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북일기는 조선시대 울산에 살았던 울산 박씨 박계숙(朴繼叔, 1569〜1646)과 박취문(朴就文, 1617〜1690) 부자가 남긴 일기이다. 박계숙은 1605년에, 박취문은 1644년에 함경도로 파견되어 약 1년간 군관(軍官)으로 복무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일상생활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책은 1권으로 총 79장이며, 박계숙 일기가 24장, 박취문 일기가 55장으로 크기는 가로19cm, 세로 27cm이다.
이 일기는 조선시대 무관(武官)이 남긴 것이라는 점에서 희소가치가 크며, 아버지와 아들의 양 대에 걸친 일기를 합친 것에서 주목을 끈다. 무엇보다 생활 주변의 자질구레한 것까지도 숨김없이 자세하게 써 놓은 것이 매우 놀랍다. 또한 17세기 변방지역의 군사 업무의 실상과 군관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는데 도움을 준다. 경상도 울산에서 함경도 회령에 이르는 노정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도로 교통의 실태도 알 수 있다. 현재 울산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부북일기(赴北日記).4
나의 아버지(가엄, 家嚴)의 갑오년(1594년, 선조 27년) 신급제(新及第, 과거에 처음 급제한 사람) 때 부방일기는 보이지 않는다.
을사년(1605년, 선조 38년)에는 일당백장사(一當百壯士)로 선발되어 부북(赴北)할 때의 일기이다. 이 때 병사(兵使, 경상 좌병사)는 김응서(金應瑞), 판관(判官, 울산 판관)은 조성립(趙誠立)이다.
부북 : 북쪽 지방에서 부방(赴防) 하는 것.
부방(赴防)은 조선시대 다른 지방의 병사가 서북 변경의 국경지대에 파견되어 방위임무를 맡은 일을 말한다.
을사년(선조 38년, 1605년) 乙巳
10월 十月
10월 15일
울산성주(城主)와 병사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10월 16일
마을의 여러 친구들이 전별연을 열어 주어 종일토록 취하게마셨다.
10월 17일
길을 떠났다. 달동(達洞) 가는 길에서 또 전별연이 있었다. 날이 저물어 장씨 성을 가진 친구 집에서 머물렀다.
10월 18일
아침 일찍 떠났다. 농소(農所)에서 아침을 먹고 바로 길을 떠나 휴암(鵂巖)에 도착하니 그 마을의 여러 친구들이 이미 강가에 모여 종일토록 전별연을 벌었다. 미시(未時, 오후3시경)에 출발하여 저녁에 모화촌(毛火村)에서 잤다.
10월 19일
신원(新院)에 도착하니 입곡(入谷), 개곡(開谷), 석촌(石村)의 여러 친구들이 다시 전별연을 벌여 취하도록 마셨다. 능지(陵旨)에 도착해 머물러 잤다.
10월 20일
몰양역(沒陽驛)에서 아침밥을 먹고 아화(阿火)-경주시 서면 아화리- 에서 말을 먹였다. 병사(兵使)가 도착하여 배알했다.
병사는 먼저 떠나고 뒤따라 출발하였다. 저물녘에 영천(永川)에 도착했다. 병사가 사람을 보내어 들어오기를 청하여 술 석 잔을 마셨다.
영천 군수(이경립, 李景立)와 저녁밥을 같이 먹고 밤이 될 무렵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처소로 돌아오니 배행(陪行) 군관이 약간의 술과 먹을거리를 가지고 왔다. 향소(鄕所)에서 또한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고 이청(吏廳)과 장관(將官)등 도 주찬을 성대히 준비하여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영천 군수가 다모(茶母), 소동(小童), 사령(使令)을 보내어 주었다. 밤이 깊도록 크게 취하도록 마셨다. 가득 모인 주객(主客)이 모두 취하고 사내종들 또한 크게 취해서 모두들 편안하게 잤다.
10월 21일
흥해(興海포항시흥해읍)의 김정협(金正冾)과 김응택(金應澤), 최기문(崔淇文), 김대기(金大器), 배응춘(裵應春), 영일(迎日포항)의 김팔개(金八凱), 청하(淸河포항시 청하면)의 이덕붕(李德鵬), 양산의 정언상(丁彦祥)도 함께 도착하였다.
