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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1592년
◦ 5월 2일. 경상도 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곧장 순천부터 남해로까지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 수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용,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등등 등 이 왜적의 소문을 한번 듣고는 벌써 도망치고, 온갖 군기 등 수만 물건도 모두 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 5월 3일. 방답의 첨사가 진을 치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가 온다고 좋아 했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크게 실망했다.

◦ 5월 29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아 혼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서 곧장 노량에 도착했다.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서 경상 우수사(원균)와 만났다.

-  1593년
◦ 2월 8일. 아침에 영남 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전라 우수사의 기약 늦어진 잘못을 몹시 탓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노라고 하였다. 나는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 안으로는 당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들어오므로 세 진영의 제장들이 기뻐 마지 않는 이가 없었다.

◦ 2월 22일. (중략) 곧이어 전도(傳導) 선전(宣傳)이 또 적에게 둘러싸여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출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끝까지 돕지 않아 분통터내지 않았으니 그 해괴없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이 까닭에 경상 수사에게 따져 물었지만 가히 한탄스럽다. 오늘 통분한 것은 무슨 말로 다하랴. 모두 경상 수사 때문이다.

◦ 2월 23일. 원 수사가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 2월 28일. 흉패함 아래쪽 녹사라망으로 정하는데 우부장(김득룡)이 연고를 알려오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가서 잡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 수사 군관의 배와 거제 첨사(안용란)의 사후선(척후선) 등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면서 왜도조차 수상적으로 묶어쳐 원 수사에게 보냈던 바, 수사가 크게 성을 내는 것은 그 본의가 군관을 보내어 고기 잡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오는 데 있었던 까닭이다.

◦ 3월 2일. 맑다. 종일 비가 왔다. 배 뜸창 밑에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에 가슴이 차올라 들어 위로가 어지럽다. 이영남,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 원 수사의 비리(非理)를 들으니 한탄스럽다

◦ 5월 8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출항하여 사량 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단호 어사결이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칠천도(남해군 칠천도)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한다.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와서 보고 수사 원균의 망령된 짓의 일들을 자세히 말하다.

◦ 5월 14일. 선전관 박진종(朴震宗)과 선전관 영산령(寧山令) 복윤(福胤)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같이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이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내가 우수사의 배로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리저리 술을 두어 순배 나누고 있을 때 영남 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렸는데 배 안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속이고 망령됨은 말할 길이 없다.

◦ 5월 15일. 아침에 낙안 군수 신호가 와서 보았다. 윤동구(尹東耈)가 그 대장의 길게 효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 고약스러움은 말할 길이 없다.

◦ 5월 21일. 원 수사가 허위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소동케 하였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고약스러움을 말할 길이 없다.

◦ 5월 27일. 영남 우병사 최경회께 답장이 왔는데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뒤박고 있다니, 매우 가소롭다.

◦ 5월 30일.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취하였으나 병사(兵使)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였더니 공문을 인정하지 않는 심한 언사로 무리한 말만 많이 하니 우스웠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궁(火弓) 무기인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해서 쓰려고 하다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남해 기효근이 배를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는 남의 알아볼까 두려워하니 가소롭다. 이 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고도 예쁜 색시를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 수사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하랴.

◦ 6월 10일. (전략) 축시(새벽 2시)에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가 (적을) 치자'고 하였다. 그의 시기(猜忌)와 흉모(凶謀)는 참견할 길이 없다. 이달 반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 6월 11일. 아침에 적을 토벌할 일로 공문을 만들어 영남 수사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하여 인사불성이라고 하였다.

◦ 7월 21일. 경상 우수사와 청 수사가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의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 말할 수 없는 흉계이다. 이러하고서 일을 같이 한다면 뜻걱정이 없을까?

◦ 7월 28일. 사도 첨사가 왜병들을 타 잡은 보자기 10명이 왜복으로 변장해 입고서 자는 것인지 수상하다고 하므로 자세히 추궁했더니 경상 수사가 시킨 일이라고 하였다. 흑장(발바닥을 때림) 10대만 때리고 놓아주었다.

