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즈버러의 월터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 1세는 1296년 스코틀랜드 원정을 위해 기병 4400명과 보병 6만 명을 소집했다.

연대기의 병력 계산이 흔히 그러하듯이 터무니없는 수치로 보이지만, 실제로 에드워드는 중기병 1000명과 기병 1만 명과 보병 6만 명에게 지불할 주당 5000파운드의 임금을 조달하라고 재무부에 지시했다.

하지만 이 전역에서 실제로 보병들에게 지급된 임금은 총 21443파운드에 불과했다.

합리적인 추정치는 보병 26000여 명이 실제로 참전했다는 것이다.


이후의 군사원정 사례들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나타난다.

1297-8년 겨울의 군사 소집 영장은 잉글랜드의 9개 카운티와 웨일스, 체스터에서 징병된 보병 29000명이 12월 6일까지 뉴캐슬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물론 이 소집 예정일은 병력수만큼이나 낙관적이었다.

2월 초까지 약 9700명이 도착했고, 중순에는 18500명으로 늘어났다.


탈영은 특히 브리튼섬 내부의 전쟁에서 심각한 문제였다.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군은 탈영으로 끊임없이 출혈을 겪었다.

실제로 탈영은 징집병들이 카운티 집결지를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1300년 8월 요크셔의 한 지역에서 소집된 643명의 병사 중 407명만이 국왕군에 합류했다.

1322년 7월 27일 서식스의 궁수 186명이 노샐러턴에 집결해서 검열을 받았다.전역이 끝날 무렵인 9월 초, 그들의 인원수는 147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다른 잉글랜드 카운티들의 비율도 비슷했다.윌트셔에서 온 401명은 310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웨일스 부대의 손실 비율은 상당히 낮았다.7월 11일 궁수 978명이 빌스를 떠났고,9월 22일 958명이 귀환했다.

7월 15일 앵글시와 북웨일스의 궁수 1931명이 메나이 해협을 건넜고,전역이 끝날 무렵에도 1794명이 급여 대상 명단에 남아 있었다.

웨일스인 탈영병은 잉글랜드인 탈영병보다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오기가 더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남아있는 보병 소집 기록들이 시사하는 바에 의하면,농민들을 효과적인 전투병으로 훈련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소집 대상자들은 20인대장과 100인대장이 지휘하는 20인대와 100인대로 분류되었고, 그들이 가져온 무장이 기록되었다.

1346년 블라이딩 헌드레드에서는 50명 중 2명이 활을 가지고 있었다.10년 후 노리치의 한 소집명부에서는 54명 중 10명이 활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2명이 '궁수'로 지칭되었다.


따라서 지역 공동체는 소집된 병사들이 적절한 장비를 갖추게 하기 위해 상당한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1295년 노퍽주 런디치 헌드레드에서는 187명의 장비 지원과 소집 장소까지 여행 경비로 보조금 50파운드가 징수되었다.1300년 요크셔의 몇몇 마을들에서도 보병 1인당 약 5실링의 비용이 들었다.

에드워드 2세 치세에는 보병의 숫자보다 무장의 질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1인당 1파운드가 넘는 비용이 들었다.1324년 가스코뉴 전쟁에 소집된 보병의 1/3은 사슬갑옷이나 판금갑옷, 그리고 투구와 건틀릿을 갖추었고,에드워드 2세의 말년에는 갑옷으로 완전히 무장한 5100명의 보병을 소집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322년 에든버러까지 진군한 중무장 보병들은 직접 대결을 피하는 스코틀랜드군을 추격할 수 없었고, 에드워드 3세는 이 실패한 실험을 이어가지 않았다.

궁수들이 말을 가져야 한다는 칙령은 군대의 기동성에 혁명을 가져왔다.

도망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쫓아 북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탈진한 병사들의 긴 행군 대열은 더 이상 없었다.

1334년 국왕 가신단에는 500여 명의 승마궁수가 포함돼 있었다.체셔에서도 200명 이상의 승마궁수들이 소집되었고,대귀족들의 수행단으로는 중기병 818명과 승마궁수 771명이 모집되었다.마을들은 국왕군에 소집된 병사들 각자에게 3-40실링 가치의 말을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347년 칼레 포위전에서 승마궁수와 보병궁수의 비율은 1:3이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흑태자의 수행단에는 승마궁수 400명과 보병궁수 300명이 있었다.

1369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재개된 이후 잉글랜드군에는 승마궁수가 보병궁수보다 많았다.

