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부터 6월 11일까지 영국과 프랑스 공군은 전투 중 약 1,850대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그중 약 950대는 프랑스 측의 손실이었다. 반면 독일 공군의 손실은 약 1,100대였다. 이 수치는 승자가 독일 공군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조차도 연합군 공군이 당한 패배의 실제 규모를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연합군의 철저하고 처참한 패배를 면하게 해주었더라면, 이토록 막대한 항공기의 손실은 설령 그보다 더욱 큰 손실이었다 할지라도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이었다.
프랑스가 직면한 문제의 대부분은 정치와 군사를 막론한 모든 층위에서 '장거리 폭격'이라는 관념이 사고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폭격기가 프랑스 도시들에 가하는 위협은 과대평가된 반면, 전장에서 폭격기가 거둘 수 있는 성과는 과소평가되었다. 장거리 폭격기에 대한 편집증적인 공포는 사실 제1차세계대전은 커녕 항공기가 최초로 등장했을 때 나타난 것이다.
1914년부터 1918년 사이에는 전선의 급박한 요구가 이러한 관념이 군사적 사고를 장악하는 것을 막았으나, 평화로운 시기가 오자 그 이론과 공포가 다시금 만연해졌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폭격이 자국에 신속하고 완전한 패배와 파멸을 안겨줄 것이라고 상정했다.
폭격기가 단독으로 미래전의 승패를 결정지을 것이라는 이론은, 당대의 가장 급진적인 군사이론이었다. 독일군은 1차대전 프랑스군을 모방하여 말이 수행하던 역할을 내연기관으로 대체했을 뿐, 기존 교리를 유지했다. 반면 줄리오 두헤의 두헤주의는 지상군이 불필요해지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상정했다.
이러한 이론들이 민주주의 국가(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특히 강력하게 뿌리내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전략폭격에 대한 대중의 불안감이 정치적으로 유효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론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전체주의 국가(독일, 소련, 이탈리아, 일본)에서는 공군력을 보다 실용적인 군사적 용도로 활용하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프랑스는 흔히 제1차세계대전의 무기와 사상으로 제2차세계대전을 치르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적어도 공중전에 관한 한 1940년의 프랑스군에 정말 필요했던 것은 오히려 1918년의 프랑스 육군 항공대였다. 제1차세계대전은 항공정찰의 가치와 더불어, 정찰기 부대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강력한 전투기 부대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프랑스군의 비행사단은 공군력이 유연한 방어 및 공격 무기로서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증명했다.
그러나 1940년의 프랑스는 전투기가 부족했고 프랑스군엔 비행사단에 해당하는 조직이 없었다. 프랑스군은 자신들이 22년 전에 만들었던 비행사단과 흡사한 조직을 독일 공군이 전장에 투입하자 심한 혼란에 빠졌다. 프랑스군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발전시킨 근접항공지원을 계승하는 대신, 프랑스는 장거리 억제력을 갖춘 폭격기 부대를 육성하는 데만 몰두했다. 폭격기가 얼마나 빠르고 멀리 가는지, 그리고 몇 톤의 항폭을 실을 수 있는지가 프랑스 공군력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실제 전쟁이 터졌을 때 결정적인 승부처가 된 기체는 독일 폭격기 중 가장 느리고 항속거리와 적재량도 가장 적었던 Ju 87(슈투카)이었다.
프랑스 육군은 장거리 폭격기가 전쟁의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승패가 여전히 전장에서 결정될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두헤의 공중전 이론이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추진된 탓에 육군이 전략 및 전술을 불문한 모든 형태의 폭격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지상군을 직접 지원하는 전장폭격은 장군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 근접항공지원은 지상군이 포병 화력을 기다릴 필요가 없음을 의미했다. 결국 프랑스는 자신들이 가능하다고 믿은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격하는 독일군과 싸우게 되었다. 이러한 작전 템포 관념의 차이는 폭격이 가한 실제 물리적 피해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해서 장거리 폭격기 부대를 육성한 것 자체가 실책은 아니었다. 그것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지는 못했을지언정, 평시에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에게는 강력한 폭격기 부대가 제공하는 안보적 확신이 필요했다. 국가 간의 협상력이 보유한 폭격기의 수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외교 정책 또한 폭격기에 의해 형상화되었다. 강력한 폭격기 부대가 지닌 가치는 라인란트와 주데텐란트 위기 당시 충분히 입증되었다. 히틀러는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당시 공군 장교들과 정치인들은 장거리 폭격기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무기가 아니며, 그 가치가 군사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고 심리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인이 평시에 필요로 하는 것과 군인이 전시에 필요로 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독일 폭격기 부대와 격차를 좁히려는 시도는 단거리 전술폭격기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전략폭격기에 지나치게 많은 노력을 쏟게 만들었다. 정작 전쟁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에 필요한 것은 전술폭격기였다. 또한 전술폭격기는 제작하기도 훨씬 수월했다. LeO 451은 프랑스 폭격기 중 효율성이 가장 떨어지면서 손실률은 가장 높았을 뿐만 아니라, 제작에 훨씬 더 많은 자원을 사용했다.
