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나팔을 입에서 떼지 않는 키구치 샤오핑의 이야기는 192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에 깊이 스며들었던 전쟁 이야기이지만, 1930년대 이후의 사람에게는 더 강렬한 이야기인 폭탄 삼용시의 기억이 강한 것 같다. 특공대를 낳는 근원이 된 폭탄 삼용사의 미담은 1932년에 상해 사변에서 파견된 구루메 24사단이 상하이 외곽 묘행 진에서 중국 19로군과 싸우고, 공병 3명이 폭탄을 안고 적진에 자폭 공격했다는 것이다.

이 미담은 미디어가 만든 허상이기에 당시 신문 특파원들은 나중에 반성했다(주 1). 일이 일어난 것은 2월 22일 새벽이지만 신문 특파원들이 현지 취재를 하기 전에 대략적인 정보를 흘렸는데, 24일자 신문에 '폭탄 삼용사''육탄 삼용사' 등의 대문짝만한 기사로 나타났다. 반응은 컸고 육군성은 무려 당일에 은상 수여를 결정하여 교과서에 삽입, 천황에게 상청하는 걸 검토하기 시작했다. 현지 취재에서 밝혀진 바로는 격렬한 전투이긴 했지만 특히 이 3명만이 출중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정정하지도 못하고 삼용사 이야기는 확대 생산되었다. 사설은 '일본 정신의 극치'와 야마토 민족의 특질을 칭송하면서 독자들로부터 속속 조의금을 받았다. 요사 노텟칸이 노래를 만들고 잡지, 영화, 연극 등에서 거론됐으며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고 죽었다고 교과서에도 쓰여졌다. 폭탄 삼용사가 죽어 나라를 위하는 행위가 훌륭한 일이라며 특공대의 토양을 만든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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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개제된 육탄 삼용사의 사진

왼쪽부터 에시타 타케지, 키타가와 스스무, 사쿠에 이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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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광고도 육탄 삼용사

삼용사의 인기에 편승하여 많은 도안 등에도 채용되고, 또 삼용사의 굿즈(과자, 헤어 스타일·일본 옷의 디자인)까지 나오는 소동이 벌어졌다. 초-중학교의 운동회 경기이기도 했다. 당시의 인기 만화 '노라크로'의 1932년 5월 게재분에서도 폭탄 삼용사가 모티브로 보이는 3마리의 개가 활약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1933년에는 오후지 노부로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 『 개구리 삼용사 』가 공개됬다.

아이들에게 '육탄 삼용사 놀이'가 대유행했다고도 한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 이야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이 있다. 돌격해서 자폭했는데 벙커에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가 들릴 수 없다. 폭탄은 비행기에서 투하할 수도 있고 포격일 수도 있다. 일부러 폭탄을 사람이 메고 갈 필요가 있는가. 필요하더라도, 붙을 붙여두면 굳이 자폭하지 않더라도 폭탄을 두고 돌아갈 수 있다. 철조망 앞이니까 적이 도화선의 불을 끄러 오지도 못한다. 현지에 있던 병사의 증언(주 2) 등으로 추정컨데 오늘날에는 그 실상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사실 세 용사는 사고 혹은 명령으로 죽은 자들이었다.

먼저 상해 사변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하겠다. 일본은 중국에 영토를 확장하고 일었는데, 전년의 만주 사변에서는 모략에 의해서 '중국군의 공격'을 마음대로 만들어 내어 점령하는 방법이 사용됐다. 이 성공에 맛들인 군부는 상하이에서도 비슷한 사건을 획책했다. 상하이 주재의 육군 무관 보좌관 다나카 류키치 소령이 가와시마 요시코 등과 맞추어 중국인 무뢰한을 인수하면서 일본 산 묘호지의 탁발승 미즈가미 히데오 등 5명을 구타했다. 이는 다나카 류키치 본인이 전후에야 밝힌 사실이다(주 3). 더욱이 '상하이 청년 동지회'에 보복 목적으로 습격하고 사건을 키워, '재류 방인 보호'때문에 해군 육전대를 상륙시킬 구실을 만들었다. 당시 중국 측도 여러 군벌로 분열돼 있어 상하이 주변의 군대는 정규군이 아니라 채정해서가 이끄는 19로군이었다. 이 대일 강경파의 전의는 높고 일본 해군 육전대에서는 감당하지 못해, 구루메 24사단, 이어 젠쓰지 11사단이 상하이에 파견됐다. 24사단은 묘행진에 있는 19로군 진지에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전술의 기본은 보병 돌격이었다. 병력을 집중하고 적진에 보병이 일제히 돌진하면 당연히 희생도 나오지만 모두 격멸되지 않는다. 일부가 적진에 당도하면 적의 진형은 무너진다. 거기에 전군이 돌격, 추격을 계속하 적을 한꺼번에 소탕한다. 이 전술에서 핵심은 모두 용감하게 일제 돌격해 최대한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망설이면 그만큼 병력의 집중도가 줄어들기 때문에 피해가 늘어난다. 벙어자 입장에선 돌격대 전원을 격멸하거나 자신이 죽느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모두 격멸할 수 없다면 퇴각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적의 전의가 낮은 경우 대부분 별로 피해 없이 돌격 후 승리할 수 있었다. 보병의 돌격을 거의 유일한 공격 패턴으로 사용하던 일본군은 '필승의 신념'이 강조되면서 점점 정신 주의로 갔다.