그러나 장미전쟁에서 급하게 소집된 지방 징집병들은 대다수가 보병궁수였다.


에드워드 1세의 치세 초기에는 많은 보병들이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그러나 스코틀랜드 전쟁 무렵에는 거의 모든 보병들이, 특이하게도 궁술의 전설적인 발상지인 셔우드 숲에서 온 무릿매꾼(slinger)들을 제외하고는, 궁수로 묘사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보병들은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그들은 20명의 소대와 100명의 중대로 조직되었지만, 군사작전이 시작되자마자 발생하는 탈영으로 군사 편제는 언제나 빠르게 와해되었다.

비록 지역에서 특별히 임명된 배치위임(commission of array) 징병관들이 병사를 모집했고, 지역 공동체는 모집된 인원을 제대로 무장시킬 의무가 있었지만, 징병관들은 뇌물을 받을 수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가장 쓸모 없는 사회 구성원들을 내보냈다.'가장 힘센 사람은 10실링이나 12실링을 뇌물로 써서 집에 남고,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가난한 인간이 대신 끌려가겠지.'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 2부>의 신병 모집 장면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에드워드 1세의 군대에는 몰디, 섀도, 워트, 피블 같은 병사들이 많이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궁수들은 에드워드 1세 시대의 오합지졸 보병 징집군과는 다른 유형의 군대였다.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등장한 기마궁수들은 중대한 변화를 의미했다.이는 1356년 랭커스터 공작이 보여준 신속한 퇴각에서 증명된 것처럼 잉글랜드군의 기동력이 매우 높아졌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1세 시절과 달리 에드워드 3세 시절 프랑스에서 싸운 군대들은 대개 비슷한 숫자의 중장병(man-at-arms)들과 기마궁수(mounted archer)들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였다.에드워드 3세가 동원한 대규모 야전군은 칼레 공성전에 투입된 32,000명이 유일했다.1359년의 대원정에서도 군대의 규모는 약 12,000명에 불과했다.

군대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대신 장비의 질은 훨씬 더 높아졌다.에드워드 3세의 궁수들 중 상당수는 제복을 갖추었다.아룬델 백작의 부대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제복을 입었다.흑태자의 체셔 궁수들은 녹색과 흰색의 외투와 모자를 과시했다.

무기를 공급하는 일에도 과거보다 많은 노력이 들어갔다.1341년 왕실 정부는 7,700장의 활과 13만 개의 화살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런던탑은 거대한 무기고로 개조되었다.

특히 전쟁의 주요 분기점이었던 1356년의 보급품 수요는 엄청났다.체스터의 회계관은 왕이 왕국의 모든 화살을 가져가 버려서 이제 어디에서도 화살을 구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그래서 흑태자는 체셔에 있는 모든 화살 제작자를 구속하도록 명령했고,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화살을 만들 것을 강요했다.


많은 궁수들이 유력자들의 수행단(retinue)의 형태로 참전했고, 이는 아마도 전통적인 배치위임 징병보다 더 질 좋은 군인들을 모집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1356년 러틀랜드의 위임받은 징병관들은 군인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한 사람은 이전에 흑태자의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입은 부상 때문에 더 이상 싸울 수 없었고, 유일하게 징집할 수 있었던 두 명은 모두 스스로 적절한 무장을 갖출 재력이 없었다.이들이 실패한 이유는 워릭 백작과 다른 여러 유력자들이 카운티의 모든 신체 건강한 장정들을 자신들의 수행원으로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유력자들은 고용계약서(indenture)라고 불리는 서면 계약서를 통해 수행원들을 모집했다.대부분의 수행원은 정기적인 급료와 군마를 잃었을 시의 보상을 약속받으며 앞으로 있을 한 번의 군사작전에 참전하기로 계약했다.종신 고용된 수행원들은 연금과 제복, 그리고 아마도 신발과 말안장을 지급받았을 것이며, 영주의 홀에서 식사를 제공받을 자격을 가지고 평시에도 토너먼트나 의회에서 영주를 수행했다.


궁수들은 이십인대와 백인대로써 이전 시대와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조직되었지만, 에드워드 3세의 야전군의 주력은 웨일스인 징집병 100명과 군종사제 한 명과 통역관 한 명과 기수 한 명과 포고꾼 한 명과 의사 한 명으로 구성된 단위 부대들로 조직되었다.

