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가장 유명할 한강 철교 폭격.
미 공군은 1950년 6월 29일 모든 한강의 교량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려 폭격을 개시했고, 7월 1일의 대량폭격을 기점으로 계속해서 한강 철교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실시했다.
이에 맞서 북한군은 서울 시민들을 동원해 교량 복구 작업을 밤낮으로 진행하였고, 북한의 신속한 교량 복구를 방해하기 위해 미 공군은 7월 26일부터 지연신관을 사용한 시한폭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짧게는 수 초부터 길게는 수 주 뒤에야 폭발하는 폭탄은 민간인들에게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주어 복구를 지연시켰다.
1950년 6월 29일 제20공군 소속 B-29가 서울역을 폭격하는 모습.
6월 28일 존 H. 처치 전방지휘소 겸 주한연락단(ADCOM)장이 주한미대사관을 통해 보낸 전문에서 제시한 폭격 표적은 다음과 같다.
1. 남한의 사기 진작 측면에서 우선적으로 선정된 목표물은 다음과 같다.
(A) 서울역
(B) 주한미대사관 차량기지. 이 구역에 30대의 탱크가 집결되어 있다. 김포로부터 서울로 들어가는 교량으로부터 1마일 지점이다. 각각의 목표물에 최소한 3대의 B-29기 폭격이 필요하다. 폭격은 가능한 한 6월 29일에 이루어질 것을 요청한다.
(C) 적의 선전방송국. 서울 중앙 방송국으로부터 북쪽 방향으로 2마일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언덕에 눈에 띄는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다.
2. 한강 북측 제방에 위치하고 있는 군대 집결지, 대전차포, 기관총, 군 시설물 등[(980.4-1640.6)에서 (1010.1-1640.2)의 지점]. 식별이 어려우면 은폐지로 보이는 곳을 마구 공격하라.
3. 김포 공항북방 1마일에서 동쪽 방향으로 서울로 진입하는 모든 군대, 탱크, 자동차 및 군사 목표물들.
4. 한강 북측 제방 근처의 교량들에 설치되어 있는 대전차포(990.4-1630.7지점).
5. 현재 이다즈께기지에 있는 B-26과 F-82 조종사들에게 제시된 지역이나 목표물들
6. 발견되는 모든 탱크.
이에 따라 제20공군은 6월 29일과 30일 한강 북한의 표적들을 공격했고, 29일에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으나 30일의 폭격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을 폭격해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가장 극심했던 미 공군의 서울조차장 폭격.
미 공군은 7월 16일과 8월 4-5일, 8월 20-21일, 8월 25일 등 꾸준히 B-29를 동원해 서울조차장을 폭격했다. (짤은 시간순이 아님)
이러한 미 공군의 작전은 전선의 북한군 부대에게 보충병력과 보급품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교통 요충지를 파괴하는 차단작전의 일환이었다.
7월 16일의 폭격은 극동공군 제19폭격전대와 제22폭격전대 소속 B-29 47대에 의해 이뤄졌으며 500lb GP 폭탄 1504발을 투하했다.
하지만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것은 서울조차장만이 아니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서울시립대 교수 손정목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어둠 속 독서에 지쳐 후암동에 있는 은사댁을 다녀오기 위해 남산에 오른 1950년 7월 16일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당시 울창한 솔밭이었던 남산을 오르려면 오솔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폭이 너무 좁아 차량은 다닐 수 없었다. 지금의 해방촌 언덕을 지나 남산 능선에 오른 순간 요란한 비행기 굉음에 놀라 뒤돌아보았더니 남쪽 하늘이 미군 폭격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때 1시간 가까이 지켜본 폭격장면은 평생 가장 무서웠던 체험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이날 폭격으로 용산 일대가 완전히 파괴됐다. (중략) 피해지역은 이촌동에서 후암동·원효로를 지나 마포구·도화동·공덕동에 이르렀다. 일제시대 대표적 건물의 하나였던 용산역사, 철도국, 용산·마포구청 등이 이날 파괴됐다. 이날의 대폭격 외에도 북한에 점령된 석달과 인천상륙작전, 1·4후퇴를 거치면서 서울은 수많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다시피 했다.
또한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성칠은 7월 16일 일기에서 용산의 군사 및 교통시설뿐만 아니라 당시 북한에서 온 월남민들이 모여 살던 해방촌이 맹폭을 입어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해방촌은 당시 서울 조차장과 비교적 인접했을 뿐더러 주택이 밀집되어 있고 인화성 자재가 많아 오폭과 그에 의한 화재의 가능성이 있다.
당시 서울시민 사망자와 부상자 통계. 1950년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 수복 직후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조사해 분석했다.
이에 의하면 가장 큰 사망자를 낸 원인이 바로 공중폭격(4250명)이었고, 그 중에서도 폭격이 집중된 용산구의 전체 사망자와 폭격 사망자가 각각 2706명과 1587명으로 가장 많았다. 김성칠 교수의 일기에 기록된 해방촌 참사가 무근거하지 않으며 당시 서울지역 폭격의 대표적인 민간인 피해 사례라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출처
김태우. (2009). 한국전쟁기 미 공군에 의한 서울 폭격의 목적과 양상. 서울학연구, (35), 273-304.
Air Force Activities - Korea, Part Ⅲ. NARA, RG 342.
김태우 저 양반이 쓴 폭격이란 책이 좋던데 - dc App
김태우 저 아조씨 논문들 재밌는거 참 많음.
확실히 미국없었으면 진작에 통일됐을거란 말이 맞는득
적화로?
안타깝습니다
전쟁하면 결국 죽는 것은 시민이구나 ㅜㅜ
2머전때 엘랑스 폭격 피해랑 비교하면 어느게 더심하냐
저렇게 폭격맞아도 북한의 낙동강전선 방면군에 대한 보급을 차단못했다는게 무섭지. 그래서 결국 물리적으로 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인천상륙작전이 고안된 면도 있음.
