들임.

하지만 이 대공장들이 세워지기 직전, 그러니까 1937년 즈음만 해도 경성부와 인천 일대의 기계공업 발전상은 일천한 수준이라

경성부랑 경기도에서는 지역 내 철공업자들을 모아 평양병기제조소에 견학을 보내서 군수물자 제조법을 배워오게 시켰음.

이후 경인선 라인의 기계공업은 한반도 대부분의 중공업이 38선 북부에 건설된 가운데 유일하게 38선 남부가 메인인 산업으로 자리매김함

물론 평양제조소가 있던 북부 지방 역시 평양철공으로 대표되는 기계공업조합들이 조병창과 제조소의 하청을 받아 성장했음

조선군개요사에서는 이 시기 평양제조소가 조선의 금속가공공업을 좌지우지했다고 평함

그래도 한반도의 기계공업은 미약한 편이었음. 경성만 해도 대부분의 철공업자들은 5인~30인 수준에 불과하였고 평양은 더 적었음.

핵심 공작기술이나 공작기계 부품, 원료 등은 일본에 의존하는 식민지적 공업구조라, 일제 패망 이후에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음

부평의 인천육군조병창 시설은 아예 미군 24군단이 점령한 후 보급기지 캠프마켓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설비를 부쉈고.

남북 양측 모두 기계공업은 6.25로 반쯤 리셋당하고 나서야 미소 양국의 기술적 협조와 함께 제대로 성장하기 시작했음

물론 전쟁 전후로 맥이 완전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냐면 그건 당연히 아니지만


부평사
조선군개요사
한국 근대 공업사
기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처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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