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일전에도 올린 장지량 장군 회고담이나 해방 직후 소련군의 기행에 대한 회고록이 실려있던 책인 '8.15의 기억'.
45년 8월경 일본군에 강제 징집돼서 관동군에 배치됐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돼서 48년 12월까지 시베리아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셨다는데, 그 와중에 겪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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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냥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은 거지요. ‘아무래도 적성국가에서 왔기 때문에 뭔가 물들었을 것이다. 지령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라고 의심을 해 개별심사를 받아야 했어요. 극도의 사상대립과 냉전시대라는 걸 그때 우리는 몰랐죠.”
빨간 종이의 입대명령서
저는 만주에서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그 전에 우선 만주로 가게 된 이유부터 말해야겠군요. 194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어요. 당시 만주에는 지금으로 말하면 재무부에 해당하는 만주국 경제부라는 게 있었는데, 하루는 거기 간부 직원이 찾아와 졸업생을 대상으로 채용시험을 보게 했습니다. 나는 막연히 독립군들이 활약했던 만주로 간다면 뭔가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시험에 응했고 합격했어요. 그런데 근무지에 배치되어 일하다가 징병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갑종 판정이 나왔어요. 만약 적당한 핑계를 댔다면 빠질 수도 있었겠지만, 신체 건강한 스무 살 젊은 나이로는 빠질 이유가 도무지 없어 보였어요. 결국 1945년 8월 9일 소집영장이 나왔고, 나는 기차를 타고 북만주 소만국경으로 갔던 겁니다.
당시 입대명령서는 빨간 종이였어요. 입대 부대명과 날짜 등이 기재되어 있어요. 일본말로 ‘아까가미’라고 했는데 소위 소집영장이죠. 왜 빨간 종이를 사용했나 하면 천황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빨간 종이는 절대 거역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만약 영장에 응하지 않고 도망가면 가족이 몽땅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그러니 도망간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어요. 그때 전쟁 나가면 다 죽는 줄 알았으니까, 더구나 조선인은 최전방으로 보냈어요. 입대명령서가 20일 전에 나왔는데, 고향으로 연락하니까 아버지가 만주까지 직접 오셨어요. 아버지는 말씀하셨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라. 최전방에 나가지 말고 총알을 피해서 살아 남아라.”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입대하자마자 해방이 되었잖아요. 나나 아버지나 그 무렵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항복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군가를 부르며 자결하는 일본 사람들
그때의 상황을 좀더 말해보자면, 그날 아침 기차를 타고 하루종일 달려서 저녁 무렵에는 소만국경의 ‘하이라얼’(海拉爾)이라는 큰 도시에 도착했어요. 빨간 벽돌로 크게 병영을 지어 놓았는데 일본 관동군 362부대였어요. 소만 국경수비대 임무를 맡고 있는 연대 규모의 부대죠. 그런데 저녁을 먹고 군복을 갈아입고 있는데, 소만 국경 전지역에 걸쳐 소련군이 일제히 침공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벌써 하이라얼 시내가 벌겋게 불타고 있었지요. 일본놈들은 혼비백산 상태에 어쩔 줄 몰랐죠. 그러더니 탱크 소리가 들려오고 야크기, 소련 전투기가 두 대씩 편대가 되어 조명탄을 쏘며 기총소사를 몇 번에 걸쳐 하는거예요. 부대가 들어가자마자 그런 일을 겪었던 겁니다.
그때 일본군 사단사령부가 흥안령(興安嶺) 에 있었어요. 거기서부터 남쪽 88킬로미터 지점에 흥안령산맥이라고 천혜의 요새인데, 소련군과 맞설 최후의 저지선을 그곳에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탄약과 무기도 제법 있었고 식량과 피복도 있었죠. 상부에서 거기까지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그러니까 부대를 전부 집결시켜서 장비를 점검하고 출발했어요. 그 많은 사람과 장비를 기차에 다 실을 수 없으니까 병력은 걸어서 이동했죠. 그때 나는 입대하기 2, 3일 전부터 엉덩이에 큰 종기가 나기 시작해 입대하던 날에는 아주 커졌는데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소대장에게 이야기했더니 기다렸다가 기차를 타고 오라고 하더군요. 당시 ‘인입선’이라는 철도가 부대 정문 앞에 들어와 있었는데, 무기 · 탄약 · 총 등 군수품을 모두 싣고 군인 가족들과 걷지 못하는 환자들을 기차에 태웠어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기관차가 안 와요. 도시는 불타오르고 탱크 소리는 지척에서 들리는데 기관차가 안 오는 거예요. 그러더니 정보가 들어오기를 하이라얼로 들어오는 철로가 폭격에 끊겼다는 겁니다. 그러자 잔류 부대 책임자인 일본군 중위가 군인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두 모으고는 말했어요.