나는 낮에 먼저 병사를 찾아뵙고,
“안동부(安東府)에서 점고하고 죽령(竹嶺)을 넘는 길로 가게 되면 돌아가게 되는 것이어서 극히 불편합니다. 먼저 도착한 아홉 사람은 영천군에서 점고한 후에 조령(鳥嶺)을 넘는 것으로 길을 잡으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아뢰니 병사(兵使)가 흔쾌히 승낙하였다.
들어오라는 기별을 김협에게서 들었다. 영천 군수가 나와 김정에게 각각 쌀 1두, 말먹이 콩 1두, 말먹이 죽 1두씩을 지급해 주었다. 나는 김정협(金則自)과 더불어 본군에서 아침을 먹었다. 식후에 병사가 출발하려고 할 때에 영천 군수가 들어가 병사를 뵙고 말하기를,
“울산 판관과는 평소 알고 지낸 사이이고, 오늘 삼천리 밖으로 멀리 떠나 전별연을 열려고 하니 사또(使道)께서도 행차를 조금 늦추시어 잠시 참석해 주시기를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병사가 웃으며 ‘아주 좋다’고 하여 전별연을 베풀고 난 후 거의 정오 무렵 잔치가 파하고 점고를 하였다. 병사는 먼저 출발하였고, 우리는 정오가 지나 흥해, 영일, 청하, 양산 등의 출신 군관들을 불러 큰 잔으로 두 잔씩을 먹고 출발하였여저녁에 신녕(영천 신녕면)역(新寧驛)에 도착하였다.
밤에 찰방(察訪)과 수령이 술을 가지고 전별연을 열어주었다. 동행한 친구들도 함께 술을 마시고 머물러 잤다.
10월 22일
이른 아침에 출발했다. 가는 길에 수령과 찰방에게 들러 감사인사를 드렸다. 신원(薪院)에서 말을 먹이고 군위(軍威)에서 잤다. 군위 현감(縣監)은 경상 순영(巡營)에 가고 없고향소에서 약간의 술과 안주를 들고 와서 대접했다. 이청(吏廳)에서도 술과 안주를 들고 와서 대접했다.
10월 23일
비안(比安)에 도착해서 말을 먹였다. 현감이 급창(及唱)6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들어오라 청하니 김정협과 들어가 술을 마시고 오후에 파했다. 안계역(安溪驛)에서 잤다. 안계 역장 등이 화문첩(花紋疊) 한 부와 백문석(白紋席)을 가져 와 주었는데, 화문첩은 김정에게 빼앗겼다.
10월 24일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하여 수산역(水山驛)에서 아침을 먹고 함창현(咸昌縣)에 도착하니 쇄마(刷馬)와 말먹이 콩, 죽 뿐이고 상하간에 전혀 접대하는 일이 없었다.
10월 25일
유곡(幽谷)에서 말을 먹였다. 찰방(察訪)8이 전에 알고 있던 사람이라 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을 하였다. 문경(聞慶)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함창에서와 같아 접대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고 급료로 주는 쌀도 규정만큼 되지 않아서 해당 색리(色吏)를 불러 볼기를 10대 때리고 보내주었다.
10월 26일
고사(古沙)에서 말 먹이를 주고 수교(水橋) 주막(酒幕)에서머물러 잤다.
10월 27일
단월역(丹月驛)에서 말먹이를 주고 충주(忠州)에 도착하였는데 목사는 출거(出去, 출타)하여 없었다. 처량하게 빈 관사에서 찬밥도 얻기 어려워 종과 말이 모두 굶주리어 새벽에 이르도록 뒹굴었다. 비안(比安)에서 온 벼슬아치에 대해서는 극진히 접대하는 것이 영군관(營軍官)의 몇 배에 해당하니 우습고도 우스웠다.
10월 28일
쇄마를 지급해주지 않은 탓에 향청에 가서 의리로서 설명 할 때 날은 이미 저물어 부득이하게 머물러야했다.