과거와 달리 탈영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비록 군대가 승선하기 전에 일부 인원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일단 영국해협을 건너기만 하면 탈영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궁수들이 이룩한 전과는 그들이 대부분 고도로 훈련된 정예병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만, 정규적인 훈련이 시행되었다는 증거는 이상할 정도로 나타나지 않는다.장궁을 다루는 기술은 아마도 개인적으로 연습했을 것이다.1363년에 발표된 유명한 포고문은 백성들이 축구, 하키, 닭싸움 같은 가치 없는 활동에 몰두하느라 궁술 연습을 게을리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모든 남성이 휴일마다 궁술 연습을 하도록 명령했다.궁병 부대가 실전에서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부대 전술은 아마도 정규 훈련보다는 프랑스에서의 실전 경험을 통해 습득한 것 같다.


최근의 연구는 잉글랜드군의 전투 기술을 보다 덜 강조하는 대신 행정 조직의 질을 더 강조하고 있다.에드워드 3세의 정부는 군사작전을 계획하는 데 확실히 이전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1296년 에드워드 1세는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숫자인 6만 명의 병력을 뉴캐슬에 집결시키라고 왕실 재무부에 명령했다.이와 대조적으로 1340년대 초,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 원정을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보고서는 국왕 가신단과 대귀족들에 의해 모집될 병력의 수를 자세히 계산하고 있다.총합은 13,500명의 전투 병력과 12,000명의 선원들로, 매우 합리적인 수치였다.

군량 보급을 계산한 또 다른 문서에는 '국왕과 논의하는 것을 잊지 말 것. 모든 함대를 포츠머스에 집결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일부를 다른 항구에 분산하기를 원하는지 묻고 그에 따를 것.' 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그리고 에드워드 3세가 모든 함대를 포츠머스에 집결시키는 계획에 동의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에드워드 3세가 전쟁 준비 과정을 철저히 감독했음을 보여주는 이러한 증거들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프랑스로 파견된 군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잘 준비돼 있었다.기록에 의하면 충분한 양의 편자, 활, 활시위, 화살, 그 밖의 군사 장비들, 그리고 도끼, 낫, 맷돌, 소형 오븐 등의 필수적인 생활 도구가 제공되었다.1359년에는 심지어 군대의 단조로운 식단을 낚시로 보충할 수 있도록 보급 수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가벼운 가죽 보트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병참을 조직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는 과거의 웨일스나 스코틀랜드에서의 전쟁보다 더 간단했다.우선 병력 규모가 더 작았고, 1369년 이전까지는 프랑스 현지에서 충분한 물자를 구할 수 있었으므로 보급품은 원정 시작 전까지 필요한 것만 마련해도 되었다.

1346년 포츠머스에서 에드워드 3세의 군량 수령관은 곡물 4,000쿼터(116만 리터) 정도만을 관리했는데, 이는 에드워드 1세 시절 베릭의 군량 수령관들이 관리한 것보다 훨씬 적은 양이었다.칼레 포위군은 지속적으로 상당한 양의 군량을 공급받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1294-8년 사이의 막대한 병참 수요에 비견될 만한 사례는 에드워드 3세 치세 동안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언제나 인기가 없었던 카운티 셰리프와 부하 관료들의 전통적인 대규모 징발 방식을 상인들과의 계약 시스템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을 제공했다.초기 사례는 1339년 에든버러와 베릭에 물자를 공급하기로 상인들과 계약한 것이었고, 1350년대부터 이러한 제도가 점점 보편화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군대는 잉글랜드 본토에서 일어난 병참 실패에 의해 방해받은 적이 없었다.심각한 문제는 1369년 전쟁이 재개된 이후 프랑스군이 계획적으로 잉글랜드군이 진입한 지역을 황폐화하고 약탈부대를 집요하게 습격함으로써 일어난 현지 보급의 어려움에 의해 발생했다


툴루즈의 세네샬이었던 장 라르슈베크는 세 차례 이어진 가스코뉴 원정에서 복무한 82명의 귀족들을 명부에 올렸다.

이 중 세 번의 원정에 모두 참여한 사람은 11명에 불과했고,15명은 한 번씩만 참전했다.대다수인 56명은 두 번의 군사작전에 참가하는 것으로 자신의 명예와 왕에 대한 의무를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툴루즈 파견군의 전체 규모는 두 번째, 세 번째 원정으로 갈수록 점차 감소했지만, 귀족들 개개인이 복무를 선택한 시기는 상당히 불규칙했다.일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정에, 일부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원정에, 다른 일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원정에 참전했다.

