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북일기(赴北日記).6
을사년(선조 38년, 1605년)
12월十二月
12월 1일
35리를 가서 정평(定平)땅의 초원(草院)에 도착하였다. 혹독한 추위로 인하여 머물러 잤다.
밤에 사내종이 가지고 있던 꾸러미를 잃어버렸다. 노잣돈도 역시 그 꾸러미 안에 들어 있었다. 매우 답답하였다.
12월 2일
35리를 가서 정평부(定平府)에 도착하였다. 부사가 상경하여 관아가 비어서 무학당(武學堂)에서 머물렀다. 물력이 풍성하고 전답도 넓고 기름져서 밥상위에 차려진 음식이 지금까지 것 중에 최상이었다.
12월 3일
함흥에 도착하였는데 정평에서 50리다. 넓은 들에 전답이 넉넉하고 기름지다. 사방을 둘러보니 백리까지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었다. 성의 서쪽에 성천강(成川江)은 그 넓이가 이마장(二馬場, 800미터 정도)쯤 되었다. 가로지르는 나무다리가 있는데 이름이 만세교(萬歲橋)였다. 성 아래는 거주하는 백성들이 번성하기가 장안(長安)과 같았다.
낮에 시장을 구경하고 서문 밖 이림(李林)의 집에서 머물렀다. 집주인이 비록 감영의 종이라고 하나 가계가 아주 넉넉하고 거느리고 있는 노비도 역시 많았다. 성품 또한 순후하여 대접이 아주 후하였다.
12월 4일
순찰사 앞에서 점고한 후에 동행한 각 군관들에게 무명 6필을 거두어 4필로는 소를 사고 2필로는 좋은 술인 추로(秋露) 8병을 샀다. 앞서 온 감영 군관인 함안 사람 박진영(朴震英), 안동 사람 권극수(權克壽), 남원 사람 최담영(崔淡岭)등 세 사람이 많은 기생을 데리고 와서 노래를 부르고 크게 풍류를 즐기면서 밤새도록 놀았다.
12월 5일
저녁에 초료(草料)를 주지 않는 것 때문에 순찰사에게 아뢰고 받으러 갔다.
12월 6일
30리를 가서 덕산역(德山驛)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12월 7일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35리를 가서 함원역(咸原驛)도착해 말먹이를 주었다. 35리를 더 가서 저녁에 홍원현(洪原縣)에 도착하였다. 마침 당장(唐將, 명나라 장수) 일행이 함께 도착하였으므로 우리는 남문 밖 사삿집에서 머물러 잤다.
12월 8일
아침에 당장이 떠나가고 난 뒤 현감(縣監)에게 기별을 보냈다. 현감 김충민(金忠敏)이 즉시 들어오라 청하여 함께 술3잔을 마셨다. 어제 도착 할 짐꾸러미가 오늘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 현에서 쇄마 역시 되지 않아 할 수 없이 머물렀다.
저녁에 관아에 들어가 함께 밥을 먹고 동행한 몇 사람이 홍안(紅顔, 기생)을 각자 끼고 나그네의 회포를 풀었다. 같은 도(道) 사람의 후함이 이와 같다. 내 짝이 된 여인은 은씨(銀氏)이고 나이는 18세였는데, 아름답기가 서시(西施, 춘추시대 월나라 미인)를 능가하였다. 그러나 초심을 돌과 같이 지켜 끝내 가까이 하지 않았다.
12월 9일
45리를 가서 평포역(平浦驛)에서 머물렀다.
12월 10일
45리를 가서 북청(北靑)에 도착하였다. 고을 성문 밖 사삿집에서 머물렀다.
민 정랑(閔正郞)의 편지를 판관에게 전하니 판관이 쌀 2두,콩 2두, 죽 1두를 지급해주어 객지의 곤궁함을 도와주었고 함께 들라하여 같이 많이 마셨다.
12월 11일
55리를 가서 거산역(居山驛)에서 머물렀다.
12월 12일
문고개(門古介)를 넘었다. 길 옆에 수등대(水登臺)라는 명승지가 있다. 아래로는 동쪽 바다의 부상(扶桑)이 앞에 임해 있고, 위로는 푸른 하늘의 은하수에 닿아 있으며, 좌우로는 기이한 바위와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있는데 둥지를 찾는 한 무리의 학이 점점이 흰 눈과 같다. 수등대 옆으로 난 오솔길은 마치 봉래산(蓬萊山)4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멀리서 온 사람이 얼마나 탄성을 쏟아내었는지 모른다.
