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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은 여러 면에서 중요했다. 대구 포항간의 교통 중심지이자 군작전의 요충지였다. 서쪽으로 대구까지 약 34킬로미터, 동쪽으로는 포항까지 약 40킬로미터의 도로와 철로가 여기서 갈라지며 경주까지는 약 28킬로미터에 불과하다.
포항-안강-대구의 길과 포항-경주-대구의 길은 부산-대구의 축선 못지않게 낙동강전선을 밑받침하는 주보급로였다. 그 바로 중간지점이 영천이었다. 동시에 우리 국군이 담당한 방어 정면의 전략적인 굴대였다. 만의 하나라도 이 영천을 잃게 될 때 우리 국군은
-1군단과 2군단 사이에 쐐기 당하며
-포항-대구간의 주보급로를 차단당하며
-북괴군이 영천에서 대구 쪽으로 진출할 경우 왜관 다부동 방어선 후방이 차단되어 낙동강방어선 전체가 무너지고
-영천에서 경주 쪽으로 진출할 경우에는 동해안 통로의 허를 찔려 부산이 당장 위태로와질 것이며.......
하는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하고 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결론을 꺼냈다.
-9월 15일로 예정된 인천상륙작전이 취소되고
-미8군이 일본으로 철수할 가능성이 크다
하는 결론이었다.
나의 정보고문 하우스먼 소령이 찾아와서 비밀스런 사실을 귀띔해주었다. 미8군사 참모진의 일부에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데이비드선으로의 철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의 경우란 어느 한 정면이라도 돌파당하여 대구가 위태롭게 될 때를 의미한다고 했다. 영천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육본 참모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영천의 8사단에 대한 부대 증원이 시급했다.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의 구상은 이러했다.
-8사단을 1군단에서 2군단으로 예속 변경
-3사단에 배속중인 10연대를 8사단으로 원대복귀
-신편 7사단의 주력을 8사단에 배속
육본이 취할 수 있는 맥시멈의 조치였다. 강문봉 대령은 1군단과 2군단의 현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이 구상을 짰다.
영천의 지리적 조건과 좌우인접의 전투지경선에 비추어 2군단에 예속하는 편이 좋으며 특히 군단 자체의 긴급조치(주로 부대운용)가 필요할 경우 2군단에 속해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2군단은 8월 말 현재 다부동 전선을 좌인접의 미1기병사단이 맡아줌으로 해서 군단 방어정면이 축소되고 예하의 1,6 2개 사단이 다소 숨 돌릴 수 있게 된 덕분으로 영천이 위급해지면 이 2개 사단에서 부대를 증원할 수가 있었다.
반면 1군단은 안강과 포항을 계속 마음 놓을 수 없으므로 해서 부대를 빼돌릴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나는 이 안을 즉석에서 육본작명으로 발령하도록 지시했다. 9월 5일부의 제166호 작명이었다. 허나, 이 작명이 시행되기 전에 영천 상황이 급변해지고 말았다. 북괴군의 9월 공세가 시작됨과 아울러 보현산-입암리에서 행동 개시한 북괴군 15사단이 증강된 5개 연대를 일제히 내세워 8사단의 주저항선을 돌파해온 것이다.
사단 우익의 16연대가 밀려나고 주저항선 일부를 맡고 있던 강원도 경찰부대(2개 대대)가 걷잡을 수 없게 뚫리고 말았다. 북괴군은 3~4일에 영천 북쪽 12킬로미터까지 진출한 기세를 타고 4일 자정이 지난 시각 야간 공격으로 거듭 압박해 왔다.
주저항선 우익의 입암리-인구동-평천동-영천의 도로에 전차 10여대를 앞세우고 주공의 쐐기를 박아온 것이었다. 9월 5일 영천은 주저항선의 중앙을 크게 뚫려 동쪽 약 4킬로미터의 원포동까지 침투 당했다.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을 하양의 2군단 사령부로 급파했다. 군단장 유재흥 장군에게 육본작명 166호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문서명령의 시간 여유가 없는 탓이기도 했으나 시간 여유가 있었어도 작전국장을 보냈을 것이다.
유재흥 장군에게 또 어려운 고비를 맡기게 된 것이 미안스럽고 여간 괴롭지 않았다. 6.25 야전에서 고생 안한 지휘관은 없었으나 유장군의 경우는 유독 고생이 많았다. 의정부에서, 미아리에서, 한강선에서, 차령산계와 소백산계에서 그리고 여기 낙동강 전선에서 사단을 지휘하고 군단을 지휘하면서 북괴군 주공 방향의 아군 방어 정면을 거의 도맡다시피 해 왔다. 이러한 장군에게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또다시 영천을 맡기게 된 것이다. 참으로 괴로운 심정이었다.