전선에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살고, 많은 임금을 받는 반면에 위험은 적은(가스코뉴 전쟁에서 전투는 거의 없었고 사상자도 매우 적었다) 전쟁에 참전하는 귀족들의 반응이 이러하다면, 더 먼 지역에 살거나 더 치열했던 플랑드르 전쟁에 참전할 귀족 장교들을 찾으면서 프랑스 정부가 직면할 어려움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문제도 있었다.(백년전쟁 때와 달리) 영구적이거나 적어도 정기적으로 복무하는 직업군인 부대가 없다면, 귀족 장교들이 원하는 대로 참전 시기를 정한다면, 군대의 전략은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


서전트(세르장sergent), 즉 보병들은 대부분의 프랑스 군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그들의 지휘체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시 장 라르슈베크의 기록을 참고하면, 적어도 귀족들 중 일부는 보병 수행단을 이끌고 와서 그들을 직접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을 단위로 소집돼서 (일반 보병의 두 배인 일당 2수를 봉급으로 받는) 보병대장(constable)의 지휘를 받는 징집병 부대(company)가 더 많이 언급된다.

이 징집병 부대의 규모는 상당히 클 수 있었다.가스코뉴 지방의 라 레올르에 배치된 수비군 중 하나는 부대 인원수가 150명이나 되었다.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며, 남프랑스에서는 한 부대당 50명이 표준이었던 것 같다.라 레올르의 다른 부대에는 50명이 있었고, 1302년 에그모르트의 수비군이 보강되었을 때 각각 49명, 55명, 45명으로 구성된 3개의 징집병 부대가 있었다.

따라서 보병대장은, 현대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부사관(non-commissioned officer)이었다.부대원들과 함께 지역 위수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들은 주둔지 지휘관의 지휘를 받았다.

하지만 야전 임무에서 사령관과 보병대장 사이에 존재했던 지휘계통은 불명확하다.야전군 궁병대장(master of the archers)은 보병뿐 아니라 기병도 지휘했으며, 궁병대장의 부관인 궁병대장 서기는 급여 담당관이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어떤 군대든 징집군 부대와 보병대장이 너무 많기 때문에 지휘관 한 명이 일일이 직접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예를 들어, 툴루즈 지방은 첫 번째 가스코뉴 원정군에 약 100개의 보병 징집군 부대를 파견했다.

플랑드르 전쟁에 파견된 프랑스군에는 이탈리아인 쇠뇌수들도 있었다.그들은 아마 궁병대장이 직접 지휘했을 것이지만, 혼자서 프랑스군의 모든 보병대를 지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포레 백작의 경우처럼, 보병 지휘를 맡은 기사나 남작들 각자에게 징집군 부대가 몇 개씩 배속되었을 수 있지만, 이는 보병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심각한 약점이 되었을 것이며 실전에서 프랑스 군대가 보인 문제 중 일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보병대와 기병대의 운용이 조화되지 않았고, 지휘관인 아르투아 백작은 기병 돌격을 명령하기 전에 보병들을 철수시키지 않았거나 철수시키지 못했다.같은 문제가 몽장페벨에서도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궁병대장 티보 드 쉐포이가 지휘하는 보병대는 기병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다가 패주했다.


프랑스 왕국의 모든 신체 건강한 성인 남자들은 왕국의 방어를 위해 군복무를 해야 하는 법적인 의무가 있었다.

이것은 필리프 4세의 치세 초기에는 암묵적으로 요구되었고 1300년 이후의 군사 소집령에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었다.

물론 필리프는 모든 신민의 징병을 원하지 않았다.그는 수십만 대군을 기동하거나 보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충분한 돈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고, 대부분의 귀족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일부 귀족들은 전쟁 경험(그리고 봉급)을 원했고, 비록 돈을 내고 군역을 면제받았더라도 지역 공동체들은 여전히 일정한 수의 군대를 모집하거나 유지비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필리프는 특히 가스코뉴에 대규모 수비군을 주둔시키고 플랑드르에 대규모 야전군을 파견해야 했던 시기에 선왕들보다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고, 군대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 위기의 시대에 프랑스 군대의 규모는 얼마나 컸을까?

