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5년 말부터 1546년 3월까지

: 디우 공성전 준비 단계


1546년의 디우 포위전은 갑작스럽게 터진 사건은 아니었다.


1545년 11월 29일, 디우 요새의 사령관 동 주앙 드 마스카레냐스 D. João de Mascarenhas는 포르투갈 왕 동 주앙 3세에게 편지를 보내, 디우가 곧 포위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도시 안팎의 긴장, 여러 경로로 들어온 정보, 구자라트 측의 전쟁 준비는 모두 임박한 공격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아의 총독 동 주앙 드 카스트루 D. João de Castro 역시 상황을 추적하고 있었고, 임박한 공격을 예측해 1546년 3월 말 무렵 그레고리우 드 바스콘셀루스 Gregório de Vasconcelos를 디우로 보냈다. 그는 라스카린(포르투갈 측이 고용해 포르투갈식으로 훈련시킨 현지 병력) 100명과 함께, 대포용 화약, 총기용 화약, 화약 단지를 만들 재료, 들보와 코이어 섬유 같은 방어 / 수리 자재를 실은 카라벨라를 가져갔다.


그 무렵 포르투갈 측은 적인 구자라트의 지휘관인 코제 소파르가 단순히 현지 병력 뿐만 아니라, 외국 용병과 전쟁 물자를 조직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다. 1546년 3월, 안토니우 드 소토마이오르 António de Sotomaior는 해협에서 코제 소파르의 선박들을 나포했는데, 이 배들은 디우로 향하던 전쟁 물자와 상당수의 터키계 용병을 싣고 있었다. 한 배에는 70명의 병사가 타고 있었는데, 이 배는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했다. 포르투갈군은 배를 불태워 침몰시켰다. 대포와 궁수, 아르케부스로 무장한 병력을 태운 다른 두 척의 배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코제 소파르 역시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포르투갈 요새들의 병력, 창고, 계절별 주둔 인원, 보급 상태에 대해서 상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코제 소파르는 일부 포르투갈인을 포섭했다. 루이 프레이르 Rui Freire와 프란시스쿠 호드리게스 Francisco Rodrigues는 구자라트 측과 친숙하다는 이유로 포위전 초기에 각각 고아와 차울로 보내졌고, 마스카레냐스는 이들이 화약고에 불을 지르려 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화약 저장 위치를 옮겨야 했다.


이 시점 디우 요새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1546년 2월 마스카레냐스는 이미 요새 운영비가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그가 취임할 때 받은 1000 파르다우 pardaus는 병력 충원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4000 파르다우 이상을 썼다고 말했다. 4월 초,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마스카레냐스는 6개월 동안 병사들에게 급료를 주지 못했고, 요새 안에 있는 병력은 200명 남짓에 불과하며, 남은 이들마저 급료 문제로 불만이 많다고 보고했다. 포병은 겨우 12명이었는데, 다른 포병들은 돈을 받지 못해 떠나버린 이후였다. 


이렇듯 공성전이 펼쳐지기 직전 디우 요새에는 인력도, 돈도, 보급도 부족했다. 불과 200명의 병력과 12명의 포병에 의해 보호받는 도시. 그러나 위험은 포르투갈의 사정을 기다리는 일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1546년 4월

: 코제 소파르가 도착하다


4월. 코제 소파르의 대군이 디우에 당도했다. 그는 과거 1차 디우 공성전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었다. 1538년 당시, 구자라트와 오스만의 연합군은 대규모 병력과 해상 지원을 갖춘 상태였다. 그러나 연합군은 잘 준비된 포르투갈 요새를 단순히 '열심히 공격하면', 즉 대규모 돌격만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자만했다. 잘 만들어진 유럽식 요새를 향해 이뤄진 그러한 돌격의 결과는 끔찍했고, 인도양에서 포르투갈 군의 명성을 드높여주는 결과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1546년의 코제 소파르는 그런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공성전을 장시간동안 체계적으로 이끌어나갈 정교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겐 충분한 공성 물자와, 아라비아반도부터 홍해에 이르는 지역에서 모집된 용병들, 그리고 터키인들, 아비시니아인들, 누비아인들, 아랍인들, 심지어 배교한 기독교인까지 포함한 막대한 용병들, 프랑스인에게 지휘를 맡긴 포병대, 갱도를 뚫을 수만 단위의 노동자들을 갖추고 있었다. 코제 소파르는 요새가 장기간 저항할 것에 대비해 외교적으로 여러 밑작업을 진행했으며 요새가 함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는 사태에 대비해 해상 보급을 차단할 방법을 고심했다. 이 모든 준비를 위해 코제 소파르는 거의 8년에 달하는 시간을 소모했다. 