허나, 장군은 티끌만큼도 난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작명을 쾌히 양해하고 “2군단 사령부는 하양에서 전진할지언정 일보도 물러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총장 각하께 전해주시오.”하고 오히려 강문봉 대령을 위로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전해 들으면서 큰 감동과 함께 장군의 굳은 결의를 읽을 수 있었다.
장군은 5일 이날, 8사단을 배속 받음과 동시에 영천의 사단 사령부로 직행하여 상황을 파악하고 백선엽 1사단장, 김종오 6사단장, 이한림 부군단장, 강영훈 군단참모장, 이주일 군단작전참모, 이세호 8사단작전참모를 긴급 소집했다고 한다. 장군 자신의 작전 구상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 요지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북괴군의 영천 공격은 그 의도가 분명하다. 5개 연대로써 영천을 일거에 돌파하여 대구 또는 경주로 쐐기를 박아올 것이다.
-영천은 현재 4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원포동까지 압박당하고 있다. 8사단의 현 보유병력으로는 북괴군의 기세를 꺾을 수 없다. 금명간에 영천을 잃게 될 것임을 일단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8사단에 대한 병력 증원이다. 육본에서 7사단 주력의 증원과 10연대의 원대복귀를 조치해 주었으나 나로서는 군단 예하에서 2개 연대를 영천으로 증원코자 한다. 1사단과 6사단에서 각 1개 연대를 차출해 주기 바란다. 사단으로서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겠으나 영천의 중요성에 비추어 불가피한 조치임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나의 작전 구상은 첫째 수습이고 둘째는 전선정비 셋째에 가서 반격이다. 이 반격으로 적 15사단을 포위 섬멸하려고 한다.
-북괴군은 영천 돌파 후에 돌진을 서두를 것이기 때문에 그 허점을 찔러 얼마든지 포위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한 가지 문제는 적군이 경주로 향할 것인가, 대구로 향할 것인가 둘 중의 하나인데 경주로 가주기를 바라고 있다.
-나의 각오는 확고부동하다. 2군단의 명예와 나 자신의 무운을 걸고 영천을 기어이 지켜낼 것이다. 내가 하양에 없을 때엔 영천의 최전방에 나가 있는 것으로 알아주기 바란다.
9월 5일 이날의 위기는 영천만이 아니었다. 1군단의 기계-안강-경주의 축선이 크게 흔들리고 미8군의 다부동·왜관·창녕·마산 등 각 정면 또한 크게 잠식당하여 이판사판으로 파고드는 북괴군 3개 공격집단의 집요한 집중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미1기병사단의 다부동 전선은 8월 이래 최악의 위기였다.
4일 밤, 미8군사는 참모 전원과 각 사단장을 긴급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현 주저항선에서 데이비드선으로 철수하는 문제를 놓고 찬반이 엇갈린 심각한 회의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원군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세가 불리하면 꽁무니 뺄 생각부터 하는 미8군내의 일부 경향이 표출된 것이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회의는 결국 결정권자인 워커 장군이 불퇴전의 의사를 밝힘으로써 없었던 것으로 끝났지만 불씨마저 아주 꺼져버리지는 않았다. 미8군사의 통신 및 병참기구를 포함한 후방 담당 일부가 5일 오전에 부산 동래로 이전해 갔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조치라고 했다. 이에 따라 우리 육본의 일부도 부산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상순의 이 무렵, 낙동강 전선에는 연일 비가 내렸다. 3일부터 9일까지 무려 1주일간이나 개지 않았다. 아침마다 열리는 미8군 작전회의에서 워커 장군은 “오늘 일기예보 어떠한가?”하고 첫 질문을 던지곤 했다. 공군기의 출격이 크게 줄고 있었다. 미8군 예하의 각 사단이 전선 도처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의 하나였다. 우리 국군의 경우도 다를 바 없었다.
6일도 새벽부터 비였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무거운 표정으로 긴급 보고해 왔다. 영천 실함의 급보였다. 새벽 3시부터 시내에 진입하기 시작한 북괴군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간밤 자정까지의 상황으로 봐서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막상 당면하고 보니 영천 실함은 엄청난 중대사였다. 비를 무릅쓰고 강문봉 대령과 함께 하양의 2군단 사령부로 향했다. 작전기밀실의 상황판에는 붉은 화살표가 영천에 꽂혀 있고 8사단 CP는 영천-하양 중간의 금호동에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상황판을 보는 순간 마음에 걸렸던 사실-육본의 8사단에 대한 긴급조치(작명 166호)가 때늦은 것을 자괴(自愧)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단장 이하 사단 장병들에게 말할 수 없이 면목 없었다. 상급 지휘관의 신속한 적정 판단과 적시의 지휘 조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5시 30분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북괴군의 선두부대가 이미 완산동과 작산동으로 진출해 이는 추세에 비추어 북괴군이 경주 쪽으로 방향 잡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지적했다. 영천을 남쪽으로 벗어나면 들판이 열려있고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어진 뒤에 약 12킬로미터 지점에서 표고 70~80미터 평균의 구릉길이 구불거리게 된다. 바로 경주로 넘어가는 아화(阿火) 고갯길이다.