육군과 공군 사이의 신뢰 부족 또한 중대한 문제였다. 전술적 수준에서도, 육군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부터 항공대가 육군의 요구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길을 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양차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공군이 독립적인 전략 공중전에 집중하자 이러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공군이 독립성을 강화할수록 육군이 보내는 신뢰는 떨어졌다. 육군이 공군을 불신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심지어 5월과 6월 전역 중에도 다스티에는 육군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항공 작전을 운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육군 입장에서 중앙집중식 통제란 곧 공군의 통제를 의미했다. 장군들은 항공지원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비행부대를 지상군에 예속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비록 이러한 방식은 공군력이 절실한 곳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듦에도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육군은 전술폭격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폭격기 부대의 통제권은 중앙집중화되었다.
그러나 전투기 부대는 야전군에 귀속되었고, 이로 인해 가용 자원이 전선 전역으로 얇게 분산되었다. 또한 독일의 폭격으로 프랑스의 도시와 산업 시설이 초토화될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전투기들은 후방의 목표물까지 방어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전투기 자원은 전선을 따라, 그리고 후방 깊숙한 곳까지 양갈래로 흩어졌다. 설령 1940년 당시 프랑스 전투기 부대가 질적인 면에서 독일 전투기 부대와 대등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분산 배치 방식 때문에 수적 열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국지적 공중 우세를 확보하지 못한 결과, 프랑스가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어 구축한 방대한 정찰기 부대가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이 정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 자체는 매우 옳았으나, 정찰기 규모를 줄이고 이를 보호할 전투기를 확충했더라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대형 다좌 다목적 항공기에 대한 프랑스의 집착은 특히 불운한 결과를 초래했다. 프랑스는 Do 17 세대 폭격기 설계 흐름을 완전히 놓쳤고, 그 결과 주간작전에 투입할 만한 폭격기 세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심지어 1940년 중에도, 구시대의 산물인 다좌 전투기가 이들을 대체할 계획이었던 신형 폭격기들과 거의 대등한 출격 횟수를 기록했다. 더욱 중대한 점은, 포탑을 주렁주렁 매단 폭격기에 예상되는 저속비행 때문에 전투기에 요구되는 속도 기준마저 낮아졌다는 사실이다. 1934년 다목적기 계획은 폐기되었으나, 프랑스의 전투기 성능은 다른 국가들이 달성하고 있던 수준과 멀어진지 오래였다.
프랑스의 재무장은 독일보다 훨씬 늦었으나, 치명적으로 늦은 수준은 아니었다. 진짜 실책은 프랑스가 생산하기로 결정한 기종들에 있었다. 1940년 공중전에서 영국 공군과 독일 공군은 주로 1930년대 초반에 구상한 기체나 그 개량형으로 싸웠다. 프랑스의 경우 아미오 340, M.S.406, 포테즈 63, 그리고 뮈로 113가 이에 해당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 기체들로는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고, 모든 신뢰를 차세대 기종에만 걸었다.
이는 불필요한 도박이었다. 임시방편이었던 포테즈 633은 도르니에 17과 같은 폭격기에 대응하기에 충분한 성능이었고, 뮈로 117 역시 독일 공군이 성공적으로 운용한 Hs 126에 비해 딱히 구식이라 할 면이 없었다. M.S.406은 개량형도 Bf 109를 압도할 수는 없었겠지만, 충분히 맞상대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 기종들은 프랑스가 1940년 전역에 맞춰 충분한 수량을 제때 생산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안들이었다.