10월 29일
용안역(龍安驛)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11월 1일
죽산산성(竹山山城) 밑의 주막에 도착하였다. 사내종을 보내 요(料, 요미. 급료)를 받고 쇄마를 하였다. 색리(色吏)를 불러오고 저녁에 술을 사와 마셨다.
11월 2일
척잔역(尺盞驛)에서 머물러잤다. 거제(巨濟) 현령 이정남(李挺男)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11월 3일
아침에 양지(陽智)가 쇄마하는 일로서 우병영(右兵營) 군관 한희운(韓希雲)에게 욕을 당하니 분하다. 용인(龍仁)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11월 4일
판교(板橋)에서 머물러 잤다.
11월 5일
한양에 도착하여 정원(政院, 승정원) 서리(書吏) 이정복(李正福)의 집에서 머물렀다.
11월 15일
사내종을 집으로 돌려보내다.
十五日 送奴還家
11월 16일
부방을 떠나기 위한 짐을 꾸렸다.
十六日 治赴北行裝
11월 17일
먼동이 틀 무렵 여러 친구들과 출발하였다. 동대문 근처에 있는 관우전(關羽殿)을 참배했다. 40리를 가서 누원(樓院)을 지나 양주(楊州) 녹양역(綠楊驛)을 지났다. 석현(石峴)을 의지해 넘어 4식정(息程)4을 가서 포천현(抱川縣)에 도착했다. 현이 극도로 잔약하여 밀과 쌀을 급료로 받고 사가(私家)에서 머물렀다.
11월 18일
날이 샐 무렵 출발하였다. 1식정을 가 양문역(楊文驛)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 경계가 영평(永平)땅이다. 어제 너무 재촉하여 많이 걸었더니 굶주린 말이 피곤하여 말에서 내려 걸었다. 40리를 가서 저녁 무렵에 풍전역(豊田驛)에 도착하였다. 그 경계는 강원도 철원땅이다.
11월 19일
새벽에 주인(主人)이 술을 내왔다. 50리를 가서 김화현(金化縣)에 도착하여 빈 관아에서 숙박하였다. 원주(原州) 목사도 도착하였다. 이날밤 눈이 한자 남짓 내렸다.
11월 20일
말이 피곤해서 걷다가 타다가 하였다. 저녁에 2식정을 가서 금성현(金城縣)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통천(通川) 군수 부인 일행(內行)이 들어왔기 때문에 민가에 흩어져 머물렀다.
11월 21일
1식정을 가서 창도역(昌道驛)에 도착하였다. 음식을 대접할 뜻이 없어 보여 역장(驛長)을 불러 의리로 설득하는 한편 위엄으로써 겁박했으나 끝까지 마음을 풀지 않았다. 양식이 다 떨어져서 사람과 말 모두 굶주렸으나 딱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반복해서 생각해 보았으나 뾰족한 수 를 찾을 수 없어서 다시 역장을 불러 좋은 말로 달래어 다행히 약간의 먹을거리를 얻었다.
11월 22일
20리를 가서 연흉포(連凶浦)에 도착하였다. 맥진(麥津)이라고 한다. 겨울엔 다리로 건너고 여름엔 배로 건넌다. 양쪽 언덕이 깊고 높고 험난하고 급하여 건너기가 어렵다. 10리를 가서 신안역(新安驛)에 도착한 즉 또한 공궤(供饋)할 뜻이 없었다. 또 역장을 불러 전과 같이 타일러 겨우 음식을 얻어 배고픔을 면했다. 잡곡밥이 가히 천금(千金)과 같았다. 눈도 오는 춥고도 먼 길에 집 생각을 참을 수 없어 시를 지었다.
11월 23일
당아(堂阿)의 고개와 아사리(阿士里)의 고개를 넘어 30리를 가서 회양부(淮陽府)에 이르니 관사와 민가가 모두 물에 떠내려 가고 없었다. 부사 엄인술(嚴仁述)도 촌가(村家)에 머물고 있었다. 동행한 17명이 의지할 곳은 눈 덮인 황량한 점(店)뿐 마땅한 곳이 없었다.