◦ 8월 2일. 어두워질 무렵에 우수사가 배에 와서 전하기를 "원 수사가 적중한 말을 하여 나에 대하여 몹시 못된 말을 많이 하더라"고 하였다. 모두 망령된 짓이다. 무슨 상관이 있으랴.

◦ 8월 6일. 저녁에 원 수사가 왔다. 이경수, 정경, 두 수사도 와서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의 주정에는 자주 모순이 생긴다. 한심한 일이다.

◦ 8월 7일. 저녁에 경상 수사의 군관 박지운(朴智雲)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였으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시 헛된 전하기를 잘하니 믿을 수가 없다.

◦ 8월 26일. 원 수사가 왔다. 말과 뜻에 우수사, 절 수사도 모두 모였다. 운달(雲達)이 오므로 탁주례를 대접했는데 원 수사는 술을 먹겠다고 억지로 조르고 주정이나 잔뜩 취해서 망발을 하는 짓거렸다. 우습도다.

◦ 8월 30일. 원 수사가 와서 합동(合同)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어 보내고 다만 7척, 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쓰고 일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

-  1594년
◦ 2월 11일. 식후에 활터로 올라가니 경상수사와 우수사 조방장도 왔는데 같이 술에 취해 있었다.

◦ 8월 17일. 원수(권율)가 모청에 숙정제 이름의 곤장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곤장의 말을 듣고 원수가 머물고 있는 숙정헌장이 맞아주는 곳으로 나아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 간의 배를 바치고, 그대로 함께 이야기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듯하다. (권율이) 원균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허리를 꺾지 못하였다. 우습다.

◦ 8월 18일. 식사를 한 뒤에 원수가 탑아루로 나아가 이야기했다. 또 주통한 술잔치를 벌였는데 잔뜩 취해서 이윽고 물러왔다. 경상수사 원균은 취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 오지 않았다.
◦ 10월 11일. 이속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 수사의 속이고 투고하는 일들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다.

-  1595년
◦ 2월 27일. 원균의 포구에서 수사 배상(裵相)과 교대하려고 여기에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려고 했더니 술방석는 말이 멀더라고 한다. 두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고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

-  1597년
◦ 4월 27일. 일찍 떠나 솔치 밑에 이르니 (중략) 저녁에 보성에 와서 묵었다. 칠사춘(漆泗春)도 와서 원균의 망령된 짓을 많이 말하였다.

◦ 4월 30일. (전략) 병사 이복남이 식전에 와서 보며 원균의 일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 5월 2일. 진홍국(陳興國)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뿌리면서 원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 5월 5일.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에서 와서 원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도(道)와 진(陣)에 속한 장졸의 원통함이 모두 다 (원균을) 배반하기로 뜻으로 할지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 5월 6일. (전략) 영의정이 한산에서 돌아와서 흉측한 자(원균)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부원사가 여수로 나와서 병조로 조치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 5월 7일. (전략) 송대기, 유황장이 와서 보았다. 서산 군수 안골(安骨)도 한산에 와서 흉측한 자(원균)의 일을 많이 전하였다.

◦ 5월 8일. (전략) 이경신(李敬信)이 한산에서 와서 원흉(元凶)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가 데리고 온 서리(書吏)에게 억지로 가서 육지방 씨오리대 내보내 놓고는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 여자가 악을 쓰며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함을 질렀다고 하였다. (중략) 원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 탓인가. 그가 바치는 뇌물 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달아 잇고 있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고 있으니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 5월 11일. 맑다. 전 경상 현감 강위(姜渭)이 체찰사의 군관을 데리고 삼대 구렁 밑으로 촌산에 왔다가 와서 보았다.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그 소문이란 모두 흉측한 자의 일이다. (후략)

◦ 5월 13일. (전략) 지난 밤 부사가 말하기를 "체찰사가 보낸 편지에 원균(원균)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하더라"고 하였다. (후략)

◦ 5월 28일. 늦게 출발하여 아침(阿深)에 이르니 현감이 시골 단나에게 한 것을 반가워하면서 심만리 병사(兵使)로 맞이들에 간절한 정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원이 미친 짓을 많이 한다고 말하였다.