“이제 소련군이 들어오면 모두 강간당하고 죽는다. 그러니 치욕스럽게 죽느니 알아서 자결하라!”
그러더니 ‘우미유까바’라는 죽을때 부르는 노래를 합창시키고 총칼을 나눠줬어요. 장교나 하사관들 부인처럼 관사에 살던 군인 가족이 2, 30명 됐는데, 부녀자들이 아기를 안은 채 서로 찌르고 쏘며 죽어갔어요. 자기가 못 찌르면 옆 사람이 찔렀어요. 중위가 권총을 뽑아들고 다시 명령했어요.
“어차피 죽으니까 다 자결하라.”
모두 우미유까바를 합창하면서 죽어갔어요. 그 광경을 나는 다 봤죠. 그러고는 시신을 화차에 실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어요. 탄환도 불길 속에서 폭발하며 마구 튀었고 군수품은 모조리 불탔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515부대에서는 병사들한테 목총에 대검을 메가지고 결사대를 조직해서 내보냈어요. 하이라얼 시내로 뛰어들어가 한 놈의 소련군이라도 찌르고 죽어라 이거죠. 탱크가 밀려들어오는데 몰살당했지요. 그 사람들도 내 눈앞으로 가는 걸 직접 봤어요.
나는 아비규환과도 같은 전장에서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그런데 어떤 아이가 우물쭈물하고 있더라고요. 혹시 조선 아이인가 해서 말을 걸었더니 같은 기차로 온 녀석이었어요. 부대 안에서는 일본말만 하니까 서로 몰랐던겁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말을 잘했어요. 그때 마침 불바다가 된 하이라얼 시내에서 마차가 한 대 빠져나오는 거예요. 중국 사람으로 보이는 자가 짐을 싣고 남쪽으로 황급히 피난 가는 중이었지요. 우리는 총을 들이대며 위협해 그 마차를 타고 갔어요. 6, 7 킬로미터를 가면 ‘하얼’이라는 조그만 간이역이 나와요. 하이라얼 남쪽에 있는 첫 번째 정거장이죠. 그곳을 향해 밤새 달렸어요.
몸으로 탱크를 막는 관동군
하얼 역에 도착하니까 거기도 역시 화차에 짐을 잔뜩 싣고 지붕에는 전날 도보로 출발한 일본군 가운데 낙오된 병사들이 타고 있었어요. ‘이제 됐다’ 싶어 올라탔는데 야크기가 또 오는 거예요. 마치 기관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죠. 지상으로 쫙 내려와 드르릉 쏘고는 사라지고 2, 30분 있다가 다른 편대가 또 왔어요. 비행기가 올 때마다 우리는 사람 키보다 더 큰 옥수수 밭으로 몸을 숨겼어요. 8월이라 옥수수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지요. 그렇게 타다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이틀 만인 8월 11일 흥안령에 도착했어요. 이제 걸어서 산에 올라가니까 참호를 파놓고 마지막 격전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흥안령을 통과해야만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었기 때문에 거기가 최후 방어선이었죠.
그때 일본 관동군이라는 게 60만 명이나 있었지만, 남쪽에서 자꾸 죽으니까 그쪽으로 보내고 남아 있는 병력은 실제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제대한 예비역들을 다시 소집했어요. 보충병이라지만 서른 살이 다 넘었어요. 그게 당시 관동군이에요. 그러니 싸울 의지도 없고 무기도 형편 없었지요. 기관총은 한 정도 없고 구식 장총밖에 없었지. 그나마 흥안령 사단사령부에 조그만 야포와 박격포가 몇 문 있긴 했지만 대전차포가 없으니까 속수무책이었어요. 소총 쏴봐야 철판이 두꺼우니 소용없고……. 그래서 일본놈들이 생각해낸 것이 육탄으로 탱크를 저지하겠다는 거예요. 우선 사람 가슴에다 TNT를 6개씩 묶어 거기다 뇌관을 꽂고 그대로 달려가 부딪치는 거지요. 그걸 보고 ‘급조 폭뢰’라고 했어요. 전차와 부딪히면 사람은 형체도 없어요. 산산조각 없어지는데, 탱크는 그냥 빙그르르 돌든가 덜컥 한 번 요동만 하고 말아요. 절대 안 부서져요. 간혹 캐터필러가 끊어지는 수는 있어도.
5명, 10명씩 조를 짜고 뒤에는 일본 놈 하사관들이 권총을 빼들고 따라가요. 도망갈까봐.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는데, 연병장에 모아 놓고 특공대에 지원하라니 그 보충병들이 선뜻 나가겠어요? 죽을 게 뻔한데. 그렇게 되자 이제 조선 아이들을 지명했어요. 체격 좋고 젊은 사람들을 끄집어내는 거지. 그렇게 내보내서 몇 명이 죽었는지 몰라요. 나는 도착하자마자 종기 절제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워 있는 덕에 위기는 면했죠.
