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14일, 대한민국 정부는 6.25전쟁의 작전 지휘권을 UN군총사령관에게 위임하였다. 동년 8월은 낙동강 전선까지 국군이 후퇴하여, 국토의 10%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절박한 때였다.미8군사령관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한 낙동강 전선을 어떠한 경우라도 죽음으로 사수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미 국방성에 따르면 우리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 작전 간의 병력 손실이 전체의 약 30%가량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사수하자면 우선 추가 병력을 투입시켜야 했다. 국민의 90%가 적 치하에 있어 징병 가능한 인력이 부족하였고, 징병을 하여도 훈련을 시켜 전선에 투입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정부는 긴급 국민 총 동원령을 발표하고 가두 모병과 학도의용군으로 부족한 병력을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훈련도 받지 못한 소년병 10.000여명이 긴급히 전선에 투입되고 그중 3.000여명이 전사를 하는 참상이 빚어지게 된다. 이런 희생을 통해 대구와 부산을 지켜내었다. 이후 북괴에게 점령당한 국토를 수복하는 데에 발판을 마련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3일 무렵, ‘영천 신영’에서 갑자기 군 현병들이 아침부터 나타나 젊은 청년들을 골라 가두 징집을 하였다. 나는 17세의 중학생이었고 징병 연령도 되지 않았다. 그저 헌병들이 징병 모집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한 헌병이 “너 이리와” 라고 하여 그 앞으로 가니, 신분증을 보자고 하기에 학생증을 주었다. 헌병은 학생증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챙기더니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였다. 하릴없이 헌병을 따라 간 곳에 군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트럭에 타라고 하여 탑승하였고, 이것으로 소년인 나는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군 입대를 하게 되고 말았다.
 
이 소식에 놀란 큰형님이 수소문 끝에 징집 병력이 모인 곳에 나를 찾아왔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형님은 나이 어린 동생이 전쟁터에 나가게 되니 애달픈 마음에 눈물만 흘렸다. 또한 집에 계시는 어머님에게 무어라 드릴 말씀도 없고, 뵐 면목도 없다고 하셨다. 다시 얼마후에는 큰 매형이 와서 형님이 보냈다며 얼마간의 돈을 트럭에 타고 있는 나에게 주면서 필요할 때 쓰라고 했다.나는 “군대에 가면 의식주 모든 것이 해결되니 피난살이에 보태서 피난이나 잘하시라”고 하면서 되돌려 드렸다. 실은 피난살이에 배가 너무 고파서 군대에 가면 먹을 것은 실컷 먹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날 징집된 자 중에 우선 학생과 다소 세련되어 보이는 사람들을 50여명을 선발하여 군 트럭에 별도로 태워 얼마 멀지 않는 군부대에 도착하였다. 주위를 살펴보니 군인들은 많지 않았으나 밥솥이 있고 각종 물품들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후방 보급기지 인듯하였다. 우리들에게 그 자리에서 대기 하라고 하였다. 점심때가 되어 우리일행 50여명을 집합시켜놓고 육군 소위(직책을 부관이라고 했다)가 훈시를 하였다. “최전방의 상황이 매우 위급하여. 너희들을 현지에서 모집하고 훈련을 시켜 최전선에 배치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군인으로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명령을 말하겠다.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것이 군인이다. 상관의 명령은 절대복종하여야 한다. 만약 명령을 불복종 할 때에는 즉결처분에 해당되어 처리됨으로 꼭 기억 해주기 바란다. 이것이 군인 정신이란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이러한 훈시를 들으며 급변하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고, 공포심만 느낄 따름이었다.
 