쌀 7홉, 좁쌀 5홉, 썩은 콩 7홉을 급료로 받아 실로 지탱하여 보존하기 어려웠다. 지나온 곳을 자세히 살피니 포천(抱川), 영평(永平), 철원(鐵原), 김화(金化), 금성(金城), 회양(淮陽) 여섯 고을의 경계였다. 종일 걸어갔으나 촌가를 볼 수 없었다. 또한 한 뼘의 논도 없었다. 이 지방에 쌀이 귀함은 말하지 않아도 가히 알수 있겠다.
11월 24일
철령(鐵嶺)을 넘어 안변(安邊)경계 지점에 도착하였다. 그 경계가 함경도이다. 50리를 가서 고산역(高山驛)의 역졸의 집에서 각각 쌀을 내어 모은 8되를 박주(薄酒) 7주발과 바꾸어 동행한 여러 사람이 각각 한 그릇씩 마시니 겨우 나그네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고개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11월 25일
70리를 가서 안변부(安邊府)에 도착하여 서문 밖의 여염집에서 묶었다. 추측컨대 최경흘(崔景屹)이 각기(角碁바둑알)를 회양 근처에서 잃어버린 듯하였다. 마치 용이 여의주를 잃고 맹인이 지팡이를 잃은 것과 같았다. 객지의 무료함을 이길 수가 없다
11월26일
아침에 출발하고자 할 때에 부사 이수원(李守元)이 쇄마 한 마리를 가져가버려 짐들을 운반하기 어려웠다. 개진하기 위해 일제히 찾아가니 부사가 병을 칭하여 만나주지 않았다. 부득이하게 짐을 사람 타는 말에 나누어 싣고 또 사내종이 등에 지고 나서니 날이 이미 정오에 가까웠다. 50리를 가서 덕원(德源)에 도착하니 부사(府使)는 벼슬이 갈리어 가고 없었다. 관사에 묵었다.
11월27일
아침부터 눈과 비로 길이 막혀서 날이 맑길 기다려서 출발하였다.
눈이 관산(關山)6을 막아서 노새와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밤을 무릅쓰고 37리 더 가서 문천(文川)에 도착하여먹고 자는 것을 모두 관아에서 했다. 먼 길을 걷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노래를 지었다.
11월28일
어제 눈과 밤을 무릅쓰고 와서 피곤하고 쇄마도 지체되어 이날도 머물렀다. 군수(郡守) 이득개(李得凱)가 병을 칭하고 나오지 않고 또 공궤(供饋)할 뜻이 없으므로 양식이 다 떨어져 뱃속이 찢어 질듯 한 굶주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뜻을 편지에 써서 수령에게 보내어 겨우 대청에 올라 밥 한 끼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종과 말은 모두 먹지 못하니 분함이 어찌 극에 달하지 않으랴. 수령에게 크게 치욕을 당했다.
11월 29일
48리 가서 고원군(高原郡)에 도착하였다. 마침 경성(鏡城)의 구 판관이 당도(신임판관이 이괄) 했으므로 우리는 사삿집에서 머물러 잤다.
11월 30일
35리를 가서 영흥부(永興府)에 도착하니 찬바람이 맹렬하여 감히 길을 갈 수 없어 할 수 없이 사삿집에서 머물렀다. 부사 이수준(李壽俊)이 나를 위해 북병사(北兵使)에게 편지를 써주었다. 친구 서너 명과 같이 술 석 잔을 마셨다. 우리 일행의 급료로 쌀과 말먹이 콩, 죽 각 5되를 받았으니 고맙고 또 감사하다
출처
https://m.blog.naver.com/joseon_500/220684594486
이 일기는 조선시대 무관(武官)이 남긴 것이라는 점에서 희소가치가 크며, 아버지와 아들의 양 대에 걸친 일기를 합친 것에서 주목을 끈다. 무엇보다 생활 주변의 자질구레한 것까지도 숨김없이 자세하게 써 놓은 것이 매우 놀랍다. 또한 17세기 변방지역의 군사 업무의 실상과 군관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는데 도움을 준다. 경상도 울산에서 함경도 회령에 이르는 노정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도로 교통의 실태도 알 수 있다. 현재 울산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부북일기(赴北日記).4
나의 아버지(가엄, 家嚴)의 갑오년(1594년, 선조 27년) 신급제(新及第, 과거에 처음 급제한 사람) 때 부방일기는 보이지 않는다.