아무튼 그렇게 하다가 장비를 모두 갖추고 하루 아침에 산에서 내려왔어요. 소련군 탱크 선발부대는 벌써 흥안령을 통과한 다음이죠. 내려가니까 화차가 서 있어서 ‘또 전선을 이동하는가 보다’하고 탔어요. 그런데 일본군들이 소곤소곤대는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니까 전쟁이 끝나 곧 집으로 가게 될 것 같다는 얘기였어요. 그게 8월 17일입니다. 15일 천황이 항복방송을 했는데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거지. 그놈들은 알려주지도 않았고 말이죠. 아무튼 귀가 번쩍 뜨였어요.
‘아! 이제, 살았구나.’
그래서 한참을 가니까 후라루끼라는 정거장이 나와요. 거기서 다 내리게 하더니 무장해제를 시켰어요. 소련군은 아직 한 놈도 못 봤는데, 아마 위에서 명령이 내려온 것 같아요. 어느 부대는 어디서 무장해제 하라고 말이죠. 우리는 후라루끼에서 스스로 무장해제한 거죠.
시베리아 벌판을 한없이 달리다
무장해제는 간단히 무기를 버리는 것으로 끝났어요. 구식 장총이 순식간에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그런데 무기를 반환할 때 실탄을 빼라고 했는데, 이 멍청한 놈들이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총알이 장전된 총을 그냥 던져놓기도 한 거예요. 한 자루씩 내려놓는데 옆의 총 방아쇠를 건드리면 간혹 격발이 됐어요.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오발에 죽은 일본 놈도 있어요.
무장해제를 끝내고 36킬로미터 떨어진 북만주 하얼빈 옆에 있는 도시까지 행군을 했어요. 8월 18일, 뜨거운 한여름이었지요. 1개 대대 아마 1,000여 명 정도 갔을겁니다. 쫘 - 악 줄을 서서 가는데 약한 사람들은 자꾸 뒤처지는 거예요. 총은 없었지만 무거운 장비를 지고 가니까 한두 사람 낙오자가 생기는 겁니다. 처음에는 하사관들이 권총을 꺼내들고 ‘여기서 처지면 죽는다’고 독려하더니 자꾸 낙오자들이 생기니까 포기해버렸어요. 죽으려면 죽으라는거야.
힘들게 도착하니까 몇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병영에 집어넣더라고요. 그때는 ‘전쟁을 안 했으니까 집에 보내주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어요. 우리는 전쟁 포로가 아니었으니까. 포로라는 건 전장에서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게 포로잖아요. 그건 잡아다가 저희 나라로 보낼수도 있고 수용소에 보낼 수도 있지만, 이건 일본군이 자진해서 무기반환 하고 무장해제한 경우니까 상황은 다른거죠. 그런데 이튿날 벌써 소련군이 들어왔어요. 정문에 소련군 보초가 서 있는데, 소련 군인을 그때 처음 본 겁니다.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행군하면서 생긴 낙오자가 100여 명 되는데 모조리 죽었다는 거예요. 중국 현지인들이 일본 군복을 입은 놈들을 그냥 놔둘리 있겠어요? 그 동안 이를 갈았을 텐데 돌려 쳐 죽이고 망치로 때려죽이고……. 한 사람도 못 살아남았다고 들었어요.
나는 소련군이 보초를 선 것을 보고 이거 잘못하면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망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낙오병들이 그런 식으로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까 일본 군복을 입고는 한 발짝도 못 나가겠더라고. 그래서 수용소에 있었는데, 일본식 이름에 국적도 일본으로 포로 명부가 작성된거예요. 그러니 그 명부에 조선 사람은 하나도 없는 거지요. 러시아 측에서는 명부를 토대로 세웠어요.
당시 스탈린은 병자와 걷지 못하는 병사만 두고 관동군 60만 명 전원을 끌고 오라는 지령을 내렸어요. 그래서 소련군이 포로들을 시베리아로 이송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일본 사람이나 우리나 소련군과 직접 교전한 적도 없으니, 단지 하이라얼 근처 목격 맞은 거나 고치고 집에 보내주겠거니 생각했어요. 그런데 기차가 하이라얼을 지나고 만주를 지나서 소련 국경을 넘어가는 게 아닙니까.
수피가 하얀 시베리아 벌판의 자작나무 숲을 한없이 달리는 겁니다. 어느덧 바이칼 호도 지나갔어요. 세계에서 제일 깊은 호수잖아요? 그 옆으로 시베리아 철도가 놓였는데, 계곡을 지나가면 다리를 놓고 다리를 지나가면 굴, 굴 지나가면 다리, 그런 식으로 80여 회나 계속되는 거예요. 땅은 하나도 없고, 굴과 다리만 있는 거예요. 한참을 달리다가 석탄을 싣기 위해서나 물을 채울 때마다 기차가 섰어요. 그때마다 소련군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와서는 배낭이니 시계, 만년필 등을 다 뺏어갔죠. 나중에는 귀찮고 괴로우니까 아예 다 가지라고 주었다니까요. 또 기차가 서면 거지꼴을 한 동네 아낙들이 달라붙었어요. 감자 같은 걸 가지고 와 비누와 바꾸자고 했어요.
