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평양이 고향인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5년째 안보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박윤재 씨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한마디에는 북한 체제 속의 삶과 탈출, 그리고 새로운 출발까지 이어진 그의 시간이 담겨 있다.


▶ 흔들린 충성심


박 씨는 평양건설건재대학(현 평양건축종합대학)을 졸업하고, 김정은 정권 출범과 함께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평양에서는 대대적으로 거리 건설을 추진했으며, 박 씨는 창전거리 조성, 조선혁명박물관 증축 공사 등에 참여했다.


밖에서 보면 건설업의 전성기처럼 보였지만, 내부 사정은 달랐다. 월급은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채 노동 강도만 높았고, 아무리 집을 많이 지어도 내 집은 없었다. 박 씨는 결국 해외 파견을 지원했다. 물론 해외 근무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신분과 경제적 여건이 필요했다. 파견을 나가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고, 2014년되어서야 비로소 러시아로 떠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탈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충성심이 강했던 박 씨는 한국 드리마와 노래는 물론, 관련된 생각 자체도 범죄라고 여겼다. 그러나 러시아 현지인들이 북한 고위층들도 못 누리는 생활을 누리는 모습을 보면서 회의감이 점차 쌓이기 시작했다.


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 내부에서는 오히려 ‘통일에 기대를 갖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씨 3대'를 다 겪은 박 씨는, 결국 지도자가 바뀌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순간 ‘3대 세습’이 확 와닿았다. 그때부터 박 씨의 생각은 달라졌다. “부모 세대의 고생이 나에게 이어졌고, 다시 자식한테도 대물림될 수 있다는 현실이 그려졌습니다.”


▶ 모스크바에서의 탈출


탈북을 고민하기 시작한 박 씨는 미디어를 통해 한국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가장 놀랐던 건 탈북민의 숫자였다. 3만 명 정도가 가서 살고 있으면 살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일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여력만 되면 자녀들을 마음껏 유학 보낼 수 있다는 얘기가 솔깃했다. 고민 끝에 박 씨는 결국 다른 삶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그 삶이 자식에게 더 나은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면 목숨 걸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설득하기 위해 휴가를 신청하고 함께 탈북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당시 유엔 대북제재로 북한 해외 노동자 철수가 진행되면서 감시는 더욱 강화됐다. 책임자였던 박 씨가 하루에 10차례 인원 보고를 할 정도였다. 휴가마저 기각되자 탈북을 포기하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북한에 돌아가서 살 자신이 없었다. 1년 가까이 혼자 고민하고 씨름했다.


2019년 말에 철수를 앞두고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탈출할 수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자 행동에 나섰다. 어느 날 일을 마친 뒤 모스크바에 있는 한국 대사관을 찾았다. 대사관 문은 이미 닫혔고, 러시아 경비는 다음 날에 다시 오라고 했다. 박 씨는 사람 많은 기차역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다시 찾은 대사관에서 귀순 의사를 밝혔지만, 예상과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담당 직원이 당황했는지 ‘탈북민 문제는 관여할 수 없다’며 나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답을 얻지 못하자 그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거 같았지만, 끌려나가면 시선이 집중될 것 같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대사관을 벗어난 그는 다시 일터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이왕 내딛은 걸음을 끝까지 가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기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유엔난민기구를 찾아갔다. 이후 절차를 거쳐 유엔의 보호를 받게 됐고, 다시 한국 대사관 인터뷰를 진행한 뒤, 제3국을 경유해 한국 입국에 성공했다.


출처 : SPN 서울평양뉴스(https://www.sp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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