“바로 여깁니다.” 유 군단장은 지도를 짚어 보이며 “북괴군이 예상대로 경주 쪽에 주력을 투입해 온다면 이 고갯길에서 차단하고 증원부대로써 배면과 측면에 반격을 집중할 계획입니다.”하고 단호한 결의를 피력했다.
이날 오후 1시 쯤 8사단의 일부가 영천을 탈환했다는 낭보가 보고돼 왔다. 그러나 8일 정오 무렵 북괴군 주력이 또 다시 시내로 진입했다. 유 군단장이 직접 전화해 왔다. 비통해 하는 목소리였다. 적세는 전차 12대를 앞세운 강력한 보전연합부대였다고 한다. 전장은 새벽부터 빗줄기에 갇혀 있었다. 아군의 공군기가 뜨지 못하는 우천인 만큼 북괴군이 마음 놓고 전차를 내세운 것이다.
비를 무릅쓰고 하양으로 차를 몰았다. 유 군단장은 군단 사령부에 있지 않았다. 전방 연대에 나가 있다고 한다. 다시 차를 몰았다. 연대 지휘소는 영천을 굽어보는 언덕에 있었다. “지금 내 머리 속에는 전차 밖에 없습니다. 단 한 대라도 좋으니 우리 병사들에게 우리한테도 전차가 있다 하고 보여주고만 싶군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허나, 통분의 고함 소리로 들어야 했다.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야윈 옆얼굴에 눈물 한 줄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가난한 지휘관, 625 야전에서 우리 국군 지휘관 모두가 겪어야 했던 가난한 지휘관으로서의 통곡을 소리 없이 삼키고 있는 것이었다. 병력에 가난하고 화력과 장비에 가난한 탓으로 고난을 겪을 대로 겪은 끝에 여기 낙동강에서마저 일방적으로 전차에 밀려야 하는 우리 국군 장병들의 통분이기도 했다.
“실은 어제의 일인데.......”하고 유 군단장은 말을 이어 나갔다. 참다못해 좌인접의 미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이때 사단은 우리 1사단의 싸움터였던 다부동을 포함해서 왜관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유 군단장은 장군끼리의 만남은 몇 번 있었으나 게이 장군과 친근한 편은 아니었다. 비 때문에 공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고충을 서로 나눈 뒤 “그런데 게이 장군, 귀 사단의 전차 1개 소대를 이틀간만 빌릴 수 없겠습니까?”하고 용건을 꺼냈다. 낯 뜨거웠으나 이것도 장병들을 위한 일이고 보면 창피를 무릅써야 했다. 당시 미8군은 미국과 일본의 기지에서 긴급 수송해 온 M26, M4, M46 등 약 600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사단마다 약 100여대는 될 것으로 봐서 1개 소대 5대쯤은 결코 무리한 부탁일 수 없었다. 한데, 게이 사단장은 “모처럼의 부탁이오나 아시다시피 이쪽도 고전을 현재 겪고 있는 중이라서.......”하고 얼버무리는 말투로 완곡히 거절했다. 유 군단장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씁쓸히 웃어 보이며 “정말 내 몰골이 말이 아니구나 하고 서글퍼지더군요. 명색이 군단장이면서 전차 5대를 구걸했다가 거절당했으니 말입니다.......”하고 초점 없는 시선을 멀리 던지고 있었다. 폐부를 찔러오는 말이었다. 나 역시 가난한 지휘관의 하나임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나는 대구로 오는 길로 워커 장군을 찾았다. “게이 장군 그 사람 기사도가 어떤 것인지 좀 배워두라고 충고해 주시오. 딘 장군의 곁에는 얼씬 못할 졸장인 것 같소.”하고 지극히 심하게 해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워커 장군은 나의 험구에 꽤나 놀랐던 모양으로 나중에 군사령부의 더브니 작전부장에게 “언제나 얌전한 정 장군에게 그처럼 옹골찬 일면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먼. 사람은 누구나 화나면 무섭게 되는 모양이야.”하고 말했다고 한다. 하우스먼 소령이 일부런 전해준 얘기였다. 워커 장군은 즉시 게이 사단장에게 전화 걸어 M26전차 5대를 영천에 보내라고 지시했다.