주요 군사작전 중 어느 것에서도 정확한 수치를 구할 수는 없다.단편적이고 불완전한 화계자료들을 통해서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필리프는 무리해서 3만 명의 야전군을 한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겠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5,000에서 10,000명 규모의 기동부대가 더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지역 주둔군의 경우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병력이 증감되었고, 순수하게 지역 위수임무를 맡고 있는 병력이 몇 명인지 추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휴전 중 어느 시기(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에, 플랑드르의 요충지들에 배치된 수비군의 규모는 매우 작었다. 예를 들어 릴에는 기병 4명과 보병 4명이 있었다.그러나 1303-1304년에는 마콩 지역 하나에서만 징집병 부대 9개, 그리고 위그 드 투와시 휘하의 서전트 100명과 중장병 몇 명을 (총인원 약 300명 이상) 베뒨의 수비군으로 파견했다.


야전군에 대해서는, 1299년 휴전 종료 후 발루아의 샤를이 플랑드르를 침공했을 때 지휘한 기병대의 규모에 대한 거의 완전한 증거가 있다.

기록상으로 전신갑옷을 입은 중장병이 총 1,563명 있었다.

이 수치는 약간 부정확할 것이다.발루아 백작의 수행단 240명 중 일부가 중복해서 집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여 담당관들의 명세서에 의하면, 가스코뉴 전쟁과 마찬가지로, 기사들과 향사들 중 일부는 주둔지에서 잠깐 복무한 후 군사작전의 성공이 확정되자마자 귀향했다.

한편 기 드 생폴 휘하의 중장병들(그의 신분을 고려하면 최소 100명 이상)은 확실히 집계에서 누락되었다.

그러므로 원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즉 발루아가 플랑드르인들을 위압하고 백작령 전체를 점령했을 때, 그는 필리프가 소집한 가장 큰 규모의 야전군 중 하나인 1,650명 이상의 기병들을 지휘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수치를 인정한다면, 군대 전체의 병력수를 구하기 위해 보병을 얼마나 추가해야 할까?

우리는 1304년 마콩의 바이이(bailli)가 리옹의 대주교를 위협하기 위해 소집한 소규모 군대의 정확한 구성을 알고 있다:기사 17명, 중장병 113명, 보병 2188명.대략 기병1 : 보병17 정도의 비율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작 며칠 동안 지속된 사소한 충돌이었으며, 지역의 중장병들 중 일부는 플랑드르 전쟁에서 복무하고 있느라 소집에 응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툴루즈의 세네샬 장 라르슈베크의 기록에서는 보병의 비율이 훨씬 더 높다.장은 '귀족'들만 집계했으며, 따라서 많은 수의 중장병들이 누락되었을 수 있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차이가 명확하다:첫 번째 가스코뉴 원정에는 징집군 부대 100개가 참전했고, 두 번째 원정에는 59개, 세 번째 원정에는 44개였다.반면에 귀족들은 총 82명이 참전했다.징집군 부대의 평균 인원수가 위에서 말한 50명보다 적고, 귀족들이 각자 여러 명의 중장병을 수행원으로 데려왔다고 가정해도 마콩의 소집군(1:17)보다 낮은 비율로 끌어내리기는 어렵다.마콩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스코뉴 전쟁에서도 전투는 거의 없었고, 일당 1수를 받는 징집군 보병들은 일당 10수를 받는 기사들보다 훨씬 값싸면서 소도시나 마을의 위수임무를 맡기기에 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잉글랜드의 해안을 급습하기 위한 베네데토 자카리아 제독의 함대는 다른 비율을 보여준다.그는 4,800명의 무장한 선원들과 16척의 배와 4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제안했다.이 함대는 기사 400명과 중장병 400명을 수송할 예정이었다.여기서 해병과 기병의 비율은 6:1이 된다.

실제 해안 습격 상황에서는 수병들 중 일부가 배에 남아있어야 하므로 비율은 더 낮아질 것이다.

물론 제독은 정복이 아닌 급습을 계획하고 있었고, 너무 많은 보병은 작전에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5,000명이 조금 넘는 병력으로 잉글랜드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흥미롭다.


1304년 랑그독에서 중장병 2,016명과 보병 17,850명이 소집되었다.여기서도 보병들의 느린 행군 속도를 이유로 상대적으로 낮은 보병 비율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필리프는 군대를 집결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아라스에서의 집결 일자를 5월 19일에서 7월 22일로 연기해야 했다.그는 굼뜨게 움직이는 보병들을 기다릴 수 없었다.



===


봉건제로 기사들이 자기 영지에서 농노 끌고 온다느니 하는, 19세기 군사사학에서 업데이트 안 된 유튜브나 기타 헛소리들은 잊으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