징집 인원에게 군복 지급이 시작되었다. 보니 미군들이 입던 중고품이었다. 받은 군복이 너무 커 다른 군복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였다. 돌아온 대답은 “네 몸을 그 옷에 맞추어서 입어라.”였다. 당시만 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학생복 위에 그 군복을 껴입었는데, 체구도 작아옷이 너무나 커서 상의 윗주머니가 허리띠 안에 들어갔다. 게다가 바지 주머니는 무릎 밑까지 내려오니 꼴이 아주 볼 만하였다. 학생모에, 신발은 신고 온 흰색 농구화를 그대로 신고서는 소총을 멘 꼴을 지금에 와 떠올려 보면 흡사 게릴라 같은 복장이었다고 생각된다. 군복 지급이 마무리가 되자 점심 식사를 나누어 주었다. 난생처음 맞이한 군대 점심 식사는 주먹밥이었다. 마침 배가 고프던 터라 손에 받아 쥔 주먹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오후에는 고참병들 지휘 하에 실탄사격훈련이 실시되었다. 총기는 M-1소총이었다. 생전처음 만져보는 총은꽤 무거웠고 겁도 났다. 실탄 한 케이스(8발)를 지급받아 총기에 실탄을 장전하는 방법부터 배웠다. 신병들은 서툴러 총 노리쇠 후퇴 고정을 시키다가 손가락이 끼어 들어가 다치는 사람도 있었고, 실수로 총을 땅에 떨어트리기도 하는 등 실수연발이었다. 이렇게 급조된 군인들이 과연 전투에 얼마나 도움이 될 지, 얼마나 살아남을 지 의문이 갔다. 나는 실탄 장전이 서툴러, 훈련을 지도하는 고참병이 대신 실탄을 장전해주었다. 전원 사격 자세로 엎드리게 하고 전방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기라고 하였다. 무조건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기니, 실탄이 발사되고 그 반동으로 어깨가 아프고 총소리에 고막이 터지는 것 같았으며 이명이 들리며 귀가 먹먹했다. 이렇게 사격훈련은 끝이 났다.
 
다음은 수류탄 투척 훈련이었다. 고참병이 수류탄을 들고 제원을 설명해주고 난 후, 안전핀을 뽑은 후 던지면 4초 후에 폭발한다면서 전방 급경사진 곳으로 수류탄을 던지고 엎드리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다음은 우리 신병이 5명씩 한 조가 되어 직접 실습에 나섰다. 수류탄 한 개씩을 지급 받아 고참병이 보여준 것과 똑같은 동작으로 전방 경사진 곳을 향해 던지고 엎드렸다. 곧바로 5개의 수류탄이 동시에 폭발하는 굉음이 마치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

부관 직책으로 우리에게 훈시를 했던 소위는 이것으로 모든 훈련은 끝났다고 하였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상관의 명령을 절대 복종하기 바란다. 너희들은 저녁에 수송 차량이 오면 최전방으로 출동할 것이다. 그 때 까지 대기하기 바란다.”
 
징집 당한지 단 몇 시간 만에 17세 중학생은 대한민국 군인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훈련을 마친 전투병으로 실제 전장에 투입될 시간을 목전으로 기다리게 되었다.
 
수송차를 기다리는 동안 오늘 하루 내 앞에 갑자기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피난을 못하신 어머니, 정든 학우들, 학업문제, 장래 문제 등 만감이 교차되었다. 이제 전선에 투입되면 살아서 돌아올지도 모르고 죽을지도 알 수 없는 몸이라 생각이 들었다. 이에 어린마음에도 이는 너무 비참한 신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미래의 꿈을 가꾸고 있었던 나, 그런 내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군복을 입게 되니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는 듯 해 몹시 안타까웠다. 한치 앞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몸이 되니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저녁에도 주먹밥으로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나타난 수송 차량에 우리 신병 모두 탑승하여 이동을 하였는데, 피난 때 지나왔던 군위군 방면으로 향하였다. 한참이 지나자 차는 전조등을 끄고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서행을 하고 있었다. 포탄 터지는 소리와 기관총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리 멀지 않은 곳이 최전선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느 지점쯤에서 하차를 했지만 밤중이라서 깜깜하게 어두워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앞산 고지에서 각종화기의 폭발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이곳에서 갑자기 총기 지급이 시작되었다. 전체 신병 50여 명 중 약 절반 정도에게만 총기를 지급한 후 어디론가 인솔해 데려가고 나머지는 대기하라고 했다. 나는 총을 지급받지 못하고 대기했는데, 이윽고 날이 밝아와 주변을 살펴보니 취사장과 각종 물자 및 차량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다. 남은 신병들은 물자 운반과 식사 운반과 같은 잡일을 돕고는 아침식사로 지급된 주먹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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