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중순 경 나는 상주중학에 재학 중이었다. 6.25 전쟁 중이라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집에서 농사일을 도와가며 지내고 있었다. 7월 말경이라 생각된다. 고향마을 우리 집 마루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면 저 멀리 문경새재 산이 보이는데 매일같이 포탄 터지는 소리 와 기관총 소리가 밤낮없이 들려오고 밤에는 천둥과 같이 섬광이 번쩍였다. 낮에는 비행기의 폭격이 연일 계속되는 것을 보면 전투가 매우 치열한 것 같았다.
 
 그쪽에서 피난민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도 피난을 가야 되지 않겠느냐 하고 동네 주민들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총포소리가 멎은 지 며칠 후 군인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너 나 할 것 없이 피난을 서둘러 가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를 위시해서 온 가족이 며칠간 지낼 수 있는 식량과 옷가지 등을 소에 싣고 각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마을 주민들과 같이 피난길에 올랐다. 그 와중에도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주를 모시고 가게 되었다. 여울이 고개를 넘어 ‘다인면 구던질’ 동네에 도착을 해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다.

새벽녘에 자고 있는 집 뒷산에서 따발총소리가 나면서 총알이 우리 머리 위로 날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시 따발총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내가 최초로 들은 따발총 소리였다) 우리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앞뒤 돌볼 사이도 없이 피난 보따리를 지고 또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잡고 뛰기 시작했다. 얼마를 가니 날이 샐 무렵이 되어 저 앞 안개 속에 국군들이 몇 명 보여서 안도의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군인들은 남으로 후퇴를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 군인들의 앞을 지나 좀 더 걸어가서야 피난민 대열에 합류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군과 적군의 완충지역에서 상황을 모르고 밥 지어먹고 잠자고 하였으니 죽지 아니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군인과 피난민을 만났으니 한숨 돌릴 수 있어서 안심은 되었다. 군인은 후퇴를 하면서 빨리 피난을 계속가라는 독촉을 하였다. 피난민들은 무거운 피난 보따리를 지고 가야하고 특히 노인과 어린이들을 데리고 걸어가야 하므로 걸음이 빠를 수가 없었다.
 
 기약 없는 피난 행렬은 끝없이 이어져 더운 날씨에 모두가 지쳐 있었다. 이 슬픈 군상들은 살기위하여 무작정 걷고 있었다. 어떤 피난민은 간밤에 애기를 순산한 것 같았다. 그 할머니뻘 되는 노인은 핏덩이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시대를 잘못 만난 이 불쌍한 것” 하면서 한탄을 하고 그 뒤에 산모도 따라가고 있었다. 이 더위에 머리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데 몸조리를 할 수 없어서인지 얼굴이 몹시 부어있었다, 한 생명을 탄생을 시키고도 몸조리 할 자리를 보전할 수 없어 피난을 가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 광경은 ‘목불인견’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피난행렬은 끝없이 이어져저 멀리 군위읍이 바라보이는 강변에 도착하였다. 도로에는 군인들이 군 작전을 위하여서인지 민간인을 통제 하고 있었고 산비탈과 강변이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선 강변에 홑이불로 천막을 치고 뜨거운 햇빛과 밤이슬을 막을 준비를 하였다. 기약 없이 떠나온 피난길이라도 먹을 양식은 조금 남아있어서 끼니는 당분간 때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반찬은 급한 나머지 챙기지 못하여 얻어먹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현지 마을로 가서 간장 된장을 조금 사자고 하니 팔수 있는 양은 없고 준비해놓은 간장을 조금 주었다. 현지 주민들은 그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모두가 도움을 청하니 인정상 거절할 수 가 없었는지 간장과 된장에 소금물을 타서 조금씩 나누어 주는 형편이었다. 우리 일행도 부식은 얻어 와서 해결하고 강변에서 기약 없는 피난생활이 계속되었다.
 
 이 피난생활이 계속되니열악한 환경 탓인지 어린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죽어갔다. 그 귀한 생명들이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어린 자식을 산비탈에 묻고 그 가족이 비통해 하는 광경을 차마 눈뜨고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또 먹을 것이 턱 없이 부족하고 소에 피난 짐을 싣고 갈 때 송아지가 방해가 되기도 하여 잡아먹기 시작하였다. 어미 소는 없어진 새끼를 부르느라 소리쳐 울고,아이들은 상황을 적응하지 못하는 탓인지 울고 하여 밤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이 비극적인 피난생활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북쪽 전방에서 포성이 들려오고 다른 곳으로 또 피난을 가야 할 것 같다는 소문이 돌더니 영천방면으로 소개명령이 내려졌다, 날씨는 찌는 듯이 더운데 간이천막을 거두어 피난 보따리를 지고 ‘효령면’을 지나 ‘신령면’을 향하여 가는데 대포 소리는 우리 피난민들만 따라오는 것 같이 들려왔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지친 몸을 이끌고 ‘신령면’에 도착하여 역시 강변에 천막을 치고 이웃들과 같이 옹기종기 생활하며 하루속히 피난살이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다.
 
 며칠 후 여기서 1950년 5번째 광복절을 맞이하였다. 날씨는 무더워서 모두가 지쳐 있고, 아이들의 짜증스러운 울음소리와 날로 더해가는 어미 소의 새끼를 부르는 울부짖음이 예외 없이 밤낮으로 계속되어 소란함을 더해 큰 난리였다. 하루는 날씨가 너무 더워 후미진 도랑에서 목욕을 하는데 둑 너머에서 피난민들이 소를 잡고 있었다. 먹을 양식이 부족하니 소를 잡아 나누어 먹고 일부는 고기를 팔기도 하는데, 나는 그 소고기를 좀 사먹고 싶었으나 그럴 여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