북한의 대응법은 일단 주간에는 복구인원 빼고는 다 숨고 야간에만 수송을 계속하는 것임. 열차는 낮에는 터널 안에 숨는 식으로 말이지. 그리고 주요 목표가 된 다리는 물살이 얕은 경우에는 항공정찰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잠수교 비스무리한거 만들어서 수면 아래 아주 얕게 설치해놓거나 아예 밤에만 설치하고 동틀때 철거하는 가설식 다리까지 현지에서 자체제작해서 사용했음. 이런 건 현지에 있던 사람이 아군 방어선까지 달려와서 귀순해야만 알 수 있었고 실제로 몇 개 알아내서 야간폭격으로 박살내기도 했음.
그런데 이런 편법을 써도 철도는 단거리 수송밖에 못하고 자동차도 부족하니 결국에는 수송로 근방의 마을을 통제로 강제동원해서 인력으로 피스톤 수송하는 극약처방을 내림. 이래서 최소한의 소화기 탄약이나 물자같이 인력운반이 가능한 것들은 1일 약 40킬로에서 50킬로의 속도로 낙동강 전선에 도달하고 가끔 열차로 T-34 전차같은 걸 증원함. 그래서 8월공세 망해먹은 후에 9월공세가 가능했던 것임.
물론 미국의 폭격이 성과가 없는게 아님. 성과는 많았는데 그 정도로는 보급선이 완전단절 안된다는 것이고. 실제로 북한군의 병력 숫자와 무기, 장비의 양과 질은 8월공세보다 9월공세때가 오히려 병력은 줄고 장비도 빈약해지는등 망조가 났음. 특히 식량의 경우에는 원래 가을추수직전의 식량부족기인데다가 낙동강 전선지역 특성상 곡창지대가 아니므로 현지자급도 간신히 가능해서 북한군이 병력을 집결시켜서 한 곳을 뚫어버리는 작전이 불가능했음. 일단 모이기만 하면 식량고갈되고 굶어뒤지니까. 그래서 8월공세처럼 전 방면에서 분산공격하다가 어디 뚫리면 근처 병력을 선두로 해서 증원군이 되서 구멍 뚫린데로 병력 집중가능한거 다 털어넣기로 함.
참고로 북한군의 경우 8월공세 이후에는 아무리 못해도 약 33퍼센트 이상이 남한에서 강제징집한 말만 그럴듯한 의용군임. 북한군은 아무리 늦어도 제2차 의용군 모집때부터 남한에서 강제징병 시작했고 제5차 의용군 모집때부터는 가택수색에 길거리에서 가두모집하면서 강제납치하는 식으로 병력으로 쓸만한 남자들을 다 잡아갔음. 그래서 북한군 공격을 막아낸 후에 전장청소하다가 북한군 옷 입고 신음하는 동생 발견하고 그러는거다. 이게 내전의 특징중 하나인데 점령지 주민은 그 즉시 동원가능한 우리주민으로 간주하는 거지. 물론 생각 차이같은건 무시하고 극반항하는 놈 몇놈 공개총살하면 나머지는 따르게 되어있거든.
팩트)빨갱이새끼들이 먼저 전쟁일으키지만 않았어도 미군이 저렇게 폭격할 일도 없었다
ㅇㄱㄹㅇ 팩트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니깐 누가 전쟁하랬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스탈린도 반대한걸 지멋대로한 병신새끼
그리고 미국 폭격으로 가장 많이 파괴된 다리중 하나는 임진강철교임. 여긴 바로 근처에 대도시도 없다시피하니까 복구인원도 부족해서 말 그대로 교각 빼고 상부구조물이 완전파괴되었고 덤으로 교각도 몇개 완파됨. 얼마나 철저하게 날아갔는지 북진작전때도 거의 신설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기간내 복구가 불가능해서 임진강철교 근방까지 철도로 물자 나른 다음 트럭에 싣고 임진강에 걸린 부교를 건넌 후에 개성에 도착해서 물자를 쌓아놓는 비효율적인 수송을 해야 했음. 그래서 유엔군과 국군 최선두가 압록강과 임진강에 도달할 때도 여전히 철도중단점은 임진강철교라 수송작전에 많은 지장이 있었음. 북한 내에 남은 철도를 쓰긴 했지만 일단 중간에 끊긴게 많아서 역시 비효율적이었음.
아, 그리고 미국이 남한내에 한 폭격은 그나마 자기네들도 정밀폭격 하려고 한것임. 북한 지역은 알짤없이 융단폭격 바로 들어갔고 도시가 송두리째 사라짐. 사실 민간인 피해 감안안하는 인권 의식 제로의 살인마같은 생각하면 그냥 서울에 융단폭격 때리는게 더 성과가 좋음. 수리할 사람이 도망가거나 죽으니 북한이 용을 써봐도 한강철교를 제대로 수리못하거든. 나름대로 미국도 한국을 생각해서 정밀폭격했고 그 바람에 성과가 영 아니었지. 그리고 당대 정밀폭격기술로는 목표 근방의 주거지 같은 건 약간의 실수만으로도 같이 박살난다. 현대와 같은 정밀유도폭탄이 깔린 시대가 아니라 멍텅구리 폭탄으로 하는 정밀폭격이니까 답이 없었음. 미군이 일부러 폭격해서 민간인 살해하려고 하진 않았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는 있어.
이런거 보면 진짜 전쟁은 일어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압도적인 국력을 바탕으로 적국의 전쟁 의지를 초장부터 밟아야 함
그러고보니 1년전에 한강철교에서 불발탄 발견되었었는데 저때 뿌린건가 보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