을사년(1605년, 선조 38년)에는 일당백장사(一當百壯士)로 선발되어 부북(赴北)할 때의 일기이다. 이 때 병사(兵使, 경상 좌병사)는 김응서(金應瑞), 판관(判官, 울산 판관)은 조성립(趙誠立)이다.
부북 : 북쪽 지방에서 부방(赴防) 하는 것.
부방(赴防)은 조선시대 다른 지방의 병사가 서북 변경의 국경지대에 파견되어 방위임무를 맡은 일을 말한다.
을사년(선조 38년, 1605년) 乙巳
10월 十月
10월 15일
울산성주(城主)와 병사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10월 16일
마을의 여러 친구들이 전별연을 열어 주어 종일토록 취하게마셨다.
10월 17일
길을 떠났다. 달동(達洞) 가는 길에서 또 전별연이 있었다. 날이 저물어 장씨 성을 가진 친구 집에서 머물렀다.
10월 18일
아침 일찍 떠났다. 농소(農所)에서 아침을 먹고 바로 길을 떠나 휴암(鵂巖)에 도착하니 그 마을의 여러 친구들이 이미 강가에 모여 종일토록 전별연을 벌었다. 미시(未時, 오후3시경)에 출발하여 저녁에 모화촌(毛火村)에서 잤다.
10월 19일
신원(新院)에 도착하니 입곡(入谷), 개곡(開谷), 석촌(石村)의 여러 친구들이 다시 전별연을 벌여 취하도록 마셨다. 능지(陵旨)에 도착해 머물러 잤다.
10월 20일
몰양역(沒陽驛)에서 아침밥을 먹고 아화(阿火)-경주시 서면 아화리- 에서 말을 먹였다. 병사(兵使)가 도착하여 배알했다.
병사는 먼저 떠나고 뒤따라 출발하였다. 저물녘에 영천(永川)에 도착했다. 병사가 사람을 보내어 들어오기를 청하여 술 석 잔을 마셨다.
영천 군수(이경립, 李景立)와 저녁밥을 같이 먹고 밤이 될 무렵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처소로 돌아오니 배행(陪行) 군관이 약간의 술과 먹을거리를 가지고 왔다. 향소(鄕所)에서 또한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고 이청(吏廳)과 장관(將官)등 도 주찬을 성대히 준비하여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영천 군수가 다모(茶母), 소동(小童), 사령(使令)을 보내어 주었다. 밤이 깊도록 크게 취하도록 마셨다. 가득 모인 주객(主客)이 모두 취하고 사내종들 또한 크게 취해서 모두들 편안하게 잤다.
10월 21일
흥해(興海포항시흥해읍)의 김정협(金正冾)과 김응택(金應澤), 최기문(崔淇文), 김대기(金大器), 배응춘(裵應春), 영일(迎日포항)의 김팔개(金八凱), 청하(淸河포항시 청하면)의 이덕붕(李德鵬), 양산의 정언상(丁彦祥)도 함께 도착하였다.
나는 낮에 먼저 병사를 찾아뵙고,
“안동부(安東府)에서 점고하고 죽령(竹嶺)을 넘는 길로 가게 되면 돌아가게 되는 것이어서 극히 불편합니다. 먼저 도착한 아홉 사람은 영천군에서 점고한 후에 조령(鳥嶺)을 넘는 것으로 길을 잡으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아뢰니 병사(兵使)가 흔쾌히 승낙하였다.