한편 이송 도중에 굶어 죽은 사람이 많았어요. 휴대식량이라는게 각자 건빵 두 봉지, 보리를 쪄서 만든 야전용 식량 두 개, 납작한 쇠고기 통조림 한 두개가 전부였어요. 아까워서 건빵을 깨물지도 못하고 한두 개씩 입 안에 넣고 빨아먹으면서 갔어요. 아는 한창 젊은 나이라 몇 끼쯤 굶어도 문제없는데, 일본 고참병들은 견디지 못하고 자꾸 죽었어요. 기차가 정차할때마다 들것에 시체가 실려나갔어요. 어떤 칸은 한 구, 또 어떤 칸은 두 구……. 여그 근처에 웅덩이가 있으면 시체를 그곳에 던져놓고 그냥 떠나는 거예요. 수송 도중에 얼마나 죽었는지 몰라요. 문을 열 때 마다 확인할 수 있어요. 13일 정도 걸려 도착한 곳이 크라스노 야라스크라는 데예요. 소련의 5대 강중에 하나인 예니세이 강변이 있는 서부 시베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어요.
60만 명의 포로를 한번에 수용하려면 공간이 부족하니까 벌판 아무데나 포로들을 내리라고 해요. 그리고 자작나무를 베어다 포로수용소 숙소를 만들라고 시켜요. 나는 운좋게도 시내 제5수용소라는 곳에 가게 됐어요. 혁명 전 제정러시아 때부터 있던 정치범 수용소였어요. 독일군 포로들을 잡아두던 곳이었는데, 일본군 포로들이 들어오면서부터 독일 포로를 우랄산맥 서쪽으로 이동시킨 거예요.
너무 배가 고파서 말똥을 감자로 착각
억류생활이 시작된 거지. 이틀간 소독하고 목욕시키더니 다음날부터 작업장에 내보냈어요. 탈곡기, 콤바인 공장에서 하루 여덟 시간 꼬박 일을 해야 했는데, 기계마다 전부 ‘노르마’라는 게 있어요. 건장한 남자가 하루 여덟 시간 쉬지 않고 작업한, 일종의 평균생산량 같은 건데 무조건 100퍼센트 수행해야만 했어요.
한번은 보루방 기계도 해봤는데, 두꺼운 철판을 뻘겋게 달궈 작업대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으면 콱콱 내려오면서 육각형 낫또가 찍혔어요. 고루 찍으면 스무 개 정도 만들 수 있어요. 스무개를 찍고난 나머지는 용광로에 다시 들어가 쇳물이 되어 나오는 거죠. 오후 5시까지 채워야하는 노르마가 기계 하나에 백 개였어요. 작업 시간이 끝나면 밑에 떨어진 숫자만 세는 거예요. 110개면 110퍼센트 초과달성한 셈이지. 폐품이 몇 백 개가 나와도 상관없어요. 다섯 개 찍어도, 여섯 개 찍어도 그만인 거예요. 사회주의 경제의 모순이죠. 생산과정, 생산원가, 코스트 같은 것 안 따져요. 그저 제품만 많이 만들면 되요.
그런데 생산량에 따라서 빵을 차등 배분했어요. 100퍼센트 초과 수행한 사람에게는 배급으로 나온 빵 350그램에 성냥갑만한 10그램짜리 빵을 더 줬어요.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그거라도 먹은 날에는 ‘나는 먹었다’는 생각에 마냥 배가 부른 것 같았어요. 일본 포로들은 저녁에 작업장에서 돌아오면 잔반이라도 주워 먹겠다고 취사장 뒤편 쓰레기통을 뒤지고는 했어요. 소련군에게 들키면 바로 영창 들어갔지. 그래도 또 뒤지고 뒤지고. 우리 조선 사람들은 그런 건 없었어요.
11월부터 눈이 오기 시작하는데, 한 번도 녹는 일이 없으니까 이듬해 5월까지 세상이 하얗게 변해요. 마차는 바퀴를 떼어내고 썰매를 달고 다녔죠. 그런데 말이 썰매를 끌면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똥을 싸며 지나갑니다. 아침에 나가면서 그 광경을 틀림없이 보지요.
‘아! 말이 가면서 똥을 싸는구나.’
그런데 한참 걸어가다 보면 눈 위에 손바닥만한 덩어리가 있어요.
‘아! 이거 감자구나. 어, 누가 감자를 떨어뜨렸구나.’
