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궁정회의 중 발생한 바닥 붕괴 참사에 대한 이야기
서론
1184년 7월 26일, 신성로마제국의 도시 에르푸르트(Erfurt)에서 약 60명의 귀족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독일어로 '에르푸르터 라트리넨슈투르츠(Erfurter Latrinensturz)', 즉 '에르푸르트 변소 추락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궁정회의(Hoftag)가 열리던 건물의 바닥이 참석자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면서, 그 아래에 있던 변소 오물 구덩이(Latrinengrube)로 수십 명이 추락한 사고입니다.
Ⅰ. 역사적 배경: 하인리히 6세와 튀링엔 분쟁
1.1.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맥락
12세기 후반 신성로마제국은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치하에서 제국 내부의 권력 투쟁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1180년 하인리히 사자공(Heinrich der Löwe)의 실각 이후, 그가 보유하던 영지와 권한을 둘러싼 갈등이 제국 각지에서 분출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인츠 대주교 콘라트 1세 폰 비텔스바흐(Konrad I. von Wittelsbach)와 튀링엔 방백 루트비히 3세(Ludwig III. von Thüringen) 사이에 에르푸르트 시의 영유권을 둘러싼 심각한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에르푸르트는 경제적·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마인츠 대주교는 제국의 대재상(Erzkanzler)으로서 교회 측의 권리를 주장했고, 루트비히 3세는 바르바로사의 조카이자 충실한 제국 지지자로서 세속 영주권을 내세웠습니다.
바르바로사는 두 세력 중 어느 한쪽의 반감도 사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아들이자 공동 국왕인 하인리히 6세(Heinrich VI.)에게 중재를 명하셨습니다.
1.2. 하인리히 6세의 에르푸르트 도착과 궁정회의 소집
1184년 7월, 당시 18세(일부 사료에서는 19세)였던 하인리히 6세는 폴란드 원정 도중 아버지의 명을 받아 에르푸르트로 향했습니다.
그는 7월 25일, 성 야고보 축일(Festum Sancti Jacobi)에 맞추어 궁정회의(Hoftag)를 소집했습니다. 제국 각지에서 초청을 받은 귀족, 주교, 백작들이 에르푸르트에 모여들었으며, 7월 26일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Ⅱ. 사건의 경과
2.1. 바닥 붕괴의 과정
7월 26일, 하인리히 6세를 비롯한 수십 명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2층 회의장에 모였습니다. 하인리히 6세는 석조 벽면에 마련된 창가 벽감(Fensternische)에 자리를 잡았고, 콘라트 대주교도 같은 벽감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나머지 참석자들은 목재 바닥 위에 있었습니다.
건물의 2층 바닥을 지지하던 목재 들보(Holzbalken)는 이미 상당히 부식된 상태였습니다. 수십 명의 참석자가 한 공간에 밀집하면서 발생한 과도한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2층 바닥이 돌연 무너져 내렸습니다.
참석자들은 1층으로 추락했으나, 1층 바닥 역시 이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쇄적으로 붕괴되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건물의 변소 시설과 연결된 거대한 오물 저장 구덩이가 위치하고 있었으며, 추락한 사람들은 인분과 오물이 가득한 이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2.2. 피해 규모와 사망자
동시대 사료들은 약 60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일부 후대 추정치는 사망자 수를 100명에 이를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망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 2층 높이에서의 추락에 의한 충격사입니다.
둘째, 무너진 들보와 석재 파편에 의한 압사입니다.
셋째, 오물 구덩이에 빠진 후 인분 속에서의 익사 또는 질식사입니다.
『에르푸르트 성 베드로 수도원 연대기』는 사망한 주요 귀족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벤베르크 백작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Graf von Abenberg).
슈바르츠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1세(Heinrich I. von Schwarzburg).
치겐하인 백작 고츠마르 3세(Gozmar III. von Ziegenhain), 키르히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1세(Burgraf Friedrich I. von Kirchberg).
바르트부르크 백작 부르크하르트(Burchard von Wartburg).
벨링엔의 베링거(Behringer von Wellingen).
그 외에 덜 알려진 자들(하급 귀족, 기사, 수행원, 성직자, 시종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
2.3. 생존자와 국왕의 탈출
하인리히 6세와 콘라트 대주교는 석조 벽면의 창가 벽감에 앉아 있었기에 목재 바닥 붕괴의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닥이 사라진 상태에서 벽감에 매달린 채 구조를 기다려야 했으며, 이후 사다리를 이용하여 구출되었습니다.
튀링엔 방백 루트비히 3세 역시 추락했으나 오물 구덩이까지 빠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구조되어 생존했습니다. 사건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분쟁 당사자 세 사람인 하인리히 6세, 콘라트 대주교, 루트비히 3세가 모두 생존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지적되곤 합니다.
여담
이 사건에서 재미있는 점은 당사자들만 살아남았고, 사망한 귀족 다수가 튀링엔과 작센 출신으로, 이들은 추방된 하인리히 사자공(Heinrich der Löwe)이 이끌던 벨프(Welf) 가문과 역사적으로 연계된 지역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의도하지 않은 도태'가 중부 독일에서의 반대 세력 관계를 와해시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왕권 집중에 유리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물론 동시대의 사료들은 단순히 건물의 노후로 치부하고 있습니다만, 이 사건을 기록한 연대기 작가들이 호엔슈타우펜 제국 가문과 연계된 교회 기관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재미 있는 상상을 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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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흐흑
이 글은 번역임? 아니면 ai 한테 써달라고 한거임?
ai로 자료들 이것저것 찾고, 같이 번역해서 다시 정리하는 거임. - dc App
해병 왕권강화 ㄷㄷㄷ
일부로 저기로 유인해서 천국으로 역돌격 시킨건 너무 나간거겠지 ㅋㅋ?
이사건 똥통사건 ... 세상에서 제일끔찍한 대량 사망사건 ..
메모: 휴전회담은 2층에서 하면 안 된다. 판문점 회담이 1층인 이유.
누구, 저요? - dc App
해병추락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