이 1개 소대가 8사단 CP에 나타난 것은 역습하기 위한 2개 대대가 막 출발하려 할 때였다. 대대 장병들이 저마다 눈이 휘둥그레져 “만세! 우군 전차가 왔다!”하고 용기백배해 역습해 나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우스먼 소령은 더 흥미로운 이야기도 했다. 워커 장군은 죠지 패튼 장군 휘하의 20군단장이었으며 특히 발지 전투에서 용명을 떨쳤던 만큼 보전연합의 전술에 밝았다. 그러므로 전차 지원을 명령하고 나서 더브니 작전부장에게 “그런데 괜찮을까? 보전연합은 보병측 지휘관이 똑똑치 못하면 전차를 제대로 쓰지 못할 건데, 한국군 장교하고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을 것이고 전차병 친구들은 아마 제멋대로 갈기고 나서 돌아올 게 아니겠는가?”하고 지원 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허나, 한국군 측에 영어 잘 하는 장교가 있어 포격의 타깃을 척척 리드한 덕분으로 90밀리 직사포탄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워커 장군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실인가? 희한하군. 그 한국군 장교, 미 웨스트 포인트 출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 전차 소대는 반나절 만에 원대로 돌아가고 말았으나 국군과 협동했다는 점에서 한미군 보전협동의 효시를 이루었다.
9일 상황은 다시 급박해졌다. 북괴군 15사단 주력이 본격적으로 영천 남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주 쪽인가? 대구 쪽인가? 어느 쪽을 택하는가에 따라 전국이 크게 달라진다. 육본의 작전기밀실에서 보고를 기다렸다. 숨 막히는 약 두 시간이 지났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바쁘게 다가왔다. “경주 쪽입니다.”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확실한가?” “옛, 증강된 1개 연대가 아화로 향했다고 합니다.” “됐습니다. 총장 각하. 독안에 든 쥐새끼들입니다.”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도 들뜬 목소리로 쾌재를 불렀다.
곧바로 하양으로 달려갔다. 2군단 사령부도 흥분의 도가니였다. 유재흥 군단장이 상기된 얼굴로 “생각대로 돼 갑니다.”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예정대로 갈깁시다. 유 장군.” “물론입니다 승산은 충분합니다.” 유 군단장 휘하의 5개 연대는 이미 아화까지 요소마다 배치를 완료하여 반격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전사에 빛나는 “영천 섬멸전”이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감행되었다. 인천 상륙작전을 2일 앞둔 문자 그대로 낙동강 결전 방어의 도미(掉尾)를 찬연하게 장식한 대첩이었다. 유재흥 장군 휘하의 8사단(10,16,21연대)과 4개 증원연대(5,8,11,19연대) 및 1개 증원대대(3연대 1대대)가 거둔 전과였다. 국방부 공간인 한국전쟁사는 이 전과를 적 유기시체 3799구, 포로 309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북괴군 15사단의 증강된 병력은 약 12000명, 그 3분의 1이 시체로 버려져 있었으며 전사자에 비해 부상자의 비율을 적게 잡아 곱으로 친다 해도 투입 병력의 거의 전부가 소모됐을 것으로 추산하게 된다. 이에 비해 아군의 손실은 전사 29명, 부상 148명, 실종 48명이었다.
승인 또한,
-적시 적절한 증원부대 투입과 원활한 협조
-돌파구 확대 저지와 북괴군 병참선의 차단
-영천 고수(21연대)에 의해 노출된 북괴군 측면 강타
-임전무퇴, 불퇴전의 정신력 등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의 육상자위대가 발간한 조선전쟁사도“9월 10일 영천에서는 전날부터 전개된 한국군의 포위 공격이 주효하여 마침내 북 15사단에 궤멸적 타격을 가했으며 유기시체 가운데는 참모장 시체마저 섞여 있었다.”라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이 도미의 일전을 싸워 이긴 2군단장 유재흥 장군, 8사단장 이성가 장군, 7사단장 신상철 대령, 10연대장 고근홍 중령, 16연대장 유의준 중령, 21연대장 김용배 대령, 11연대장 김동빈 대령, 19연대장 김익렬 대령, 5연대장 최창언 대령, 8연대장 박승일 중령, 26연대 3대대장 신건선 대위. 18연대 2대대장 정승화 소령의 이름과 함께 그 휘하에서 신명 바쳐 싸운 장병들의 위공을 잊을 수 없으며 여기에 만강의 감사를 드려 마지않는 바이다.
영천 대첩의 소식이 전해지자 전선 장병들은 사기충천하여 승리를 자신했으며 후방 국민들 또한 일제히 환호하며 밝은 빛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쁨에 목이 메어 “오! 신의 가호가 아니겠는가!”하며 유재흥 장군과 나의 손을 감싸고 놔주지 않았다.
<정일권 회고록> p219-233
영천은 여러 면에서 중요했다. 대구 포항간의 교통 중심지이자 군작전의 요충지였다. 서쪽으로 대구까지 약 34킬로미터, 동쪽으로는 포항까지 약 40킬로미터의 도로와 철로가 여기서 갈라지며 경주까지는 약 28킬로미터에 불과하다.