들어오라는 기별을 김협에게서 들었다. 영천 군수가 나와 김정에게 각각 쌀 1두, 말먹이 콩 1두, 말먹이 죽 1두씩을 지급해 주었다. 나는 김정협(金則自)과 더불어 본군에서 아침을 먹었다. 식후에 병사가 출발하려고 할 때에 영천 군수가 들어가 병사를 뵙고 말하기를,
“울산 판관과는 평소 알고 지낸 사이이고, 오늘 삼천리 밖으로 멀리 떠나 전별연을 열려고 하니 사또(使道)께서도 행차를 조금 늦추시어 잠시 참석해 주시기를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병사가 웃으며 ‘아주 좋다’고 하여 전별연을 베풀고 난 후 거의 정오 무렵 잔치가 파하고 점고를 하였다. 병사는 먼저 출발하였고, 우리는 정오가 지나 흥해, 영일, 청하, 양산 등의 출신 군관들을 불러 큰 잔으로 두 잔씩을 먹고 출발하였여저녁에 신녕(영천 신녕면)역(新寧驛)에 도착하였다.
밤에 찰방(察訪)과 수령이 술을 가지고 전별연을 열어주었다. 동행한 친구들도 함께 술을 마시고 머물러 잤다.
10월 22일
이른 아침에 출발했다. 가는 길에 수령과 찰방에게 들러 감사인사를 드렸다. 신원(薪院)에서 말을 먹이고 군위(軍威)에서 잤다. 군위 현감(縣監)은 경상 순영(巡營)에 가고 없고향소에서 약간의 술과 안주를 들고 와서 대접했다. 이청(吏廳)에서도 술과 안주를 들고 와서 대접했다.
10월 23일
비안(比安)에 도착해서 말을 먹였다. 현감이 급창(及唱)6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들어오라 청하니 김정협과 들어가 술을 마시고 오후에 파했다. 안계역(安溪驛)에서 잤다. 안계 역장 등이 화문첩(花紋疊) 한 부와 백문석(白紋席)을 가져 와 주었는데, 화문첩은 김정에게 빼앗겼다.
10월 24일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하여 수산역(水山驛)에서 아침을 먹고 함창현(咸昌縣)에 도착하니 쇄마(刷馬)와 말먹이 콩, 죽 뿐이고 상하간에 전혀 접대하는 일이 없었다.
10월 25일
유곡(幽谷)에서 말을 먹였다. 찰방(察訪)8이 전에 알고 있던 사람이라 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을 하였다. 문경(聞慶)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함창에서와 같아 접대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고 급료로 주는 쌀도 규정만큼 되지 않아서 해당 색리(色吏)를 불러 볼기를 10대 때리고 보내주었다.
10월 26일
고사(古沙)에서 말 먹이를 주고 수교(水橋) 주막(酒幕)에서머물러 잤다.
10월 27일
단월역(丹月驛)에서 말먹이를 주고 충주(忠州)에 도착하였는데 목사는 출거(出去, 출타)하여 없었다. 처량하게 빈 관사에서 찬밥도 얻기 어려워 종과 말이 모두 굶주리어 새벽에 이르도록 뒹굴었다. 비안(比安)에서 온 벼슬아치에 대해서는 극진히 접대하는 것이 영군관(營軍官)의 몇 배에 해당하니 우습고도 우스웠다.
10월 28일
쇄마를 지급해주지 않은 탓에 향청에 가서 의리로서 설명 할 때 날은 이미 저물어 부득이하게 머물러야했다.
10월 29일
용안역(龍安驛)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11월 1일
죽산산성(竹山山城) 밑의 주막에 도착하였다. 사내종을 보내 요(料, 요미. 급료)를 받고 쇄마를 하였다. 색리(色吏)를 불러오고 저녁에 술을 사와 마셨다.
11월 2일
척잔역(尺盞驛)에서 머물러잤다. 거제(巨濟) 현령 이정남(李挺男)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11월 3일
아침에 양지(陽智)가 쇄마하는 일로서 우병영(右兵營) 군관 한희운(韓希雲)에게 욕을 당하니 분하다. 용인(龍仁)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11월 4일
판교(板橋)에서 머물러 잤다.
11월 5일
한양에 도착하여 정원(政院, 승정원) 서리(書吏) 이정복(李正福)의 집에서 머물렀다.
