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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 : https://gall.dcinside.com/war/4889765


1546년 7월

: 대공세의 시작, 코제 소파르의 죽음


7월 중순에 이르러 해자가 어느정도 메워지자, 코제 소파르가 이끄는 구자라트군은 성벽을 직접 공격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7월 19일, 상주앙 보루가 첫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보루가 오래된 옛 해자 위에 세워져 구조적으로 취약했으며, 다른 보루보다 높이가 낮았고, 자연스레 보루 앞에 설치된 해자의 깊이도 낮았기 때문이다. 구자라트군은 자신들의 우월한 숫자와 포병을 믿고 성벽을 빠르게 무너뜨리려 했다.


구자라트군은 일반적인 유럽 공성전과는 다른 방식과 도구를 사용했다. 공성용 사다리의 사용은 아주 드물었고, 공성탑은 아예 사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파셰브 pasheb라 불리는 공성 수단을 사용했는데, 이는 성벽 밑부분에 흙과 돌을 쌓아 올려 성벽 꼭대기 방향으로 올라가도록 만들어진 거대한 경사로였다. 여기에는 수비군의 반격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구조물이 결합되었다. 


해가 지기 두 시간 전에 시작된 구자라트군의 공격에, 마스카레냐스가 이끄는 500명의 포르투갈 군대는 예상보다 더 잘 대응했다. 수비대는 아퀘버스와 대포, 화약 단지를 집중적으로 사용해 수적으로 우세한 구자라트 군세를 공격했다. 구자라트군은 성벽 위에 설치된 총들이 자신들을 속이기 위해 대나무로 만들어진 가짜라 믿었으나, 수비대의 맹렬한 반격은 그들의 생각이 오판임을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구자라트군은 결국 공세를 포기하고, 막대한 희생을 내고 퇴각했다.


7월 24일, 어쩌면 전쟁의 향방을 갈랐을지도 모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포르투갈군의 유탄을 맞고 코제 소파르가 숨을 거둔 것이다. 코제 소파르는 이 전쟁의 설계자였고 유능한 지휘관이었으며, 병력들은 그의 개인적 카리스마에 크게 의존했기에, 이는 구자라트군에게 큰 손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곧바로 구자라트군의 와해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분노한 코제 소파르의 아들, 루메캉 Rumecão 이 곧바로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 날인 7월 25일, 산티아고 축일에, 루메캉은 다음 공격을 진행시켰다. 첫 번째 시도의 두 배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아마도 만 단위의 병력이었을 것이며, 500명에 불과한 포르투갈군에겐 버거운 수였다. 게다가 루메캉은 단순히 분노에 휩쓸려 무모한 공격을 추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포르투갈군을 기습하기 위해 밤에 병력을 이동시켰으며, 병력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고요하게 이동했다. 포르투갈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전에 결사적인 작전으로 지켜냈던 바다 보루가 그들의 움직임을 감지하는데 성공했다. 바다에 접한 보루는 요새에서 가장 높아 요새 주변을 감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이 트기 두 시간 전의 일이었다.


루메캉이 보낸 구자라트군은 상투메 보루와 상주앙 보루, 그리고 두 보루 사이를 잇는 성벽 구간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포르투갈인들은 적의 공격이 단순히 분노가 아니라 잘 계획되었다는 또다른 정황을 발견했는데, 진군해오는 구자라트군이, 인도에서는 흔치 않게도 투구와 흉갑을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갑병들은 화약 무기 없이는 격퇴될 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수비군 측에서는 이 날 하루만 800개의 화약 단지가 사용되었다.


한편 루메캉은 이러한 거대한 정면 공격을 시작하면서도 또다른 패를 준비했다. 그는 약 백여명의 결사대를 모집했는데, 이 결사대는 공격이 시작된 썰물 시간에 맞춰, 요새 남쪽의 바위를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랐다. 놀랍게도 이들은 남쪽 성벽을 타고 기어올라 요새 안에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요새의 인원이 워낙 적었기에, 공격이 시작된 성벽 이외에는 감시 인원이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성벽에서 민가의 지붕을 타고 내려온 그들의 침입은, 한 포르투갈 여성의 비명으로 경보가 울리면서 비로소 발각되었다. 


마스카레냐스는 군대의 사기를 생각해 후방으로 적이 침투했다는 사실을 입단속시키면서, 불과 500명에 불과한 수비군을 다시 나눠, 소규모 병력을 조직해 이들을 격퇴하도록 보냈다. 지붕 위에서 서로의 아퀘버스가 불꽃을 뿜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자신의 용맹함을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구자라트군을 격퇴했고 많은 구자라트인들이 성벽 아래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


구자라트군의 지휘관으로서, 루메캉의 공격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수적으로 열세인 수비군을 잡아놓기 위해 대량의 병력을 투입했고, 다시금 병력의 우세를 이용하기 위해 후방으로 결사대를 침투시켰으며, 일선에 선 병사들은 일반적인 인도 부대와는 다르게 잘 무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려깊게 준비된 공격조차도 포르투갈인들의 끈질긴 저항을 이겨낼 순 없었다. 포르투갈인들은 강력했고 세 시간동안 구자라트군을 몰아냈다. 루메캉은 이 시도에서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전투가 끝난 시점은 날이 밝고 한 시간 뒤였고, 아침의 태양은 구자라트군의 희생을 만인의 눈에 드러냈다. 약 1500구에 달하는 구자라트군의 시신이 디우 요새의 해자와 성벽 근처에 널려 있었다. 포르투갈군의 사망자는 7명뿐이었다.


루메캉은, 작성자의 생각이지만, 분노했던 것 같다. 그리고 분노는 현명하지 않은 결단을 이끌었다. 바로 다음 날인 7월 26일 저녁, 이전보다는 작은 규모의 구자라트군이 성벽에 돌진했다. 포르투갈군의 포병이 불을 뿜었다. 파셰브, 즉 경사로에 놓인 구자라트군은 강력한 포격에 노출되었다. 300명의 구자라트군이 희생되었으며 요새의 사상자는 전무했다.


네 번째, 29일의 공격은 이후 몇 달이 지난 후까지 마지막 대규모 공격이었다. 기록은 짧지만 강렬하다. "보루와 작은 보루와 성벽이 모두 엄청난 불길 속에서 타올랐는데, 양쪽에서 너무 많은 불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연기는 너무 높고 짙어 공중에 거대한 탑처럼 솟아올랐고, 불쏘시개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형상 때문에 땅 위에서는 양측 모두에게 조금이라도 연민을 가진 사람이라면 불쌍히 여길 만큼 많은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포르투갈군은 약 1300명의 구자라트군 시신을 확인했고, 포르투갈 측 피해는 3명의 사망자와 약 30명의 화상자였다.


4차례의 공격동안 포르투갈군은 최소한 3000명의 구자라트군을 살해했으며, 피해는 경미한 수준에 머물렀다. 루메캉은 더 이상은 성벽을 향한 돌격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참호화된 방어 위치가 제공하는 우위, 그리고 포르투갈군의 효율적인 배치와 조직은 공세측인 구자라트군을 압도함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루메캉은 생각했다. 포르투갈군에게 참호와 보루가 없어진다면 어떨까. 그렇게 공성전의 다음 단계인, 갱도 굴착전이 시작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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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로 쪼개면 끝날 줄 알았는데 턱도 없었음


코제 소파르의 죽음은 6월 24일설, 7월 24일설 두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를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