포항-안강-대구의 길과 포항-경주-대구의 길은 부산-대구의 축선 못지않게 낙동강전선을 밑받침하는 주보급로였다. 그 바로 중간지점이 영천이었다. 동시에 우리 국군이 담당한 방어 정면의 전략적인 굴대였다. 만의 하나라도 이 영천을 잃게 될 때 우리 국군은
-1군단과 2군단 사이에 쐐기 당하며
-포항-대구간의 주보급로를 차단당하며
-북괴군이 영천에서 대구 쪽으로 진출할 경우 왜관 다부동 방어선 후방이 차단되어 낙동강방어선 전체가 무너지고
-영천에서 경주 쪽으로 진출할 경우에는 동해안 통로의 허를 찔려 부산이 당장 위태로와질 것이며.......
하는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하고 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결론을 꺼냈다.
-9월 15일로 예정된 인천상륙작전이 취소되고
-미8군이 일본으로 철수할 가능성이 크다
하는 결론이었다.
나의 정보고문 하우스먼 소령이 찾아와서 비밀스런 사실을 귀띔해주었다. 미8군사 참모진의 일부에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데이비드선으로의 철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의 경우란 어느 한 정면이라도 돌파당하여 대구가 위태롭게 될 때를 의미한다고 했다. 영천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육본 참모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영천의 8사단에 대한 부대 증원이 시급했다.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의 구상은 이러했다.
-8사단을 1군단에서 2군단으로 예속 변경
-3사단에 배속중인 10연대를 8사단으로 원대복귀
-신편 7사단의 주력을 8사단에 배속
육본이 취할 수 있는 맥시멈의 조치였다. 강문봉 대령은 1군단과 2군단의 현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이 구상을 짰다.
영천의 지리적 조건과 좌우인접의 전투지경선에 비추어 2군단에 예속하는 편이 좋으며 특히 군단 자체의 긴급조치(주로 부대운용)가 필요할 경우 2군단에 속해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2군단은 8월 말 현재 다부동 전선을 좌인접의 미1기병사단이 맡아줌으로 해서 군단 방어정면이 축소되고 예하의 1,6 2개 사단이 다소 숨 돌릴 수 있게 된 덕분으로 영천이 위급해지면 이 2개 사단에서 부대를 증원할 수가 있었다.
반면 1군단은 안강과 포항을 계속 마음 놓을 수 없으므로 해서 부대를 빼돌릴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나는 이 안을 즉석에서 육본작명으로 발령하도록 지시했다. 9월 5일부의 제166호 작명이었다. 허나, 이 작명이 시행되기 전에 영천 상황이 급변해지고 말았다. 북괴군의 9월 공세가 시작됨과 아울러 보현산-입암리에서 행동 개시한 북괴군 15사단이 증강된 5개 연대를 일제히 내세워 8사단의 주저항선을 돌파해온 것이다.
사단 우익의 16연대가 밀려나고 주저항선 일부를 맡고 있던 강원도 경찰부대(2개 대대)가 걷잡을 수 없게 뚫리고 말았다. 북괴군은 3~4일에 영천 북쪽 12킬로미터까지 진출한 기세를 타고 4일 자정이 지난 시각 야간 공격으로 거듭 압박해 왔다.
주저항선 우익의 입암리-인구동-평천동-영천의 도로에 전차 10여대를 앞세우고 주공의 쐐기를 박아온 것이었다. 9월 5일 영천은 주저항선의 중앙을 크게 뚫려 동쪽 약 4킬로미터의 원포동까지 침투 당했다.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을 하양의 2군단 사령부로 급파했다. 군단장 유재흥 장군에게 육본작명 166호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문서명령의 시간 여유가 없는 탓이기도 했으나 시간 여유가 있었어도 작전국장을 보냈을 것이다.
유재흥 장군에게 또 어려운 고비를 맡기게 된 것이 미안스럽고 여간 괴롭지 않았다. 6.25 야전에서 고생 안한 지휘관은 없었으나 유장군의 경우는 유독 고생이 많았다. 의정부에서, 미아리에서, 한강선에서, 차령산계와 소백산계에서 그리고 여기 낙동강 전선에서 사단을 지휘하고 군단을 지휘하면서 북괴군 주공 방향의 아군 방어 정면을 거의 도맡다시피 해 왔다. 이러한 장군에게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또다시 영천을 맡기게 된 것이다. 참으로 괴로운 심정이었다.
허나, 장군은 티끌만큼도 난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작명을 쾌히 양해하고 “2군단 사령부는 하양에서 전진할지언정 일보도 물러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총장 각하께 전해주시오.”하고 오히려 강문봉 대령을 위로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전해 들으면서 큰 감동과 함께 장군의 굳은 결의를 읽을 수 있었다.