코제 소파르의 병력은 너무나 거대했기에, 포르투갈 군은 디우 시내에서 항전할 계획을 애초에 세우지 않았던 것 같다. 포르투갈인들은 곧바로 디우 시내를 바라보는 디우 요새로 도망쳤다. 코제 소파르의 병력은 디우 시내를 장악했다. 코제를 직접 따르는 병력의 수만 수비군의 25배인 5천에 달했고, 시내 곳곳을 장악한 병력은, 앞서 말한 코제 소파르를 따르는 5천 병력을 제외하고도 2만에 달했다. 도합 2만 5천의 병력이 고작 212명이 지키는 디우 요새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조차도 아직 끝이 아니었다. 3~4만명에 달하는 구자라트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 인원은 보급과, 그리고, 해자 매립, 갱도 작업에 동원될 예정이었다. 코제 소파르는 이토록 압도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돌격을 명령하지 않고, 신중히 요새를 관찰했다. 그는 1538년의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한편 압도적인 병력을 본 마스카레냐스는 급히 다른 거점인 바사임과 차울에 도움을 요청했다. 가장 중요한 요청은 세 가지였다. 사람, 식량, 그리고 화약. 디우 요새 안은, 포르투갈인들이 코제 소파르의 진군에 앞서 필사적으로 끌어모은 식량과 군수품들이 쌓여 있었다. 버터, 양파, 대추야자, 화약용 심지, 화약 단지용 대나무, 폭탄을 만들기 위한 재료, 목재 따위를 열심히 수집해뒀지만, 그것들은 눈 앞에 펼쳐진 막대한 군의 규모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해 보였고, 실제로도 부족하게 될 터였다.


1546년 4월

: 전초전


코제 소파르는 신중하게 군을 움직였다. 디우 요새는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물로 보호되는 요새였고, 서쪽으로 접근하는 길도 해자와 보루로 보호받고 있었다. 코제 소파르는 구자라트 노동자들을 이용해, 신중하게 디우 요새의 서쪽 성벽을 따라 대규모 장벽을 쌓았다. 장벽은 성벽에서 약 200m 거리에 설치되었다. 그 뒤에는 병력이 주둔할 진영과 포병, 보급품들이 배치되었다. 그 다음, 코제 소파르는 장벽에서부터 해자까지 참호와 통로를 개척했다. 이 참호들은 나무와 흙, 나뭇가지로 천장을 덮었고, 그 위에 다시 포르투갈군의 총과 화약 단지, 불화살을 막아내기 위해 방어용 구조물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통로들은 비록 전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포르투갈 인들로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이 대규모 진격에 어떻게든 저항하려 했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마스카레냐스는 보루별 방비를 정비하고, 화약고를 옮기고, 감시를 강화하고, 주변 포르투갈 요새들에 계속해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병력 부족은 해소할 수 없었고, 해자를 개척하기 위한 통로는 점차 늘어났다.


1546년 5월

: 코제 소파르의 압박과 대응


5월 초. 고아와 주변 요새에서 디우 요새를 구원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이뤄졌다. 세바스티앙 코엘류 Sebastião Coelho는 5월 초 디우 요새에 도착해 총독에게 보고했는데, 그는 요새가 쌀과 물을 중심으로 꽤 잘 비축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굶주림으로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멀지 않아 지나친 낙관론으로 드러나게 될 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 군은 식량의 부족으로 몇 달 동안 고양이 고기, 갈까마귀, 썩은 채소를 먹게 되었다.