그러면서 누가 볼까봐 얼른 주머니에 넣어요. 그래서 스팀 위에 놓고 녹여보면 그게 말똥이란 말이야. 말이 지나가면서 똥 싼 건 전혀 생각이 안 났죠. 다 잊고 ‘감자다!’라는 생각밖에 안 나요. 그렇게 속으면서도 다음날 또 동그란 것만 있으면 감자라고 집어넣는단 말이야. 모두 배고파서 벌어진 웃지 못할 얘기죠.
추위도 대단했어요. 많이 내려갈 때는 영하 50도 보통 영하 40도였어요. 침을 탁 뱉으면 지면에 닿자마자 데구르르 굴러가요. 우리가 8월에 포로로 잡혔기 때문에 일본군 하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소련 놈들은 저희도 입을게 없는지 그렇게 추운 곳에 수용했으면서도 두꺼운 옷 한 벌 주지 않았어요. 그러자 동사자가 속출하고 장티푸스로 병사하는 사람, 배고파 죽는 사람 관동군 60만 명 가운데 첫해 겨울에만 6만 명이 죽었어요. 십분의 일이 죽은 거죠.
장갑도 없었어요. 그놈들도 못 끼는 판인데 뭐. 껴 봐야 목장갑이고 방한장갑은 꿈도 못 꾸었어요. 잘 때는 앞뒤에 페치카가 있었어요. 운동장 곳곳에 석탄을 산더미같이 쌓아두었는데, 바삭바삭한 ‘괴탄’을 넣으면 불이 막 타올랐어요. 탄광에서 캐는게 아니라 노천에서 캐니까 양도 많았어요. 4, 50인치만 파면 그 밑이 다 석탄이었죠. 그렇게 앞뒤로 페치카를 잔뜩 떼니까 일단 내무반에만 들어오면 춥지는 않았어요.
우리는 카레이스키
일본 놈들은 아침 작업 나갈 때 정렬한 채 동쪽, 즉 동경을 향해 90도로 절을 했어요. 천황의 만수무강을 빌며 말이죠. 조선에서도 물론 그랬지. 그런데 우리가 이등병으로 들어가자마자 전쟁이 끝나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겠어요? 즉 우리 뒤로 들어온 초년병이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수용소에서도 만년 초년병이지요. 더 들어온 놈이 있으면 부려도 먹고 심부름도 시킬 텐데, 그러니 이등병인 조선 사람들이 작업하고 들어와서도 청소나 식사당번을 하는 거예요. 일본놈들은 일등병 이상이니까. 이거 안 되겠단 말이지. 이건 포로 중에 포로죠. 그래서 작업장에 다니면서 좀 똑똑하게 생겼다 싶으면 조선말로 물어봤어요. 조선 사람을 찾았던 거지요. 수소문해서 처음에 다섯 명이 모여 의견을 모았어요.
“야! 우리 독립했다고 그러는데 망한 나라 놈들한테 여기까지 와서 초년병 생활을 해야 되냐? 어떻게든 빨리 고국에 보내 달라고 하자.”
그런데 수용소장에게 간청을 해야겠는데 러시아말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그때 현역 소령이 수용소장을 하고 있었죠. 러시아말로 ‘마요르’, 영어로는 ‘메이저’. 일단은 소장을 만날 재간이 없고, 만나더라도 표현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러시아말을 배우자고 결의했어요. 시끄러운 기계 소리 속에서도 러시아 알파벳 발음을 수첩에 우리말로 써놓고 열심히 배웠어요. 그렇게 한 달 쯤 뒤 다시 만나서 찾아가자고 했어요. 안 되면 손짓 발짓 해서도 얘기하자고 했지요. 우리 ‘카레이스키’라는 거 얘기하면 아니냔 말이야.
수용소에 들어간 뒤 공장에 다니면서 소련 노동자들이 읽는 『이즈베티아나』『쁘라우디아나』같은 신문을 보고 우리나라가 독립했다는 사실을 알았지. 러시아말은 모르지만 사진도 나고, 걔들이 말도 해주고. 그래서 일본놈을 ‘봅스키’라고 하고 조선 사람은 ‘카레이스키’라는 걸 알았지.
우리는 백지에 조선 지도와 일본 지도를 모두 그려 갔어요. 문제는 포로들이 수용소장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죠. 다행히 매일 아침 우리를 작업장으로 인솔하는 러시아 하사관과 친했기 때문에 부탁을 했어요. 그랬더니 좀 기다리라고 하더니 올라가서 말했다는 겁니다.
“내가 인솔하는 애들인데 모범 포로들이다. 꼭 할 말이 있다고 하니 만나게 해 달라.”
