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록들은 만주 랴오양-선양 전역에서 국민당군이 섬멸당하고 공산군이 본격적으로 만주를 장악한 시기랑 겹침
즉 이들은 구출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
천주교서울교구, 간도천주교도들의 박해진상 발표(1)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만주 간도지방은 주민의 7할 이상이 우리 동포이다. 해방이후 동북지방 동포들의 고난은 귀환한 동포들이 전하는 소식으로 그 피눈물나는 곤경을 알았거니와 이제 간도지방에는 1만3천여 천주교 신도와 그들을 지도하여온 연길교구 독일선교단 성직자들이 중국 공산군들의 박해로 역경에 처하여 있는데 이에 대하여 천주교회 서울교구에서는 최근 그 지방에서 돌아온 교역자와 신자들의 실정 보고를 종합하고 이밖에 각 방면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진상을 27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해방후 소련군의 만주 진주에 따라 간도방면에 침입한 중국 공산군의 종교에 대한 박해의 실정은 다음의 3단계로 구별할 수 있다. 1946년5월20일 오전9시경 길동 보안사령부에서 연길교구내에 브레헬(Brehel)주교를 비롯하여 독일인 신부 19명과 수사 17명과 서서수녀 15명을 연길 보안 제1단 감옥에 감금한 이래 그들의 종교에 대한 박해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진전하였다.
1. 교회 재산은 적산으로 취급하고 몰수한 사실
제2차 대전에 있어 독일은 적국으로서 연합국측으로 본다면 적산인만치 독일인선교단이 관리하는 연길교구내의 종교재산(건물·토지·성당내 제구 등)은 적산이라는 구실로 적산처리위원회에서 몰수하였다. 연길수도원과 부속 철공소 목공소 등의 건물과 내부의 시설은 물론 성심수녀원의 소속 병원도 전부 몰수하였다. 그 외에 연길 용정을 비롯한 16개소의 성당과 신부주택도 전부 몰수하였다.
이상과 같이 교회의 전재산을 몰수한 데 대하여 조선인신부 김성환이 교구장을 대리하여 당지 군사령부에 항의하였다. 즉 교회법으로 보거나 1917년 중화민국 최초의 종교회의에서 가결될 결의문을 보거나 또는 교황청에서 발표한 카톨릭선교사의 사명과 교회재산에 관한 선언서에 의하면 교회 재산은 국적을 달리 한 교단의 소유권 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법과 아울러 세계법이 공인하는 천주교회가 소유권을 가진 것이므로 절대적으로 적산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였으나 하등의 효과도 얻지 못하였다. 기독교 교회의 건물 등은 대전중에 있어 일본군에서 사용하였다는 구실하에 몰수되었고 목사들은 전부가 조선으로 추방되었다.
2. 일반 신자의 신앙을 억압한 사실
연길에 진주한 소련군사령부의 8개 항목에 걸친 포고문중에는 성당과 예배당에서 아무런 장해없이 종교예식을 집행할 것이다라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것이 있다. 그런데 그후 팔로군의 공작대가 각 지방에 진출하여 소위 토지개혁을 개시할 때부터 그들은 반종교운동을 전개하였다. 종교신도들은 모든 조직체에서 숙청되고 지방의 농회에서는 신앙을 버리기 전에는 농회의 회원이 될 수 없으며 토지의 분배에서 제외되었다.
경향신문 1948년 01월 28일
천주교서울교구, 간도천주교도들의 박해진상 발표(2)
성서와 성물을 농회에서 바치고 많은 군중 앞에서 배교를 진정으로 서약한 자라야 농회의 회원이 될 수 있고 토지의 분배도 받을 수 있었다. 만일 배교치 않는 자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 토지에서 추방당하고 통행증도 받지 못하므로 어디를 가나 비인간적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연길현대랍자영암촌에서는 신자들의 성경을 불에 태우고 십자가고상 등의 성물을 파괴하고 노상에 버려 갖은 모욕을 다하였다. 신앙도 자유도 종교 반대운동도 자유라는 정책하에 있는 당지에서는 끝까지 신앙을 사수하는 신도들의 곤경은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지의 교육은 무종교적이며 종교는 아편이라고 교과서에 널리 선전하여 적극적 반종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학생들은 각자의 신앙을 버리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혹독한 형벌을 당하며 혹은 학교감옥에 투옥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신앙을 사수하는 가정은 그 재산이 몰수당하게 되며 기타의 박해도 날이 갈수록 점점 심각하여 갈 뿐이다.
