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세인은 물 대신 술을 마셨다”는 통념

“중세 유럽에서는 물이 오염되어 위험했기 때문에 평민부터 귀족까지 모두 맥주나 포도주로 수분을 보충했습니다.”

대중 역사서, 미디어, 심지어 일부 학술 저작에서도 별다른 검증 없이 반복되어 온 이 주장은, 오늘날 중세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The Great Medieval Water Myth’로 불리며 강하게 비판받고 있습니다.

2. 중세의 식수: 실제 상황

중세 유럽 인구의 약 90%는 농촌에 거주했습니다. 제조업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강, 개울, 우물, 샘 등 자연 수원은 비교적 깨끗했습니다.

마을 공동체는 식수원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가축 배설물이나 생활 폐수를 분리하는 상식적 수준의 관리를 했으며, 무두질(tanning) 등 수질을 해치는 작업자에게는 상당한 벌금이 부과되기도 했습니다.

도시가 성장하면서 식수 공급은 공공 과제가 되었습니다.

1237년 런던 시는 타이번(Tyburn) 샘에서 치프사이드(Cheapside)까지 납 배관을 부설하는 ‘대도관(Great Conduit)’ 건설을 인가했고, 1245년경 완공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약 4km의 중력식 급수관으로, 이후 14~15세기에 걸쳐 12개 도관 체계로 확장되었습니다. 시당국은 관리인을 임명해 물의 무단 사용이나 수질 오염을 단속했습니다.

이는 런던만의 사례가 아닙니다.

파리는 1190년대에 이미 공공 급수 체계를 갖추었고, 더블린은 1244년, 페루자는 1254년에 수도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14세기 브뤼헤(Bruges, 당시 인구 약 4만)는 대형 집수 저장조와 체인식 양수 장치를 갖춘 수도 시스템을 운영했습니다.

수도원은 기술 보급의 중심지 역할을 했는데, 캔터베리 크라이스트처치의 수도 시스템 설계도가 현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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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Trinity College Library, Cambridge)에서 소장 중인 캔터베리 크라이스트처치의 수도 시스템 설계도)


3. 중세의 술: 에일, 맥주, 포도주

에일(Ale)은 홉을 넣지 않고 보리 맥아와 물로 양조한 음료로, 중세 잉글랜드와 북유럽의 기본 주류였습니다.

양조는 주로 가정에서 여성(‘브루스터(brewster)’ 혹은 ‘에일와이프(alewife)’)이 담당했으며, 12세기까지는 수도원이 양질 맥주의 주 생산자였습니다.

에일은 홉이 없어 보존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지역 소비에 한정되었습니다.

13세기경 독일 북부에서 홉(hops)을 양조에 도입하면서 맥주의 질과 보존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브레멘의 양조업자들이 1200년경 적정 홉 배합을 완성한 이후, 맥주는 최대 6개월 보존이 가능해져 장거리 수출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잉글랜드에는 15세기 네덜란드를 통해 홉 맥주가 전해졌으나, 전통주의자들의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1524년까지도 ‘에일은 영국인의 천연 음료이고, 맥주는 네덜란드인의 것’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중세 에일은 현대 맥주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파티-자일(parti-gyle)’ 양조법에서는 동일한 맥아에서 여러 차례 우림을 거쳐 강도가 다른 음료를 생산했습니다.

첫 번째 양조의 ‘스트롱 에일(strong ale)’은 특별한 행사용이었고, 마지막 약한 양조의 ‘스몰 비어(small beer)’는 알코올 도수가 약 1% 안팎으로, 아이들을 포함해 모든 계층이 매 끼니에 마시는 일상 음료였습니다.

현대 맥주의 평균 도수(약 5%)와는 질적으로 다른 음료라 할 수 있습니다. 

포도주는 남유럽(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독일 라인란트 등) 포도 재배 지역에서 모든 사회 계층의 일상 음료였습니다.

북유럽에서는 수입품으로서 가격이 높아 주로 귀족·성직자·부유한 상인의 음료로 기능했으며, 사회적 지위의 표식(marker of status)이었습니다.

평민은 보다 접근하기 쉬운 물 탄 포도주(pichet)나 에일, 사과주(cider), 미드(mead) 등을 음용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포도주 생산의 핵심 주체였습니다. 성찬례(Eucharist)에 필수적인 포도주를 확보하기 위해 수도원은 광범위한 포도원을 경영했으며, 베네딕트회와 시토회 수도사들은 포도 재배와 양조 기술 개발의 선구자였습니다.

시토회는 12세기 말까지 이베리아 반도에만 129개 수도원을 설립하여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보급했습니다.

에일과 포도주 외에도 다양한 발효 음료가 소비되었습니다.

사과주(cider)는 잉글랜드 서머셋, 노르망디, 브르타뉴, 아스투리아스 등 사과 재배 지역의 주요 음료였습니다.

미드(mead)는 꿀과 물을 발효시킨 음료로 게르만·노르드 문화에서 오랜 전통을 가졌습니다.

동유럽과 러시아에서는 빵을 발효시킨 저알코올 음료인 크바스(kvas)가 널리 소비되었습니다.

양념 포도주도 인기 있었습니다. 히포크라스(hippocras)는 포도주에 꿀·생강·계피 등 향신료를 넣어 만든 음료로, 약용과 소화 촉진 목적으로 음용되었습니다.

4. 물 대신 술을 마셨다는 풍문

중세인들이 물에 대해 글을 남긴 사례가 상대적으로 드뭅니다. 그러나 이는 물이 맛이 없는 일상적 음료여서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Polysyllabic의 분석에 따르면, 만약 중세 잉글랜드의 모든 성인이 하루 1갤런의 에일을 마셨다면 대부분의 곡물이 양조에 투입되어야 하는데, 빵과 곡물 죽이 식단의 기본이었던 사회에서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곡물은 양조보다 식량 생산이 우선이었고, 1315–1322년 대기근 같은 흉작기에는 특정 곡물의 양조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5. 하지만 술을 많이 마신 이유

1. 칼로리와 영양: 에일은 ‘액체 빵(liquid bread)’으로 불릴 만큼 탄수화물과 칼로리가 풍부했습니다. 하루 종일 중노동에 종사하는 농민·노동자에게 에너지 보충 수단이었습니다.

2. 맛과 문화: 물은 맛이 없습니다. 에일, 포도주, 사과주 등은 식사를 동반하는 문화적 음료였습니다. 오늘날에 안전한 물이 있지만 사람들이 음료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3. 사회적 기능: 주점(tavern)은 사업 거래, 고용, 사교의 장이었습니다. 13세기 파리에는 주민 600명당 1곳, 14세기 아비뇽에는 150명당 1곳의 선술집이 있었습니다.

4. 보존성: 양조 과정의 끓임과 발효가 부패를 지연시켜, 에일·맥주는 물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홉 도입 이후 보존 기간이 수개월로 연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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