57리를 가서 이성현(利城縣)에 도착하였다. 현감은 얼마 전에 무과의 시관(試官)으로서 북청에 갔다가 민가의 실화(失火)로 불에 타 죽어 수령 자리가 비었는지는 오래되었다. 객사에서 머무는데 대접이 전보다 아주 좋았다.
단천(端川) 군수 허환(許環)에게 보내는 전문(箋文)을 전하는 차사원(差使員)이 이 현에 도착하였다. 민 정랑의 서신을 전하니 즉시 들어오길 청함에 서로 만났다. 쌀 5되와 대구 2마리를 얻었다. 또 이성현의 좌수(座首, 고을 향소의 책임자)가 미주(美酒) 항아리를 보내어 나그네의 회포를 위로해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12월 13일
35리를 가서 곡구역(谷口驛)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이 제법 갖추어 살고 있어 객사에서 편안하게 묵었다. 료미(料米)도 규정대로 받았고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잤다. 밤에 눈이 한자 남짓 쌓였다.
12월 14일
아침에 눈바람을 무릅쓰고 출발하였다. 마운령(磨雲嶺)에 올라보니 서북쪽은 어두운 산이 만리에 뻗어있고 동남쪽으로는 넓은 바다가 하늘에까지 닿아있다.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나그네의 그리움을 견디기 어려워 할 즈음에 시체를 싣고 오는 사람을 보았다. 물어본 즉 안변
(安邊) 출신으로 오랑캐와의 전투에서 칼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남아의 삶과 죽음이 어찌 참혹하지 않은가.
50리를 가서 단천군(端川郡)에 도착하니 군수는 출타하고 없었다. 성내가 조용했고 인가가 드문드문 있어 처량하였다. 괴롭고 고생스럽게 밤을 지냈다.
12월 15일
45리를 가서 마곡역(磨谷驛)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12월 16일
새벽에 출발하여 마천령(磨天嶺)에 올랐다. 여산(驢山)의 높음과 촉도(蜀道)의 험난함도 여기에 비하지는 못할 것이다.
파랑강충이 같은 벌레나 곰, 이리 같은 맹수가 대낮에도 돌아다니며 울어댔다. 45리를 가서 영동역(嶺東驛)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또 시체를 싣고 가는 자를 우연히 만나서 물어본 즉 충청도 공주 사람으로 일당백장사로 부방하던 중 사망하였다고 했다. 참혹하고 참혹하다. 몇 잔의 탁주와 한 그릇의 건어물로 제사지내 주었다.
12월 17일
20리를 가서 임명역(臨溟驛)에 도착하였다. 눈이 많이 내려 오갈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빈 관사에서 묶었다.
12월 18일
2식정을 가서 길주(吉州)에 도착하였다. 서문 밖 사삿집에서 묶었다.
길주 목의 군관인 진주사람 강웅일(姜雄一)을 만나서 서로 얼싸안고 방으로 들어가서 회포를 풀었다. 큰 술잔으로 4잔을 마시니 빈 속을
타고 내려감에 술기운이 갑절로 불어나는 것 같았다.
12월 19일
머물렀다. 동행하며 고통과 편안함을 함께 나눈 영일, 성주 사람은 전부 6명이었다. 길주 목사는 일찍이 방어사(防禦使)로 남쪽에서 근무할
때 서로 알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병사에게 문서를 보내어 좀 더 머물게 조치해 주었다. 이날 저녁에 뒤에 남는 사람들이 술을 사서 전
송연을 열어 주었다. 나는 기일(忌日제삿날)이어서 홀로 빈 집에 앉아 있으니 심사가 심히 어지러웠다.
12월 20일
눈보라가 크게 일고 추위가 심하여 뒤에 남는 여러 벗들과 더불어 서로 안고 울면서 이별하였다. 강웅일이 또 전별연을 열어 주어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날이 저물어 출발한 즉 눈바람이 차갑고 어두워 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술기운이 얼큰한 가운데 밤을 무릅쓰고 겨우35리를 가서 고참역(古站驛)에 도착해 한 민가에 들어갔다. 주인영감(主翁)이 온돌을 쓸고 닦아 주었고 곧바로 맛있는 밥을 지어 주었다. 상하가 모두 따뜻하고도 배부르게 먹어서 다행히 굶주림과 추위를 면했다. 은혜를 감히 잊기 어렵다. 동행한 이들과 작별하니 이별의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워 시를 지어 가로되,
'風寒雲暗 雪其䨦 犻向關山淚萬行 同作北征吾犻遠 傾電何處歡相望'
12월 21일
45리를 가서 명천(明川)에 도착하여 북문 밖 사삿집에서 묶었다. 수령 양집(梁楫)이 주찬을 보내와 객을 위로하였다.