장군은 5일 이날, 8사단을 배속 받음과 동시에 영천의 사단 사령부로 직행하여 상황을 파악하고 백선엽 1사단장, 김종오 6사단장, 이한림 부군단장, 강영훈 군단참모장, 이주일 군단작전참모, 이세호 8사단작전참모를 긴급 소집했다고 한다. 장군 자신의 작전 구상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 요지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북괴군의 영천 공격은 그 의도가 분명하다. 5개 연대로써 영천을 일거에 돌파하여 대구 또는 경주로 쐐기를 박아올 것이다.
-영천은 현재 4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원포동까지 압박당하고 있다. 8사단의 현 보유병력으로는 북괴군의 기세를 꺾을 수 없다. 금명간에 영천을 잃게 될 것임을 일단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8사단에 대한 병력 증원이다. 육본에서 7사단 주력의 증원과 10연대의 원대복귀를 조치해 주었으나 나로서는 군단 예하에서 2개 연대를 영천으로 증원코자 한다. 1사단과 6사단에서 각 1개 연대를 차출해 주기 바란다. 사단으로서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겠으나 영천의 중요성에 비추어 불가피한 조치임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나의 작전 구상은 첫째 수습이고 둘째는 전선정비 셋째에 가서 반격이다. 이 반격으로 적 15사단을 포위 섬멸하려고 한다.
-북괴군은 영천 돌파 후에 돌진을 서두를 것이기 때문에 그 허점을 찔러 얼마든지 포위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한 가지 문제는 적군이 경주로 향할 것인가, 대구로 향할 것인가 둘 중의 하나인데 경주로 가주기를 바라고 있다.
-나의 각오는 확고부동하다. 2군단의 명예와 나 자신의 무운을 걸고 영천을 기어이 지켜낼 것이다. 내가 하양에 없을 때엔 영천의 최전방에 나가 있는 것으로 알아주기 바란다.
9월 5일 이날의 위기는 영천만이 아니었다. 1군단의 기계-안강-경주의 축선이 크게 흔들리고 미8군의 다부동·왜관·창녕·마산 등 각 정면 또한 크게 잠식당하여 이판사판으로 파고드는 북괴군 3개 공격집단의 집요한 집중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미1기병사단의 다부동 전선은 8월 이래 최악의 위기였다.
4일 밤, 미8군사는 참모 전원과 각 사단장을 긴급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현 주저항선에서 데이비드선으로 철수하는 문제를 놓고 찬반이 엇갈린 심각한 회의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원군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세가 불리하면 꽁무니 뺄 생각부터 하는 미8군내의 일부 경향이 표출된 것이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회의는 결국 결정권자인 워커 장군이 불퇴전의 의사를 밝힘으로써 없었던 것으로 끝났지만 불씨마저 아주 꺼져버리지는 않았다. 미8군사의 통신 및 병참기구를 포함한 후방 담당 일부가 5일 오전에 부산 동래로 이전해 갔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조치라고 했다. 이에 따라 우리 육본의 일부도 부산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상순의 이 무렵, 낙동강 전선에는 연일 비가 내렸다. 3일부터 9일까지 무려 1주일간이나 개지 않았다. 아침마다 열리는 미8군 작전회의에서 워커 장군은 “오늘 일기예보 어떠한가?”하고 첫 질문을 던지곤 했다. 공군기의 출격이 크게 줄고 있었다. 미8군 예하의 각 사단이 전선 도처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의 하나였다. 우리 국군의 경우도 다를 바 없었다.
6일도 새벽부터 비였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무거운 표정으로 긴급 보고해 왔다. 영천 실함의 급보였다. 새벽 3시부터 시내에 진입하기 시작한 북괴군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간밤 자정까지의 상황으로 봐서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막상 당면하고 보니 영천 실함은 엄청난 중대사였다. 비를 무릅쓰고 강문봉 대령과 함께 하양의 2군단 사령부로 향했다. 작전기밀실의 상황판에는 붉은 화살표가 영천에 꽂혀 있고 8사단 CP는 영천-하양 중간의 금호동에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상황판을 보는 순간 마음에 걸렸던 사실-육본의 8사단에 대한 긴급조치(작명 166호)가 때늦은 것을 자괴(自愧)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단장 이하 사단 장병들에게 말할 수 없이 면목 없었다. 상급 지휘관의 신속한 적정 판단과 적시의 지휘 조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5시 30분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북괴군의 선두부대가 이미 완산동과 작산동으로 진출해 이는 추세에 비추어 북괴군이 경주 쪽으로 방향 잡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지적했다. 영천을 남쪽으로 벗어나면 들판이 열려있고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어진 뒤에 약 12킬로미터 지점에서 표고 70~80미터 평균의 구릉길이 구불거리게 된다. 바로 경주로 넘어가는 아화(阿火) 고갯길이다.
