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대구 대봉동 가다꾸라 공장 전경

대구 보충대는 과거에는 제사(製絲) 공장이었는데, 부르기를 '가다꾸라'공장이라고 했다. 이곳은 보충병들이 먹고 자는 생활 대책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우선 어찌됐던 사람은 먹어야 사는데, 식사가 제공되지 않았다. 잠자리도 콘크리트 바닥에 침구도 없이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공장안에 있는 가마니를 깔거나 덥고 자야만 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이 가마니에는 쥐벼룩이 득실거렸다. 가려워 긁게 되고, 피부에 상처 생겨 잠을 이룰 수가 없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런 환경에서 부상당한 상처는 더욱 아프고 쑤셔서 견디기 힘들었다.
 
식사는 동작이 빠른 사람이나 하루에 한 끼 정도 받아먹을 수 있는 정도였다. 군기와 질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배식을 하다가 밥이 동이 나면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같이 다리나 다른 신체가 불편해 동작이 느리면 항상 밥을 굶어야 했다. 세상에 이런 군대, 이런 조직이 또 있을까? 그리고 밥을 타먹을 그릇이 없어서, 공장에서 작업할 때 사용하던 나무통을 밥그릇으로 가지고 다니며 식사를 받아먹어야만 했다.
 
취사장에서 밥을 지을 때에도, 익지도 않은 밥을 솥뚜껑을 열고 훔쳐가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그 다음부터는 건장한 고참병이 몽둥이를 들고 밥솥을 지켜야만 취사가 가능했다.

그 고참병이 잠시만 눈을 돌리면, 보충병들이 들고 다니는 나무통에 밥을 퍼서 달아나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붙들리면 몽둥이로 얻어맞는 형벌이 있었다. 얼마나 굶주렸으면 밥 도둑질을 하겠는가? 사람은 배가 고픈 것이 한계를 넘으면 양심에 거리끼는 것도 없이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그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 부상입고도 병원에서 퇴원당해 보충대에 온 군인들에 대한 대우였다.
 
그러던 어느날,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정문의 출입 통제를 하지 않았다. 보충병 각자 수단껏 알아서 하라는 뜻이라고 소문이 돌았다. 상처의 아픔과 배고픔이 견딜 수 없어 정문을 나섰다. 그래도 제지 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어디로 가야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을지, 그냥 그런 생각뿐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참고 : 가다꾸라 공장은 일본제사업계의 왕자였던 가다쿠라 겐타로(片倉兼太郞)가 1919년 봄, 자신의 이름을 딴 '가타쿠라(片倉)제사방적주식회사 대구제사소'란 긴 이름의 공장을 설립하며 지은 건물임. 바로 근처에 미군기지가 있어서 인원통제하기엔 좋았던거 같음.

저기서 기계 치우면 보충대 생활관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