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내내 뿌옇기만 하던 하늘은 아침이 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올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 눈을 쏟아내듯 흩뿌리기 시작했다. 금새 갈색 천지였던 산자락이 발디딜 틈 없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그러나 눈이 세상 모든 가려버린 건 아니다. 눈꺼풀을 치껴뜨고 자세히 내려보고 있노라면 드문 드문 눈에 가리지 않는 장소들이 눈에 보였다. 언덕 사이로 드문 드문 고개를 내민 길다란 포신이 그곳들이 포병 부대의 주둔지라는 걸 말해주었다.
마침 눈송이들이 포신 위에 다닥다닥 떨어져내리자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포신위에서 곡선을 따라 한방울 툭, 물망울이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철원의 겨울을 가득 담은 눈발은 손끝만 닿아도 뼈속까지 파고들 요량에 차갑기만 한데 포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나 보다.
자주포안에선 일번포수의 육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스무발!\"
벌써 첫 사격으로 스무발. 평소대로 였다면 어느정도 힘든 티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발수다. 그러나 일번 포수는 땀을 뻘뻘 훌리면서도 거침없이 스물 한번째 장전기를 밀어올렸다. 실사격의 긴장과 공포에 절어 피로같은 건 느낄새도 없는 것 같았다. 어깨 위로 땀이 수증기가 되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달캉. 장전기가 폐쇄기에 맞물리는 쇳소리가 부셔졌지 않나 걱정 될 정도로 요란하게 화포 안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린 포반장이 아무 의미없이 바라보고 있던 fdu에서 시선을 땠다. 그제야 초점을 잃고있던 두 눈에 자주포 내부의 상황이 비쳐들었다.
\'내가 이제껏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는 손을 들어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훔쳤다. 자신이 언제 부터 정신을 놓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첫 발 사격조차 어땠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적 공격 경보를 듣고 포상을 점령했던 그 순간에 이미 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포반장의 얼굴이 열을 받아 발개졌다.
포반원들도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자신은 뭐란 말인가!
실제 상황에서도 제 할 일 해주고 있는 포반원들이 대견스럽다는 맘보단 자신에대한 부끄러움이 앞섰다. 이건 뭐 포반장인 자신이 없었더라도 별 문제없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성은 크게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책만 하고 있기에는 상황이 아직 아니었다. 주위론 적의 포격이 떨어지며 생기는 진동과 포음이 자주포를 뒤흔들고 fdu에선 사격제원들이 번쩍거리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어떻게든 제 할일을 해야했다.
첫 목표는 일번 포수였다. 달달 떨리는 엔진소리 사이로 포반장의 육성이 터져나왔다.
\"야이 개새끼야. 내가 평소에 장전기 그따구로 결합하라고 가르쳤어! 적 공격도 아니고 니 지랄때문에 수동 장전하게 생겼으면 아주 볼만하겠다?\"
\"아닙니다!\"
결합된 장전기 위에 포탄을 내려놓으며 1번 포수가 소리쳤다.
\"무슨 탄인진 보고안해?\"
\"고폭탄! 장전!\"
1번 포수의 얼굴 위로 여태 조용하다 갑자기 왜 난리지 하는 간정이 잠깐 스쳐지나갔지만 그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풍경이 원래 포반장 성격이라 익숙하기도 했다. 까칠 그 자체. 비사격때도 그 난리인데 실사격땐 왜 입을 다물고 있었나 싶었다. 욱하는 감정이 없는건 아니지만 어쩔건가 포반장이 까라면 병사가 까야지. 평소대로 한 귀로 흘리면서 할일이나 하면 됬다.
\"장약 7호 적색 확인!\"
\"확인. 잘하자.\"
툭, 끊어내듯 말을 마친 포반장이 이번엔 고개를 돌려 옆에 서서 전륜기를 만지작대는 부사수를 돌아보았다.
\"파워팩 쓰는데도 사각 올리는 속도가 그따구면 사격은 언제할거야!\"
\"죄송합니다!\"
포반장의 잔소리가 사격에 도움이 됬는지 안됬는진 모르겠지만 그 사이에도 포반의 사격 준비는 차근 차근 이어졌다.
금새 닫혀진 폐쇄기 장전뭉치 안으로 손가락이 뇌관을 쑤셔놓고 방아쇠엔 방아끈이 내걸렸다.
1번 포수가 주퇴방향에서 물러나며 방아끈 끝 부분을 단단히 잡아 쥐었다.
\"1번 포수 사격준비 끝!\"
\"부사수 사격 준비끝!\"
\"사수 사격 준비 끝!\"
자기 할 일을 마친 포반원들의 시선이 모두 포반장 한 사람에게 꽂혔다.
\"준비!\"
사이의 침묵 속에서 방아쇠와 1번 포수 사이의 방아끈이 좀만 더 힘을 줘도 끊어질 듯 팽팽해진다.
\"쏴!\"
딸칵. 방아쇠가 당겨지며 튕겨나간 공이가 뇌관의 똥꼬를 후려쳤다. 충격에 뇌관이 터지고 그 불길이 장약에 옮겨붙는건 순식간이었다. 이내 포신 전체가 모든걸 익어버릴 화염으로 가득차오른다. 그 불꽃이 한계까지 치달은 순간, 포탄이 강선을 빙글빙글 돌며 제퇴가 밖으로 화염과 함께 솟구쳤다.
휘몰아치는 흙먼지들 사이에서 눈을 게슴츠래 하게 뜬 1번 포수가 본 건 폐쇄기가 주퇴 운동에 자기를 향해 주저 앉는 모습이었다. 벌써 수십번이였건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풍경에 1번 포수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여기서 갑자기 더 내려오면 어떻하지? 저 끝이 자기 가슴까지 달라붙는건 아닐까?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오만가지 상상이 1번 포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었다. 가슴 한뼘 높이에서 거짓말처럼 멈추어선 폐쇄기는 내려왔던 속도 그대로 다시 위로 올라간 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제자리에 멈춰서서는 뜨듯하게 달아오른 자기의 문을 열어젖혔다.
덩달아 구멍을 따라 흘러내린 뇌관 탄피가 바닥을 구르다 화포 구석 어딘가로 굴러 흘러들어갔다. 그 위로 우수수 힘을 잃은 흙먼지들이 포반원들의 방탄 위로 떨어져내렸다.
\"스물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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