3. 교회를 전멸한 사실
1946년 5월20일 연길교구내 신부·수사·수녀들은 전부 체포 감금당하였다. 2일 후 조선인신부 6명을 비롯하여 중국인신부 1명 조선수녀 15명 서서수녀 15명은 적국의 인민이 아니고 또 신민주주의에 있어 신앙은 절대 자유이니 종전과 같이 전교하라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석방한 것은 단지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일시적 조치에 불과하였다. 조선인 신부들은 지방에 돌아가서 성당에 찾아 들어가지 못하고 사가를 빌어서 교우들의 영적 지도에 당하였으며 신부 한 사람들이 4개소 지방교회까지 겸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세중에서 대외적 압박은 나날이 심하여 학생과 청년은 신부와 대면도 못하게 되고 다만 노부인만이 간신히 성사를 받게 되는 지경이었다. 1947년 8월1일부터 소위 제2차 숙청이 개시되자 사상 통일공작을 병합하여 조선인신부 성직자들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로 8도구 허창덕신부와 수녀 3명을 노동을 하지 않고 신자들의 고혈을 착취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하여 착취배라는 간판을 등에 붙이고 시가로 끌고 다니게 하고 군중 앞에서 대회를 열고 신부를 무수히 난타하여 희생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제2차로는 연길의 중국인 신부 조철신부와 조선인수녀 2명과 조선인수사 1명을 감옥에 투옥하고 난타하며 배교함과 그들에게 결혼함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목도한 신자들은 위험이 급박한 것을 알고 목단강 최요안네신부와 도문 김바오로신부 및 용정에 있는 빅토리오 김성환신부와 수년 3명을 비밀리에 조선국경으로 피신시킨 것이다. 그러한 현상으로 지금은 감옥에 있는 신부 외에는 성직자는 한 사람도 없다. 전 동북에 있어 봉천·장춘·길림·사평가 등 중앙군 점령지역 외의 팔로군 점령지구에 있어 성당과 기타 교회 소속의 건물은 전부 군사수용소 회관극장 공장 등으로 변하고 말았다.
경향신문 1948년 01월 29일
천주교서울교구, 간도천주교도들의 박해진상 발표(3)
연길교구내에는 백화동주교 이하 20명의 독일인신부가 있었다. 그중 신철에 있는 유셀바시오신부는 해방 후 팔로군에게 총살당하였고 고보니파시오신부는 체포되어 갖은 고생을 겪다가 지난 6월에 사거하였고 현재 18명이 옥중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당하고 있는 바 그 대요는 다음과 같다.
1946년 5월20일 백주교 이하 18명의 독일인 신부와 수사 17명 수녀 2명 그 외에 이탈리아수녀 1명이 체포되어 연길 제1보안단 감옥에 투옥되었다. 투옥전에 백주교가 친히 매고 있던 십자가고상과 또 주교의 가락지를 강제로 박탈하여 파괴하고 좁은 감옥에 10명씩 수용하였다. 잔인한 그들은 옥중에서까지 고통을 주기 위하여 주야로 자지도 못하게 하고 앉아만 있게 하였다.
약 1주일 후에 신부들은 연길하남의 본 감옥에 옮기었고 또 10여 일 후에 화룡현삼도구 성당을 수용소로 정하고 신부들을 전부 그 곳으로 옮겼다. 자위대의 엄중한 감시하에 있는 옥중의 대우도 극도로 조악하였으며 식사는 빨간 수수밥과 소금뿐으로 그것도 극히 소량이었으며 침구로는 가마니 한 장과 헌 누더기 한 장 뿐이었다. 삼도구에 감금한지 약 2개월 후에는 신부와 신자간의 관계를 전연 끊어버리려고 삼도구에서 약 3백여리나 떨어진 백두산 밑 두만강 연안인 남평이란 산촌에 옮겨 그곳 만주국시대의 청년훈련소였던 건물에 수용하였다.
그곳은 부근에는 사람 한 명 없는 외로운 곳이다. 그곳에서 근소한 식량배급을 받아 연명하면서 강제노동을 하여 왔고 강제노동할 일거리가 없으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근 농가에 나가서 농사일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하루 종일토록 일을 하여 줄지라도 겨우 얻어 먹기나 할 뿐이오 다른 보수는 없다. 지금 누구든지 남평에 가면 헌 의복을 목에 걸치고 헐벗은 발로 농가에 다니며 노동하든지 혹은 낫을 들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있는 신부와 수녀를 발견할 것이다. 이들의 소유는 잡힐 때 입고 있던 옷 한 벌 뿐이다. 이것을 입고 여름도 지내고 엄동설한도 지낸다.
현재는 주교 이하 신부들은 삼처에 분리되어 구금되어 있다. 연길에는 백주교와 신부 5명과 수녀 2명 8도구에는 신부 2명과 수사 3명 그 외에는 전부 남평에 각각 감금되어 있다 한다. 현재 이 감금중에 있는 성직자들은 극도의 영양불량과 과로 때문에 심신이 지극히 쇠약하여졌으므로 엄동을 당하여 그 생명이 대단히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다.
경향신문 1948년 0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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