◦ 6월 19일. 새벽같이 세 번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진에 이르니 원수와 왕 종사관이 나와 앉아 있었다. 원수가 내게 희본의 일을 말하기를 "통제사의 일은 그 흉측함을 다 말할 수가 없다. 한결같이 거짓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그게 무슨 심보인가. 정말 칠천서 나가지 않으려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서장으로 가서 독촉하겠다"는 것이었다. (후략)

◦ 6월 17일. (중략) 희야와 여러 장수 중 다수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과, 통제사가 장수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는 상황으로 볼때 일이 잘못될 것을 알 수 있다.

◦ 7월 7일. 오늘 칠석(七夕)을 맞으니 슬프고 그리움을 이루 다 말하랴. 꿈에 원균과 만났다. 내가 원균의 잠자리에 앉아 밥상을 받는데 원균이 기쁜 기색을 띠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백방남(白芳南)이 한산도로부터 왔는데 그 주장이 심복과 과오로 죄를 받기 위해 원수에게 붙들려갔다고 하였다.

◦ 7월 18일. 맑다. 덥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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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사헌부가 아뢰기를, “원균은 사람됨이 범람하고 게다가 탐욕스럽고 포악하기까지 합니다.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는 자가 많고 앓다가 죽는 이도 또한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충청도)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기용치 마시옵소서.”
선조 "원균의 사람됨은 범람하지 않다. 이런 시기에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선조실록 1595년 8월 15일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99권, 선조 31년 4월 2일 병진 2/6 기사선조실록 권82 선조 29월 기해(1596년 11월 9일)기사

. 윤근수가 상소를 올린 회의에서 선조가 "원균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으니 류성룡은 "원균은 용감히 싸우는 것은 장점이나 지친 군졸을 위로하는 법을 모릅니다.

이런 일을 할 줄 아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원균을 제하고 그를) 써야 합니다"라고 했고 정탁은 "수전이 그의 장기이니 이제 그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류성룡이 "원균이 힘껏 싸운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나 영남의 수군 중에는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가 많으니 원균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어 이원익이 "올라온 뒤에 들으니 원균이 이순신에게 분한 말을 매우 많이 하였다 합니다. 이순신은 결코 한산도에서 옮길 수 없으니 옮기면 일마다 틀어질 것입니다"라고 전하자 선조는 "원군을 청해 수전한 것은 원균에게 공이 많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라 하며 이의 공이 원균보다 나으나 공을 이룬 것은 실로 원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원익이 "원균은 당초 많이 패하였으나 이순신만은 패하지 않았고 공이 있었으므로 다투는 시초가 여기서 일어납니다."라고 했다.사헌부가 원균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연달아 아뢰니, 상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선조 1595년 8월 16일
사헌부가 원균의 일을 연달아 아뢰고, 또 아뢰기를,
선조: 원균의 일은 따를 수 없다.
선조 1595년 8월 17일
사헌부가 원균·이여온의 일로 계속 아뢰니, 답하였다.
선조: 오늘날의 장수로서는 원균이 으뜸이다.
선조 1595년 8월 18일
원균을 추고하고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없애소서.
선조: 병사는 추고할 수 없다. 칭호를 없애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선조 1596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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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식사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마리 ~ 4마리씩을 먹으며 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한다.


원균이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고 임금을 버린 놈이라며 꾸짖음을 당했다.


그외


원균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사졸에 앞장서서 일거에 섬멸하려 합니다. 조선의 위무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 있습니다.
원하건데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쉬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선조실록》1597년 1월 22일.

권율은 원균이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昆陽)으로 불렀다. 11일에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자 원균이 명령을 받고 이르렀다. 권율이 곤장을 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 하고 곧 도로 보내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留防)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난중잡록》


원균은 물러나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권율이 고성(固城)에 있다가 원균이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며 격서를 보내 원균을 불러와서 곤장을 치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독촉했다. 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오자 더욱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웠는데 여러 장수들이 원균을 보고 군사일을 의논하고자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그날 깊은 밤 왜선이 습격해오니 군이 크게 무너졌다. 원균은 달아나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해안에 올랐다.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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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중에 원균빠가 있나... 삭제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