그래서 수용소장을 만날 수 있었어요. 준비한 지도를 앞에 꺼내놓고 손으로 한반도를 가리키며 “우리는 여기 사람이다. 즉 카레이스키이다”라고 말했어요. 수용소장이 깜짝 놀라는겁니다. 여기 카레이스키는 한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더니 케비넷을 열어 명부를 보여줬어요. 뒤져보니까 나의 일본 이름과 일본 국적이 나오는겁니다. 그래서 최대한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말했어요.
“나는 원래 조선 사람인데 여기에만 일본인으로 적혀있는 것이다. 이곳에 우리 조선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모두 포로 명부가 잘못된 것이다.”
소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 분명히 명부에는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일본 놈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전쟁에 강제 동원한 것이라고 애타게 설명했어요. 그러자 소장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의 모든 포로들을 대상으로 자기 본명을 신상명세서에 쓰게 해보라고 했어요. 태어난 곳, 부모가 현재 살고 있는 곳, 모두 조사하라고 했어요. 며칠 후 다시 가보니까 정말 러시아어로 양식을 다 만들어 놓았어요. 그리고 포로들에게 나눠주고 다 적어서 제출하라고 했어요. 그러던 어느 하루 수용소장하고 하사관이 전원을 집합시키더니 호명했어요. 조선 사람만 불러내는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일본 놈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112명이나 조선 사람이 있었어요. 1,200명 중에 약 10분의 1이나 있었는데 늘 일본말만 하니까 모르고 지냈던 거죠.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안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변화가 일어났죠.
전부 짐을 꾸려서 나오라고 하더니 5수용소 안에서 새로 짓고 난방 시설도 잘 되어있는 깨끗한 숙소를 할당해 주었어요. 거기의 일본놈들은 다른 데로 분산 배치하고 말이죠. 수용소장이 따라 들어와서 말했어요.
“사실, 조선인이 수용소에 있었다는 건 전혀 몰랐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너희들은 모두 일본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이곳에 수용한 것이다. 오늘부터 조선인 중대라고 부르겠다. 내일부터는 작업장도 따로 준다. 그리고 너희들 대표가 와서 조선이 독립했으니까, 소련하고 적대관계도 아니었고 전쟁도 하지 않았으니까 빨리 보내달라는 요청도 했다. 그러나 보내주는 건 내가 마음대로 못한다. 상부의 지시가 없으면 못 한다. 내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일본인들보다는 먼저 갈 것이다. 그건 지금 얘기할 수 있다.
그 순간 갑자기 만세 소리가 터져나오고 야단났지요. 그때가 1946년 7,8월쯤 됐을 거예요. 비로소 해방을 맞은 거죠.
우리는 ‘조선인 중대’라는 표시로 태극기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리려고 하니까 가운데 태극밖에 생각이 안 나더군요. 궤를 아는 사람이 100여 명 중에 한 명도 없었어요. 일본 놈들이 태극기를 싹 없애버렸으니 본 적이 없는 거지. 그래도 흔히 대문 같은 데 무늬나, 손기정이 잠깐 나왔을 때 태극무늬를 본 기억이 있었죠. 그렇게 태극만 그려서 대나무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때의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인들과의 관계도 180도 달라졌어요. 예를 들어 아침에 배식 받으러 가면 줄 먼저 서 있는 일본 놈들을 발길로 걷어차고는 헤치고 들어갈 수 있었어요. 우리가 나타나면 알아서 가운데 자리를 비켜줘요. 완전히 헤게모니를 쥐게 된 거죠.
하루는 일제히 전에 자기가 있던 내무반으로 흩어져 일본 놈들에게 빼앗긴 물건을 다 찾아왔어요.
“너 이놈의 새끼, 이거 내 꺼 바뀐거야, 이거 내 꺼야!”
우리는 복수라도 하듯 일본 놈들한테 심하게 대했어요. 화장실에서도 만나면 그냥 귀싸대기를 한 대 때렸거든. 그러니 꼼짝 못하고 자꾸 우리를 피했어요. 우리는 고작 100명이고 걔들은 900명이 넘는데도 꼼짝 못했어요. 포로가 되니까 완전히 비굴해졌어요.
그런데 일본 놈들 중에도 몇몇 악질은 있었어요. 말하자면 중국에 가서 일본도로 몇 십 명씩 모가지를 잘랐다는 놈도 있었다는 거지. 한번은 그런 놈들이 주동이 되어 단체로 밤에 기습을 해왔어요. 우리가 불침번 세우고 자고 있는데, 호각을 불면서 “기상! 기상!” 했어요. 보니까 일본 놈들이 벌써 입구에 막 들어서고 있었어요. 손에 뭔가를 하나씩 들고 말입니다. 순식간의 일이라 방법이 있겠어요? 내무반에 무기도 없고 연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잘 때 개인별로 하나씩 쓰는 건초로 만든 매트리스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출입문으로 밀고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도구 창고로 가서 삽, 곡괭이 할 것 없이 전부 끄집어내 우리도 치기 시작했어. 완전히 포위당했는데, 보니까 작업 갔다 와 피곤해서 자고 있는 놈들을 동원시킨 거야. 그러니 끌려 나온 애들이 싸우고 싶겠어? 한 대라도 맞으면 다 도망가는 거지. 결국 주동자 몇 십 명만 남은 겁니다. 그대로 치고 받았어요. 곡괭이에 맞아 비명 지르고 쓰러지고…….