“바로 여깁니다.” 유 군단장은 지도를 짚어 보이며 “북괴군이 예상대로 경주 쪽에 주력을 투입해 온다면 이 고갯길에서 차단하고 증원부대로써 배면과 측면에 반격을 집중할 계획입니다.”하고 단호한 결의를 피력했다.
이날 오후 1시 쯤 8사단의 일부가 영천을 탈환했다는 낭보가 보고돼 왔다. 그러나 8일 정오 무렵 북괴군 주력이 또 다시 시내로 진입했다. 유 군단장이 직접 전화해 왔다. 비통해 하는 목소리였다. 적세는 전차 12대를 앞세운 강력한 보전연합부대였다고 한다. 전장은 새벽부터 빗줄기에 갇혀 있었다. 아군의 공군기가 뜨지 못하는 우천인 만큼 북괴군이 마음 놓고 전차를 내세운 것이다.
비를 무릅쓰고 하양으로 차를 몰았다. 유 군단장은 군단 사령부에 있지 않았다. 전방 연대에 나가 있다고 한다. 다시 차를 몰았다. 연대 지휘소는 영천을 굽어보는 언덕에 있었다. “지금 내 머리 속에는 전차 밖에 없습니다. 단 한 대라도 좋으니 우리 병사들에게 우리한테도 전차가 있다 하고 보여주고만 싶군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허나, 통분의 고함 소리로 들어야 했다.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야윈 옆얼굴에 눈물 한 줄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가난한 지휘관, 625 야전에서 우리 국군 지휘관 모두가 겪어야 했던 가난한 지휘관으로서의 통곡을 소리 없이 삼키고 있는 것이었다. 병력에 가난하고 화력과 장비에 가난한 탓으로 고난을 겪을 대로 겪은 끝에 여기 낙동강에서마저 일방적으로 전차에 밀려야 하는 우리 국군 장병들의 통분이기도 했다.
“실은 어제의 일인데.......”하고 유 군단장은 말을 이어 나갔다. 참다못해 좌인접의 미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이때 사단은 우리 1사단의 싸움터였던 다부동을 포함해서 왜관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유 군단장은 장군끼리의 만남은 몇 번 있었으나 게이 장군과 친근한 편은 아니었다. 비 때문에 공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고충을 서로 나눈 뒤 “그런데 게이 장군, 귀 사단의 전차 1개 소대를 이틀간만 빌릴 수 없겠습니까?”하고 용건을 꺼냈다. 낯 뜨거웠으나 이것도 장병들을 위한 일이고 보면 창피를 무릅써야 했다. 당시 미8군은 미국과 일본의 기지에서 긴급 수송해 온 M26, M4, M46 등 약 600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사단마다 약 100여대는 될 것으로 봐서 1개 소대 5대쯤은 결코 무리한 부탁일 수 없었다. 한데, 게이 사단장은 “모처럼의 부탁이오나 아시다시피 이쪽도 고전을 현재 겪고 있는 중이라서.......”하고 얼버무리는 말투로 완곡히 거절했다. 유 군단장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씁쓸히 웃어 보이며 “정말 내 몰골이 말이 아니구나 하고 서글퍼지더군요. 명색이 군단장이면서 전차 5대를 구걸했다가 거절당했으니 말입니다.......”하고 초점 없는 시선을 멀리 던지고 있었다. 폐부를 찔러오는 말이었다. 나 역시 가난한 지휘관의 하나임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나는 대구로 오는 길로 워커 장군을 찾았다. “게이 장군 그 사람 기사도가 어떤 것인지 좀 배워두라고 충고해 주시오. 딘 장군의 곁에는 얼씬 못할 졸장인 것 같소.”하고 지극히 심하게 해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워커 장군은 나의 험구에 꽤나 놀랐던 모양으로 나중에 군사령부의 더브니 작전부장에게 “언제나 얌전한 정 장군에게 그처럼 옹골찬 일면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먼. 사람은 누구나 화나면 무섭게 되는 모양이야.”하고 말했다고 한다. 하우스먼 소령이 일부런 전해준 얘기였다. 워커 장군은 즉시 게이 사단장에게 전화 걸어 M26전차 5대를 영천에 보내라고 지시했다.
이 1개 소대가 8사단 CP에 나타난 것은 역습하기 위한 2개 대대가 막 출발하려 할 때였다. 대대 장병들이 저마다 눈이 휘둥그레져 “만세! 우군 전차가 왔다!”하고 용기백배해 역습해 나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우스먼 소령은 더 흥미로운 이야기도 했다. 워커 장군은 죠지 패튼 장군 휘하의 20군단장이었으며 특히 발지 전투에서 용명을 떨쳤던 만큼 보전연합의 전술에 밝았다. 그러므로 전차 지원을 명령하고 나서 더브니 작전부장에게 “그런데 괜찮을까? 보전연합은 보병측 지휘관이 똑똑치 못하면 전차를 제대로 쓰지 못할 건데, 한국군 장교하고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을 것이고 전차병 친구들은 아마 제멋대로 갈기고 나서 돌아올 게 아니겠는가?”하고 지원 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허나, 한국군 측에 영어 잘 하는 장교가 있어 포격의 타깃을 척척 리드한 덕분으로 90밀리 직사포탄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워커 장군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실인가? 희한하군. 그 한국군 장교, 미 웨스트 포인트 출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 전차 소대는 반나절 만에 원대로 돌아가고 말았으나 국군과 협동했다는 점에서 한미군 보전협동의 효시를 이루었다.