11월 15일
사내종을 집으로 돌려보내다.
十五日 送奴還家
11월 16일
부방을 떠나기 위한 짐을 꾸렸다.
十六日 治赴北行裝
11월 17일
먼동이 틀 무렵 여러 친구들과 출발하였다. 동대문 근처에 있는 관우전(關羽殿)을 참배했다. 40리를 가서 누원(樓院)을 지나 양주(楊州) 녹양역(綠楊驛)을 지났다. 석현(石峴)을 의지해 넘어 4식정(息程)4을 가서 포천현(抱川縣)에 도착했다. 현이 극도로 잔약하여 밀과 쌀을 급료로 받고 사가(私家)에서 머물렀다.
11월 18일
날이 샐 무렵 출발하였다. 1식정을 가 양문역(楊文驛)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 경계가 영평(永平)땅이다. 어제 너무 재촉하여 많이 걸었더니 굶주린 말이 피곤하여 말에서 내려 걸었다. 40리를 가서 저녁 무렵에 풍전역(豊田驛)에 도착하였다. 그 경계는 강원도 철원땅이다.
11월 19일
새벽에 주인(主人)이 술을 내왔다. 50리를 가서 김화현(金化縣)에 도착하여 빈 관아에서 숙박하였다. 원주(原州) 목사도 도착하였다. 이날밤 눈이 한자 남짓 내렸다.
11월 20일
말이 피곤해서 걷다가 타다가 하였다. 저녁에 2식정을 가서 금성현(金城縣)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통천(通川) 군수 부인 일행(內行)이 들어왔기 때문에 민가에 흩어져 머물렀다.
11월 21일
1식정을 가서 창도역(昌道驛)에 도착하였다. 음식을 대접할 뜻이 없어 보여 역장(驛長)을 불러 의리로 설득하는 한편 위엄으로써 겁박했으나 끝까지 마음을 풀지 않았다. 양식이 다 떨어져서 사람과 말 모두 굶주렸으나 딱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반복해서 생각해 보았으나 뾰족한 수 를 찾을 수 없어서 다시 역장을 불러 좋은 말로 달래어 다행히 약간의 먹을거리를 얻었다.
11월 22일
20리를 가서 연흉포(連凶浦)에 도착하였다. 맥진(麥津)이라고 한다. 겨울엔 다리로 건너고 여름엔 배로 건넌다. 양쪽 언덕이 깊고 높고 험난하고 급하여 건너기가 어렵다. 10리를 가서 신안역(新安驛)에 도착한 즉 또한 공궤(供饋)할 뜻이 없었다. 또 역장을 불러 전과 같이 타일러 겨우 음식을 얻어 배고픔을 면했다. 잡곡밥이 가히 천금(千金)과 같았다. 눈도 오는 춥고도 먼 길에 집 생각을 참을 수 없어 시를 지었다.
11월 23일
당아(堂阿)의 고개와 아사리(阿士里)의 고개를 넘어 30리를 가서 회양부(淮陽府)에 이르니 관사와 민가가 모두 물에 떠내려 가고 없었다. 부사 엄인술(嚴仁述)도 촌가(村家)에 머물고 있었다. 동행한 17명이 의지할 곳은 눈 덮인 황량한 점(店)뿐 마땅한 곳이 없었다.
쌀 7홉, 좁쌀 5홉, 썩은 콩 7홉을 급료로 받아 실로 지탱하여 보존하기 어려웠다. 지나온 곳을 자세히 살피니 포천(抱川), 영평(永平), 철원(鐵原), 김화(金化), 금성(金城), 회양(淮陽) 여섯 고을의 경계였다. 종일 걸어갔으나 촌가를 볼 수 없었다. 또한 한 뼘의 논도 없었다. 이 지방에 쌀이 귀함은 말하지 않아도 가히 알수 있겠다.