결국 망루에 서 있던 소련 경비병이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라고 판단해서 비상 사이렌을 울린 뒤에야 싸움은 멈췄어요. 이튿날 수용소장이 오더니 일본 애들하고 싸우지 말라고 하더군요.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조금 지나쳤다고 말했어요. 그런 일도 있었답니다.
이 사람 행동 잘 감시해라
1948년 10월경, 크라스트바르스에 있는 제4수용소를 비워 그 지역의 한국 사람들을 모두 집결시켰어요. 모두 430여 명 정도였지요. 그리고 한동안 그곳 벽돌공장에서 작업하다가 기차에 실려 극동지방 하바로프스크로 보내졌어요. 거기 제2수용소에 한국인만 다 집결시켰는데 2,300명 정도 됐어요. 그게 10월 하순경입니다. 거기서도 국민주택 짓는다고 두어 달 작업한 뒤에 항구로 보내졌어요. 일본인 포로는 자기네 배인 ‘마이즈로’(舞鶴)로 가고, 조선 사람들은 소련의 5천 톤급 배에 2,300명씩 타고 떠났어요. 19478년 12월이었지요. 떠난 다음 날 함경북도 흥남 항구에 내렸는데, 조국 땅을 3년 반 만에 밟아보는데, 참 기가 막히지.
그런데 소련을 떠날 때 그 지긋지긋한 노동을 시켜놓고 그놈들 노임을 한 푼도 안줬어요. 가깝게 지내던 러시아 사람과 일본 사람들 주소나 연락처 받아놓은 것도 다 빼앗더군요. 3년 반동안 고생하면서 메모 하나 남진 것 까지 못 가져가게 했어요. 몸검사 한 후에 다 찢어버렸어요. 소련 놈들이 그런 놈들이었어요. 얼마나 미운 - 지 말이야.
배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감격에 겨워 갑판으로 뛰어올라가 부둣가에 몰려든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었어요.
‘아, 정말 이것이 우리 조국이구나!’
그런데 북쪽 공무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학교 건물에 수용했어요. 환영은 커녕 한다는 소리가 어이없게도 친일파라는 겁니다. 영장을 거부하고 징병에 응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왜 일본군에 갔느냐는 것이에요. 강제로 끌려갔다는데도 왜 갔느냐는 겁니다. 얘기가 안 통했어요. 그러더니 영화 같은 걸 보여주고는 이북에 남으라고 설득을 하더라고요. 다 반대했지. 지금쯤 우리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을 텐데, 빨리 부모님 만나야지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따졌어요.
그래서 만주에 자기 가족 있는 천여 명은 만주로 보내지고, 이북에 가족 있다는 사람이 800명, 남한은 500명, 그렇게 대충 분류해서 정부 수립 직후인 49년 3월에 보내줬어요. 그런데 남쪽으로 보내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냈느냐 하면 달도 없는 한밤중에 기차에 태워 밖을 보지 못하게 차창을 가리고 철원 근처에 내리라고 했어요. 그리고 대뜸 말했어요.
“저쪽 방향이 남쪽이다. 가다 죽어도 모른다. 그 방향으로 가라.”
남쪽 38경비대에 ‘소련에서 귀환한 동포들이다’라는 사전 연락도 안 해주었어요. 그러니 캄캄한 밤에 소련에서 입고 나온 누비옷에 봇짐 하나씩 짊어진 사람들이 떼지어 넘어오니까 이남에서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대로 총을 쏘아댄 겁니다. 온갖 고통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3년 4개월만에 돌아온 고국 땅인데……. 그렇게 해서 몇 명이 죽었는지 몰라요. 이북 놈들이 그런 짓을 했어요.
나는 가족이 평양에 있어서 남았어요. 그런데 집에 가보니까 가족들이 없더라고요. 그때 포항에 큰아버지 댁이 있었는데, 그리로 갔다는걸 뒤늦게 알았죠. 몇몇 친구들을 만났더니 다들 내가 소련에서 나왔으니까 보내줄 거다, 가족 있는 데로 가라는 의견이 많았어요. 그때 함경남도 인민위원장이 발행한 “이 사람은 소련에 억류되었다가 귀환한 자임” 하고 도장을 딱 찍어준 증명서가 있었는데, 그거 하나면 다 통했습니다. 그래서 해주까지 왔는데, 더 이상 내려갈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 38경비대장을 찾아갔어요. 증명서 보여주고 가족 찾으러 가야 한다고 졸랐어요.
