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SASR 대원+빅토리아 십자장 수훈자 분과의 짧터뷰를 올렸다 잘렸는데, 그건 나중에 다시 올리겠음.)
원래 2015년에 작성한 글이니 그 점 참고 바람. 글자수 제한으로 인해 원문을 조금 잘랐음
= 이전 글들처럼 잘려서 보일 경우 원문 링크로 = https://blog.naver.com/qls2018/221198177563
광복군동지회장은 이후 김우전 지사님께서 역임하셨다가 지금은 다시 김영관 지사님께서 역임 중이심.
아마 광복절 행사 때나 육사 졸업식 관련해서 사진 본 사람도 있을거고, 얼마 전에는 국가보훈처 CF에도 출연하셨더라구.
6.25 당시에 대해 질문드렸을 때는 별말씀 안해주셨지만 화랑무공훈장 수훈자이신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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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위치한 광복군동지회 사무실에 방문하여 ‘김영관(金永寬)’ 광복군동지회장님과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인터뷰 진행에 앞서 제 블로그 등에서 질문을 수렴했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기다리고 계셨던 분들이 계실텐데, 완성이 늦어진데 대해 사과를 드리며 동시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본래 계획대로는 4월이 되기 전에 모두 마무리하고 올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여 개인 사정으로 이제야 올리게 됐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1부를 시기적으로 적절한 광복 70주년에 딱 맞춰 올리게 된 게 행운이네요!
(분량상의 문제로 1,2부로 나눠서 올리며, 모든 사진은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김영관 회장님께서는 1924년 9월 15일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20세이던 1944년 9월 일제에 의해 강제 징병된 후 동년 10월 중국 절강(浙江, 저장)성 금화(金華, 진화)시 의오(義烏, 이우)현에 주둔 중인 ‘요코이(橫井)’ 부대에 배속되셨고, 이후 동년 11월(혹은 12월) 탈출하여 중국 중앙군(국민당군) 제3전구 ‘충의 구국군’ 총지휘부를 거쳐 광복군 징모 제3분처에 입대하여 광복 때까지 항일 공작 활동을 전개하셨습니다.
또한 1950년 6.25 발발 이후에도 육군종합학교에 입학, 소위로 임관하신 후 참전하셨고(이후 육군 대위로 예편) 전후에는 사회에서 제16대 철도청 차장 및 홍익회 회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 김영관 회장님의 사진으로, 철도청에서 근무하실 당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간 위와 같은 공훈들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 녹조근정훈장,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1963년),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등을 수여 받으셨으며, 현재는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으로 재임 중이십니다.
1. 광복군 입대 전의 삶 : 광복군 입대 전의 삶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광복군 입대 전의 삶…. 내가 1924년생이기 때문에, 1910년에 나라가 망했잖아? 나라가 망한지 14년 후에 태어나 초등학교(당시에는 보통학교라고 했어.)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서울대 사대) 재학 중에 일본 군대에 끌려간 거거든?
내가 그 당시의 분위기를 먼저 얘기할게. 그때에 시골 초등학교에는 선생이 많지 않았어. 7명인가 밖에 안 됐어요. 당시 교장 선생하고 담임선생이 일본 선생이었는데, 완전히 차별대우를 했어.
일본 학생들과 우리나라 학생들을 말인가요?
선생들을 차별하는 거야. 무슨 얘기인고 하니, 그 두 사람만 일본 사람이고 나머지는 한국 사람이거든? 왜, 학교 끝나고 청소하며 교무실 들어가서 선생한테 들락날락하잖아. 방과 후에 들어가면 교장은 퇴근하고 없으니까 한국 선생들은 다 조선말 (그 때는 일본말을 국어라 하고 우리말을 조선어라고 가르쳤어.) 쓰며 서로 웃고 있는데 일본 선생이 다녀가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어린 속마음에 “아, 저 선생이(‘사사끼’라 했는데 이름도 잊어버렸어. ‘사사끼 가쓰시’라고 말이지.), 당신 선생이 우리 한국인 선생들하고 조선말이 싫어서 그러는구나.”라고 생각했었지.
그리고 몇 년 후에, 한 1년 후에 한 선생이 (내가 다니던) 경기도 북부에 있는 포천에서 영종도로 전근을 갔어요. 지금도 경기도 북부에서 영종도로 간다면 거리가 먼데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에 산골에서 갔다면 사실상 좌천된 거지.