11월 24일
철령(鐵嶺)을 넘어 안변(安邊)경계 지점에 도착하였다. 그 경계가 함경도이다. 50리를 가서 고산역(高山驛)의 역졸의 집에서 각각 쌀을 내어 모은 8되를 박주(薄酒) 7주발과 바꾸어 동행한 여러 사람이 각각 한 그릇씩 마시니 겨우 나그네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고개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11월 25일
70리를 가서 안변부(安邊府)에 도착하여 서문 밖의 여염집에서 묶었다. 추측컨대 최경흘(崔景屹)이 각기(角碁바둑알)를 회양 근처에서 잃어버린 듯하였다. 마치 용이 여의주를 잃고 맹인이 지팡이를 잃은 것과 같았다. 객지의 무료함을 이길 수가 없다
11월26일
아침에 출발하고자 할 때에 부사 이수원(李守元)이 쇄마 한 마리를 가져가버려 짐들을 운반하기 어려웠다. 개진하기 위해 일제히 찾아가니 부사가 병을 칭하여 만나주지 않았다. 부득이하게 짐을 사람 타는 말에 나누어 싣고 또 사내종이 등에 지고 나서니 날이 이미 정오에 가까웠다. 50리를 가서 덕원(德源)에 도착하니 부사(府使)는 벼슬이 갈리어 가고 없었다. 관사에 묵었다.
11월27일
아침부터 눈과 비로 길이 막혀서 날이 맑길 기다려서 출발하였다.
눈이 관산(關山)6을 막아서 노새와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밤을 무릅쓰고 37리 더 가서 문천(文川)에 도착하여먹고 자는 것을 모두 관아에서 했다. 먼 길을 걷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노래를 지었다.
11월28일
어제 눈과 밤을 무릅쓰고 와서 피곤하고 쇄마도 지체되어 이날도 머물렀다. 군수(郡守) 이득개(李得凱)가 병을 칭하고 나오지 않고 또 공궤(供饋)할 뜻이 없으므로 양식이 다 떨어져 뱃속이 찢어 질듯 한 굶주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뜻을 편지에 써서 수령에게 보내어 겨우 대청에 올라 밥 한 끼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종과 말은 모두 먹지 못하니 분함이 어찌 극에 달하지 않으랴. 수령에게 크게 치욕을 당했다.
11월 29일
48리 가서 고원군(高原郡)에 도착하였다. 마침 경성(鏡城)의 구 판관이 당도(신임판관이 이괄) 했으므로 우리는 사삿집에서 머물러 잤다.
11월 30일
35리를 가서 영흥부(永興府)에 도착하니 찬바람이 맹렬하여 감히 길을 갈 수 없어 할 수 없이 사삿집에서 머물렀다. 부사 이수준(李壽俊)이 나를 위해 북병사(北兵使)에게 편지를 써주었다. 친구 서너 명과 같이 술 석 잔을 마셨다. 우리 일행의 급료로 쌀과 말먹이 콩, 죽 각 5되를 받았으니 고맙고 또 감사하다
출처
https://m.blog.naver.com/joseon_500/220684594486
말먹이는 여행기같네
아아니 씹헐 정보글에 왜 개추를 안박는ㅁ겨1?1
남쪽에서는 진탕 마시며 시작 좋았는데 몇몇이 혐성짓 했네
ㅆㅆㅆㅆㅆㅅㅌㅊ
술 존나 마시네
점점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못얻어먹고 빡쎄지는거 보니 왜 다들 북방으로 배치받는거 꺼렸는지 이해되네
재미있네. 돈생기면 책있나 찾아봐야지 - dc App
부북일기 6편이 꿀잼인데. 그걸 안올렸네.
바둑알 잃어버리고 심심해서 죽을거같다고 징징대는거 웃기네 ㅋㅋㅋㅋㅋ
출발할땐 매일 술파티 벌이더니 막판가선 굶어 죽을라하네ㅋㅋㅋ
ㄹㅇ옛날에는 먹을수 있을때 집어넣고 굶을때는 쫄쫄 굶네 ㅋㅋㅋㅋㅋ - dc App
말타고가도 한달반이나 걸리네
아버지랑 아들이 나이차이가 꽤 나서 한쪽은 왜란시절 인물이고 한쪽은 병자호란도 끝난 후의 인물이네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