결국 달 없는 깜깜한 어느 날 밤, 직원 하나를 동행시켜 ‘취야’(翠野)라는 곳으로 데려갔어요. 해주하고 태탄하고 중간 지점인데, 자기네 판단에는 이 근처가 경비가 덜 삼엄한 곳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저쪽이 남쪽이니까 머리 들지 말고 반드시 포복해서 가라고 하더군요. 머리 조금이라도 들었다가는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겁니다.
나는 동이 트고도 한참을 그렇게 방향을 살펴가면서 기어갔어요. 날이 훤해질 때까지 기어갔는데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였어요. ‘이제 괜찮겠지, 이남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어 일어나서 걸었어요. 누구 하나 부르는 사람도 없고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한참 걷다보니까 언덕이 있는데, 계단이 쭉 있고 계단 위로 집이 한 채 있었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세수하려고 세숫대야를 하나 들고 나오는게 보여 나는 무조건 뛰어 올라갔습니다. 그 사람도 깜짝 놀라서는 총을 가지고 나오더니 철컥 장전하고는 “손들어!” 라고 했어요. 누빈 옷을 보니까 팔로군 같아 보였나 봐요. 손을 든 채 그간의 사정을 쭉 이야기 했어요. 밤새 기어왔다고 말입니다. 옷을 보면 알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웅진경찰서에 전화를 걸었어요. 당시에 사찰과라고 있었는데, 거기서 데리고 오라고 해서 갔어요.
갔더니 무슨 지령받고 온 게 아니냐고 별 소리를 다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정부수립 직후라 극심한 냉전시대였어요. 그렇게 조서받고 인천으로 보내졌어요. 인천 송현동에 옛날에 알루미늄 공장이 있었는데, 귀환 포로들이 오니까 거기 천막 수용소를 지어 놓았어요. 철원을 통해서 넘어온 사람 500명이 수용되어 있었어요. 이북에서도 한두 달 조사받았는데, 여기 와서도 한두 달 조사받았던 겁니다. 경기도 경찰국에서 우리를 전부 감시하고는 외출도 안 시켰어요. 동네 부녀자들을 시켜 미역국을 끓여주기도 했고요.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범석 장군도 방문해 담과 같은 말을 했어요.
“과거는 싹 잊어버리고 조국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라.”
우리는 그냥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은 거지요. 아무래도 적성국가에서 왔기 때문에 뭔가 물들었을 것이다, 지령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해 개별 심사를 받았어요. 말이 틀리면 대질심문도 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3년 반 동안이나 돈 한푼 못 받고 중노동하고, 스탈린 죽일 놈의 새끼라고 욕하면서 왔는데, 이상하지. 극도의 사상 대립과 냉전시대라는 걸 그때 우리는 몰랐죠. 남과 북이 갈린 건 알았지만 그렇게 심한 줄 몰랐어요. 철저했지요. 아예 단정을 하고 조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올 게 있나? 실체가 뭐 있어야지.
아무튼 황당했어요. 결국 고향이나 가족관계를 확인한 뒤 보내주긴 했지만 본적지 경찰서에 ‘이 사람 행동 잘 감시하라’는 통보까지 했어요. 그러니 옆 동네 갈때도 지서에 말하고, 갔다 오면 왔다고 알리고 행동의 제약을 받았어요. 가까운 친척 외에는 시베리아 갔다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력서에 못 쓰는 건 물론 괜히 의심을 받을까봐 남에게 말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도 우리들 중에는 공무원 한 사람도 있고 학교 선생 한 사람도 있어요.
실제로 이런 굴레가 풀린 것은, 1990년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펴고, 노태우 정권때 국교가 수립된 다음이죠. 그 전까지 40년 동안은 시베리아 출신이라는 말을 못했어요.
이병주 192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만주국 경제부 관리로 일하던 중 관동군으로 징집되었다. 해방 후 소련군 포로로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강제 노역을 하였다. 1948년 12월에 귀국하였으며 현재는(2005년) 당시 강제 노역에 끌려갔던 동료들의 모임인 시베리아 삭풍회 화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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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38경비대에 ‘소련에서 귀환한 동포들이다’라는 사전 연락도 안 해주었어요. 그러니 캄캄한 밤에 소련에서 입고 나온 누비옷에 봇짐 하나씩 짊어진 사람들이 떼지어 넘어오니까 이남에서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대로 총을 쏘아댄 겁니다. 온갖 고통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3년 4개월만에 돌아온 고국 땅인데……. 그렇게 해서 몇 명이 죽었는지 몰라요. 이북 놈들이 그런 짓을 했어요. 시발 북괴 개새끼들...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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퍄... 좋은 글은 돚거야!
와 ㄹㅇ 영화찍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