한편 코제 소파르의 압박은 점차 거세졌다. 포병은 계속해서 성벽과 보루를 두들겼고, 구자라트 측의 장벽에서 해자로 연결되는 참호 통로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포르투갈 군대는 대포와 아르퀘부스 일제사격, 화약 단지 투척으로 몇몇 통로 구축을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그보다 많은 통로가 구축되어 해자를 향해 천천히 전진해왔다.


한편 코제 소파르는 바다에 접한 보루(Baluarte do Mar)로 침투하여 보루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이 보루는 바다에 접한 동시에 가장 높아 요새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중요한 보루였다. 8년 전 첫 공성전에서, 오스만 군은 보루 가까이에 배를 가져다 놓고 불을 질러 연기로 수비군을 질식 위기에 빠뜨려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운 바 있었다. 코제 소파르는 그 계획을 반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선박 한 척을 개조해 폭발물을 가득 실은 공격선으로 만들었다. 일단 배가 보루에 바짝 붙어 연기로 수비군을 압박하면, 수비군은 전투 능력을 잃은 채로 바깥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배에서 대기하던 전투 인원들은 곧장 수비군을 압도하고 요새에서 가장 강력한 보루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 앞으로 포르투갈 군의 해상 보급을 방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마스카레냐스는 초기에 포로로 잡힌 통역자를 통해 이 계획을 알아차렸다. 그는 두 척의 작은 배에 각각 20명으로 구성된 결사대를 뽑아, 배를 불태운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부활절 전날 밤에 구자라트인들이 배를 개조하는 현장에 침입했다. 구자라트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침입을 알아차렸지만, 놀랍게도 불과 40명의 포르투갈인들은 몰려드는 병력들 사이에서 버텨내면서 배의 닻줄을 자르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재빠르게 보트를 타고 코제 소파르가 준비한 배와 함께 요새 방향으로 도망쳐, 폭약으로 가득 찬 배를 불태웠다. 밤의 어둠 속에서 코제 소파르가 심혈을 기울인 배가 불타며, 포르투갈 군대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것은 비록 작은 사건이었지만, 코제 소파르가 이 배에 투입한 자원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군대의 사기에 중요한 역할을 미친 것 같다. 이 사건은, 비록 코제 소파르가 육상에서 포르투갈 군을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바다에서는, 아무리 소수일지라도, 포르투갈인들이 여전히 우위를 잡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과도 같았다. 이후로 코제 소파르는 바다를 통해 요새를 공격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이렇게 지켜낸 보루를 통해, 5월 페르난두의 첫 구원대가 도달했다. 약 300명의 포르투갈인들로 구성되어, 이제 수비대의 총 병력은 5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1546년 6월

: 통로가 해자에 닿다. 해자가 매워지다.


4월부터 이어진 공사 끝에, 약 59일만에 잘 보호된 참호-통로들이 해자에 도달했다. 구자라트군은 다양한 자재로 빠르게 해자를 메우기 시작했다. 성벽과 해자 앞까지 연결되는 통로들은 구불구불한 구조에 방호벽으로 보호받았기 때문에, 포르투갈군이 사격으로 이를 저지하기 어려웠다. 코제 소파르는, 비록 앞선 계책이 실패했음에도, 여전히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마스카레냐스는 점점 메워져 가는 해자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는 또다른 무모한 작전을 생각해냈다. 밤 사이에, 성벽의 작은 문을 열고 해자로 내려가 적이 메운 흙과 다른 것들을 퍼내자는 계획이었다. 놀랍게도 이 계획은 며칠간 효과를 거뒀으나, 곧 구자라트군은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밤에 해자로 내려온 포르투갈인들을 기습하고자 했다. 다행히도 마스카레냐스는 이 상황을 미리 대비해뒀는데, 그는 성벽의 쪽문에서 해자에 이르는 길에 코제 소파르와 마찬가지로 참호와 방호벽을 설치했고, 결과적으로 포르투갈인들은 성공적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포르투갈군에게 좋지 않았다. 이제 포르투갈군은 더는 해자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고, 해자는 빠르게 메워지고 있었다. 이제 곧 대규모 공세가 시작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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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페이지짜리 논문 요약글인데 너무 길어져서 2부는 자름


모두가 좋아하는 액션씬은 2부에 집중되어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