평화로운 시기엔 최신 설계를 기다릴 이유가 있었으나, 일단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1936년 세대에 계속 의존한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 되었다. D.520과 MB.174는 1940년 중반부터 점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훌륭한 기체들이었다. 마틴 167과 DB-7은 영국 공군에서 매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이 기종들 모두 1940년 봄 전역에 어느 정도 기여할 역량은 있었으나, 전적으로 이들에게 의지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신형 기체는 초기엔 예외 없이 기술적 문제를 겪는 법이며, 조종사가 기체에 숙달되기까지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D.520은 H75보다 낮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는 H75 조종사들이 이미 자기 전투기의 성능을 최고로 끌어내는 법을 익힌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M.S.406이 단계적으로 퇴출되면서 전투기 생산량이 급감했다. 제작이 용이했던 포테즈 633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방안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구세대와 신세대 중 어느 쪽의 전투기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채 두 마리 토끼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1940년 당시 가용한 자원만으로도 프랑스는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길고 짧은 건 결국 대봐야 아는 법이다. 지상전의 경우, 스당 돌파를 허용한 이후에도 프랑스군에게는 상황을 복구할 기회가 있었다. 심각한 사태에 처했음이 명백해지자 다급함은 넘쳐났으나, 재치 있는 수완이나 임기응변은 없었다. 1918년 7월 15일 당시 전투 상황은 스당이 돌파된 당시와 비슷했다. 이러한 위기에서 본능이 교범 위에 있었다. 전투기와 정찰기, 폭격기가 교범에 상관없이 지상공격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1940년에 모든 일이 교범대로만 처리되었다. 크고 육중한 다좌 항공기와 수상 폭격기를 주간작전에 투입하는 무모한 도박이 자행되었다. 구식 장거리 폭격기를 작전에 동원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면서도, 정작 더 작고 기동성이 좋은 전투기나 정찰기를 지상공격에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
1940년 전역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Hs 123이나 포커 C.V 같은 구식 복엽기조차 지상공격임무에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는 것이다. 프랑스군의 항공기 운용 방식은 그 기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설계되었는가'에 의해 결정되었다. 프랑스군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가용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1934년 전투기들을 거부하게 만든 최첨단에 대한 미련이 그들의 눈을 가렸다. 결국 그들은 오래된 장비가 전투에 기여할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광기 어린 분주함과 무기력한 방관의 기묘한 대조는 위기에 직면한 프랑스군이 보여준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후방에서 대공 비행중대가 창설되고 단 며칠 만에 기종 전환이 이루어지는 급박한 조치가 있었던 동시에, 다른 곳에서 숙련된 외국인 및 프랑스 조종사들이 기체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육군과 공군 지휘관들은 총력전을 외쳤으나,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조차 일부 부대들은 투입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 역시 전역 내내 다른 연합군이나 적군 공군에 비해 출격률이 저조했다. 다스티에 장군은 통제되고 정제된 방식으로 비행부대를 운용하는 데 지나치게 집착했다. 이 방식은 어떤 면에선 지나치게 신중했다. 그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훨씬 급진적인 접근법이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용 기체들을 반드시 '올바른 방식'으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모든 전투기의 운용 방식은 평시의 관행이나 교범, 혹은 기체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마땅한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상황과 가용 자원이 어떻게 전투에 기여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 법이다.
프랑스 육군 장군들이 공군력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듯한 여러 인용구들이 흔히 거론되곤 한다. 비록 그들이 근접항공지원의 가치를 과소평가했을지는 모르나, 강력한 공군이 필요함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육군이 공군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세간에 알려진 많은 인용구는 사실 폭격기만으로 전쟁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급진적인 주장에 대한 좌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에선 공중전이라는 단어가 폭격기 간의 두헤식 공중전을 묘사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인용자들은 프랑스군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폭격기끼리 벌이는 공중전과 전투기끼리 벌이는 공중전을 혼동했다. 육군이 반대했던 공중전은 전자였지 후자가 아니었다. 1939년 여름의 한 강연에서 지긋지긋한 두헤주의 공중전이 다시 언급되자, 가믈랭이 '공중전은 없다. 오직 지상에서의 전투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을 끊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그가 전장 상공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기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도시를 폭격하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생각에 반대했을 뿐이며, 그의 판단은 옳았다. 제2차세계대전은 공군이 독자적인 폭격전을 수행해서가 아니라 전장에서 모든 병과가 협동하여 종결되었다.