9일 상황은 다시 급박해졌다. 북괴군 15사단 주력이 본격적으로 영천 남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주 쪽인가? 대구 쪽인가? 어느 쪽을 택하는가에 따라 전국이 크게 달라진다. 육본의 작전기밀실에서 보고를 기다렸다. 숨 막히는 약 두 시간이 지났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바쁘게 다가왔다. “경주 쪽입니다.”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확실한가?” “옛, 증강된 1개 연대가 아화로 향했다고 합니다.” “됐습니다. 총장 각하. 독안에 든 쥐새끼들입니다.”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도 들뜬 목소리로 쾌재를 불렀다.
곧바로 하양으로 달려갔다. 2군단 사령부도 흥분의 도가니였다. 유재흥 군단장이 상기된 얼굴로 “생각대로 돼 갑니다.”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예정대로 갈깁시다. 유 장군.” “물론입니다 승산은 충분합니다.” 유 군단장 휘하의 5개 연대는 이미 아화까지 요소마다 배치를 완료하여 반격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전사에 빛나는 “영천 섬멸전”이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감행되었다. 인천 상륙작전을 2일 앞둔 문자 그대로 낙동강 결전 방어의 도미(掉尾)를 찬연하게 장식한 대첩이었다. 유재흥 장군 휘하의 8사단(10,16,21연대)과 4개 증원연대(5,8,11,19연대) 및 1개 증원대대(3연대 1대대)가 거둔 전과였다. 국방부 공간인 한국전쟁사는 이 전과를 적 유기시체 3799구, 포로 309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북괴군 15사단의 증강된 병력은 약 12000명, 그 3분의 1이 시체로 버려져 있었으며 전사자에 비해 부상자의 비율을 적게 잡아 곱으로 친다 해도 투입 병력의 거의 전부가 소모됐을 것으로 추산하게 된다. 이에 비해 아군의 손실은 전사 29명, 부상 148명, 실종 48명이었다.
승인 또한,
-적시 적절한 증원부대 투입과 원활한 협조
-돌파구 확대 저지와 북괴군 병참선의 차단
-영천 고수(21연대)에 의해 노출된 북괴군 측면 강타
-임전무퇴, 불퇴전의 정신력 등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의 육상자위대가 발간한 조선전쟁사도“9월 10일 영천에서는 전날부터 전개된 한국군의 포위 공격이 주효하여 마침내 북 15사단에 궤멸적 타격을 가했으며 유기시체 가운데는 참모장 시체마저 섞여 있었다.”라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이 도미의 일전을 싸워 이긴 2군단장 유재흥 장군, 8사단장 이성가 장군, 7사단장 신상철 대령, 10연대장 고근홍 중령, 16연대장 유의준 중령, 21연대장 김용배 대령, 11연대장 김동빈 대령, 19연대장 김익렬 대령, 5연대장 최창언 대령, 8연대장 박승일 중령, 26연대 3대대장 신건선 대위. 18연대 2대대장 정승화 소령의 이름과 함께 그 휘하에서 신명 바쳐 싸운 장병들의 위공을 잊을 수 없으며 여기에 만강의 감사를 드려 마지않는 바이다.
영천 대첩의 소식이 전해지자 전선 장병들은 사기충천하여 승리를 자신했으며 후방 국민들 또한 일제히 환호하며 밝은 빛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쁨에 목이 메어 “오! 신의 가호가 아니겠는가!”하며 유재흥 장군과 나의 손을 감싸고 놔주지 않았다.
<정일권 회고록> p219-233
당시 배치도인거같은데
영천 사람인데 잘 봄 - 잠만잠
저 회상에 나오는 18연대의 GP가 어제 폭파된 331GP 대한민국 Gp중 3번째로 적Gp랑 가까웠고 3사단에서는 2번째로 가까웠던 GP인데 이제 둘다 철거됨
전선 귀신같네 지금도 저 파란선 길나있는데 가보면 공구리로 딱 저방향으로 총쏠수 있도록 개인호 많음
화산면 화남면 사이에 ㄹㅇ 참호 존나많음 공구리 작업 엄청 들어가있는데 당시에 지어진거 지금도 저기 파보면 총알 같은유물 나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