12월 22일
쇄마가 되지 않아 머물렀다. 들어가서 수령을 뵈니 극히 후하게 대접하여 크게 취한 뒤 물러 나왔다.
12월 23일
50리를 가서 경성 땅의 주촌역(朱村驛)에 도착하였다. 역인(驛人)들이 사나워서 불그스름하게 변한 좁쌀에 지푸라기와 돌도 가려내지 않고 밥을 지어 주었는데 밥상에는 염채(鹽菜, 김치)도 없으니 나그네의 어려움을 입으로 다 말할 수 없다. 낮에 귀문관(鬼門關)을 지나는데 그 땅의 형세가 그림자 진 것이 음침하였다.
12월 24일
또 쇄마가 원활하지 않아 머물렀다.
12월 25일(부제 : ☆☆☆크리스마스☆☆☆ 선물)
새벽닭이 울 때쯤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다. 45리를 가서 영강역(永康驛)에 도착하여 말먹이를 주었다. 또 45리를 가서 경성(鏡城)에 도착하여 남문 밖 사삿집에서 머물러 잤다. 밤에 동행인들과 함께 걸어서 성문으로 들어가니 관사는 고풍스러웠다. 배회하면서 산보할 즈음에 한 아리따운 여인이 비취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연꽃같이 가벼운걸음걸이로 가벼이 와서 나를 보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지나갔다. 우리들이 오랫동안 눈여겨보다가 마침내 말을 붙여 가로되,
“우리는 영남의 풍류지도(風流之徒)인데 조정에 이름이 알려져 일당백장사로 북쪽 변방을 지키러 선발된 사람들이다. 경화(京華)의 보물을 가지고 오지 않음이 없으니 원컨대 교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아리따운 여인이 먼저 뜻을 알고 살짝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변방의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을 보배로 여기지 않고 청하여 함께 노는 것을 보배롭게 여깁니다.”
하였다. 함께 주인집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놀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아리따운 그 여인의 이름은 애춘(愛春)인데 자는 석향(釋香)이다. 나이는 20세이고 가사에 능하며 또 문자를 알았다.
12월 26일
쇄마하지 못하여 머물렀다. 이날 아침에 애춘이 어여쁜 여자와 함께 나를 찾아와 말하길
“어제 저녁에는 긴한 일이 있었던 고로 심히 부끄럽습니다만 부득이 오늘 다시 왔습니다.”
하였다.
이에 방으로 들라 하였다. 따라온 아리따운 여인의 나이는16세인데 모습은 서시(西施)가 놀랄 정도이고 아름답기가 왕소군(王昭君)을 능가하였다. 나삼(羅衫)을 반만 여민 자태는 가을 구름 뒤에 숨은 달 같았고, 비취색 소매에 웃는 모습은 봄 연못에 비친 연꽃 같았다. 이름은 금춘(今春)이고 자는 월아(月娥)이다. 가사와 바둑 같은 기예에도 능하지 않음이 없었고, 또 거문고와 가야금에도 능하였다.
저녁 무렵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어찌 춘정이 없으리오? 그러나 초심을 돌과 같이 지켜 끝내 가까이 할 뜻이 없었다. 저녁에 순찰사의 영을 받아 판관이 술과 반찬을 보내주었다. 내 숙소에서 여러 지인들과 함께 마셨다.
12월 27일
또 쇄마가 되지 않아 머물렀다.
새해가 가까워지니 변방의 나그네의 근심이 만 갈래로 갈라지던 중에 금춘 등이 스스로 와서 웃으며 말하길
“낭군은 우리들을 비천하게 여기지 마시오. 어제 저녁에는 어둑어둑해서 방문한 즉 여러 친구들이 한방 가득히 있었던 고로 그냥 왔다 그냥 돌아갔었습니다.”
하였다. 함께 어울려 저녁때까지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탕한 기운의 남아가 반년이나 집을 떠나 있었으니 어찌 춘정이 없으리오? 초심을 망각하고 마음을 정하지 못하여 드디어 한곡을 지어 주기를,
중략
이날 밤 금춘과 함께 동침하여 못내 잊혀지지 않는 정을 다하였다. 김공은 여자를 가까이할 뜻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날 밤 애춘과 함께 동
침하였다.
12월 28일
또 머물렀다.
12월 29일
판관이 주찬을 보내주어 과세(過歲, 설을 쇠는 비용)의 비용에 보태었다. 나의 숙소에서 여러 지인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결국 함락당하는거 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