1940년 프랑스 공군이 패배한 것은 과거에 안주했기 때문이 아니라, 급진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군사이론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자신이 공군력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운용했는지 망각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프랑스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간기엔 독일군조차 폭격기를 전장용 무기로 믿지 않았으며, 초기 독일 공군 내에서 전투기는 우선순위가 낮았다. 독일군과 프랑스군 모두 비슷한 시기에 생각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경주에서 승리한 군대는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침공을 거치며 그 과정을 가속화할 수 있었던 독일군이다.
그러나 이 경주는 프랑스군이 제1차세계대전 당시의 교리를 유지했더라면 벌일 필요도 없었던 경주였다.
요약해라 - dc App
공군력에 의한 승리라는 독트린은 전략핵무기 이외에 달성할 수 없다 - dc App
전쟁 발발 직전에 어느정도 정상화 되던 항공기 생산 수치가 전재우발발로 숙령공들 징병되면서 파악 꼬라박는 것도 참... 1939년 말부토 프랑스 전투전까지 프랑스가 계획한 월간 항공기 생산량 달성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니 ㅋㅋㅋㅋ
숙련공 징발했다가 무기 생산량 박은거 1914년에 경험했으면서 그걸 또 반복함
@ㅇㅇ MS406 후계기로 양산한 MB151, 152, D520 모두 숙련공 부족으로 기체 마감 제대로 하지못하고 일선에 배치됐다 온갖 기체 결함 발생한걸 보면 참... 그나마 1938년과 39년 사이에 프랑스 정부가 미제 항공기 도입에 예산 대거 투입한게 다행이다 할 상황이었으니
데이터가 있으면 뭐해 먹지를 못하는데 - dc App
개추
통설과 달리 교리를 새로 수정한게 엘랑, 구닥다리 교리 계속 유지한게 독일인건 진짜 아이러니의 극치임
@ㅇㅇ 독일은 우리는 잘 싸웠는데 유대인들이 배후에서 중상해서!! 한판 더 떠!! 했는데 프랑스는 야. 군바리야. 이게 맞냐? 맞냐고 씨발!!! 했으니까... - dc App
@ㅇㅇ ㄹㅇ? 충격이네
@ㅇㅇ 전격전 특) 도구만 바뀐거지 핵심은 프리드리히적 양익포위섬멸 그대로임
@ㅇㅇ 임무형지휘체계도 구닥다리 교리임?
@ㅇㅇ 예
@ㅇㅇ 1머전 프랑스군도 쓰던거임
@ㅇㅇ ㄷㄷㄷ;;; 미디어에 속았구먼
@ㅇㅇ 미디어가 진짜 존나 무서운 무기라니까 - dc App
@ㅇㅇ 사실 그 낫질작전조차 시작 전부터 대령에게 지형조사하던 첩자들 들키고 작전중에도 정찰기에게 3번정도 정찰당해서(심지어 이때 250km 교통체증 일어남)프랑스 정보부가 단 한번이라도 이 정찰보고들을 헛소리라고 씹지 않았다면 독일은 그자리에서 기갑들 다 잃었음.
스페인에서 낙지용병들이 게르니카 폭격한거보고 쫄았나 - dc App
두헤뽕 때문에 이미 스페인 내전 이전에도 공군내에서 전투기파와 폭격기파 간에 파벌싸움 생김 ㅋㅋㅋ
그러니까 전략폭격이 지금의 핵 비슷한 위치였다는거구만? 핵에 집중하다 재래전 전력 약해졌다는것도 프랑스랑 비슷하네
이게 비단 당시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군 육성하던 국가들은 전부 두헤뽕 여파로 폭격기 개발에 우선하는 경향이 크던 시기임
저때 폭격기 만능론 비슷하게 옆길로 새는 이론 많았음. 수상기뽕 터진적도 있고 - dc App
이상을 바라보며 현실을 외면한채 이론딸만 치다가 기회를 다 놓쳐다는건가
사실 결정적인건 육군 문제인데 이건 정치요소가 커서...
재밋다
어 이거 그건데... 그 이책 번역본 나왔던가.
예전에 프침공 만화 그릴때 이런 양질의 글이 좀 더 많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