그 선생을 내가 좋아했어요. 나한테 음악도 가르쳐주고, 조선어도 가르쳐주고 또 그분 부친이 우리 할아버지하고 친했고 말이야. 그런데 그 좋은 분이 가니까 어린 마음에 또 괘씸하더라고. 속으로 “아, 일본 놈들이 그랬구나” 싶었지. 그런데 며칠 후에 일본 선생(담임선생)이 얼굴이 불그스름해서는 “며칠 전에 전근 간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다.” 내가 아까 얘기했듯이 교장 선생이 퇴근하면 교무실에서 일본말을 안 쓰고 조선말로 떠든다 이거야.
그래서 “아, 내 말이 맞구나”하고 어린 마음이지만 (그때가 초등학교 4,5학년 정도 됐었을 때야.) 흥분하고서는 “저 일본 놈들이 나쁘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또 분위기가 전부 배일(排日), 그 당시에 보통 다 일본을 싫어했거든. 분위기가 그런 와중에 그랬으니 더 그렇지.
그 후에 내가 서울에 있는 중학교로 갔는데, 그 학교가 일본 애들과 공학인 학교였는데 그곳에서 차별이 심했어. 그리고 이제 군대 갈 나이가 됐는데 말이야, (징병이지 징병. 내가 징병 1기에 해당돼.) 선생이 되면 군대에 가지 않는다는 거야. 선생은 가르쳐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중학교 졸업반이 되가지고 선생한테 가서 “사범학교에 갈 테니 원서를 써 달라.” 했더니 안 된다는 거야.
일본인 선생이 말인가요?
일본 선생이지 물론. 다 일본 선생이었어.
왜냐면 “졸업하고 취직해서 나라를 위해서 일해라, 봉사해라.” 이런 얘기인거야. 그래서 그 선생이 인천에 있었는데 서울서 기차를 타고 가서 “선생님 부탁합니다. 저 공부 좀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러면, 아마 어렵겠지만 써주마.”하며 써 줘서 보니까 120명인가 모집하는데 일본 애들이 그냥 떼로 몰려왔어요. 일본 애들도 뭐, 걔들도 군대 가고 싶지는 않거든.
그래서 이제 경쟁률이 15대 1인가 그랬던 걸 통과했는데 전제조건으로 재학 중에는 군대를 가지 않는다더니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일본군에 징집이 됐어요. 학교에서 일본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고 군대에 징집된 건 나 하나뿐 인거야. 이게 아마 고향에서 보낼 사람이 없어서 그냥 집어넣은 건지, 아니면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게 됐어. 징집이 되지 않는다는 조건 때문에 간 건데 말이지.
(김 회장님께서 일제의 징병통지서를 받으셨던 것은 경성사범학교 입학 약 5개월만인 1944년 9월의 일이었다.)
일본 군대에 끌려갔는데 함흥으로 갔다가 딱 1달 훈련받고 부대가 중국으로 갔어요. 그래서 중국으로 가면서 “아, 내가 예전에 중경에 임시정부가 있다는 걸 들었으니 그리 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었지. 전에 초등학교 5학년 적에 조선 애들끼리 놀면서 (당시 ‘한국’이 아니라 ‘조선’이라 그랬으니까.) 우리끼리 얘기하며 중경에 임시정부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걸 알게 되고나니 “망국의, 나라 없는 백성이 아니구나.”하며 굉장히 흥분했었지. 물론 그때는 어린 학생으로서는 뭘 어떻게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야.
이제 탈출해서 거기서 중경으로는 못 가고 결국 광복군에, 현지에 있었는데 ‘이렇게 거리가 멀다’하는 걸 알려주려고 얘기해준 거야.
- 아나키스트(Anarchist): 무정부주의자를 의미한다.
- 신사군(新四軍): 정식명칭은 '국민혁명군 육군 신편제4군(國民革命軍 新編第四軍)'으로, '팔로군(八路軍)'과 더불어 중국 공산당의 주력 부대 중 하나였다. (자세한 것은 검색을 추천함)
- 국부군(國府軍): 국민당 정부군을 의미한다.
- 김유길 전 광복군동지회장님께서는 현재 유일한 제2지대 출신 생존자이시다.

복붙하니깐 굵게한 것도 취소되네... 이건 걍 원문 보는 걸 추천함
진짜 대단하신 분이네
지금 생존해계신 광복군 출신 지사님들 전부 대단한 분들이심. 징병된 후 탈출해 고생하며 광복군 입대하고 해방 후 국공내전 와중에 힘들게 귀국한 후에는 한국전 참전하시고...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