태평양 전쟁의 미군은 이러한 돌격 전술은 쓰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폭격, 포격으로 전쟁의 대세인 전차와 함께 전진할 보병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잔당 소탕과 진지 확보였다. 클라우제비츠 시대에는 당연하던 일본군의 돌격 전술은 사실 시대에 뒤떨어진 전술이다. 주된 이유는 기관총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와 철조망을 배치하고 기관총이 있는 진지는 보병 돌격으로는 돌파하지 못하고 전선은 모두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일본은 이미 러일전쟁의 203고지 등에서 고전하며 기관총과 철조망을 사용한 방어의 강력함을 알았지만, 전술을 바꾸지 않았다. 노몬한에서도 전차 앞에서 보병 돌격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실증되었다. 해군의 거함거포주의, 육군의 돌격 전술 모두 근대의 전쟁에는 통용될 수 없는 전법이었다.


만주 사변에서는 중국군의 장비도 변변찮았고 전의도 낮았다. 일본군은 돌격하는 족족 중국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묘행진에서 19로군은 장비를 잘 갖췄고, 기관총과 철조망, 참호의 보호를 받았다. 일반적인 돌격 전술로는 당연히 끄떡없다. 철조망에 걸려 기관총 소사를 받고 만다. 거기서 화약을 매설해 철조망 밑에 돌격로를 만드는 일을 생각했다. 공병대에 폭탄통을 지게 해서 철조망 밑에 넣는데, 폭탄통은 약 4미터짜리통에 폭약 20킬로그램을 내장해 전체를 대나무로 싸고 다시 짚으로 싼 다음, 나무로 덮얼다. 통 꼬리에 붙인 긴 도화선 2개에 성냥으로 점화하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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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 삼용사가 사용한 폭약통



박격포로는 위력이 부족하고 비행기에서 떨구는 폭탄은 정확도가 낮고, 중포병은 아직 도탁하지 않았다고 해 간단하게 공병을 결사대로 하여, 폭탄통을 5개 준비하고 36명의 공격대를 편성했다. 긴 도화선을 켜거나, 총격 속에서 폭탄통을 가져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분명하다. 엄호 사격으로 연막을 치다가 처음 명령을 받아 돌격한 병사들은 철조망에 도달하기 전에 총알에 맞아 버렸다. 다음에 시킨 것이 제1반 에시타, 키타가와, 사쿠에와 제2반 키타무라, 스기모토, 야나세로 모두 3명씩 폭탄통 하나씩을 멨다. 20킬로니까 3명까진 필요없지만 1명이 맞더라도 나머지가 전진한다는 계책이었다. 도화선이 짧았다는 설도 있지만 일단 설치히고 도망 치기엔 충분한 길이였다. 사실, 2반 키타무라, 스기모토, 야나세는 폭탄을 터뜨리고 달아날 작정이었다.


그런데 선두에 있는 키타무라가 피격됐는지 넘어진 뒤 두 사람도 피격돼 넘어졌다. 그래서 세명은 폭탄통을 두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 광경을 보고 반장 우치다 하사가 '뭐야! 나라를 위해 가라!'라고 호통쳤다. 3명은 다시 폭탄통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런 일로 시간을 지체했고 폭탄통을 안고 전진했지만 철조망에 도착하자 폭발하고 말았다. 이 폭탄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모르지만 2반의 폭탄통은 확실히 철조망 밑에 꽂혀 이 폭발로 돌격로가 열렸다. 24사단은 묘행진을 점령할 수 있었다. 현지에서 용감하게 임무를 해낸 키타무라, 스기모토, 야나세의 공로가 큰데, 도망치듯 돌아간 에시타, 키타가와, 사쿠에만 언급하는 건 이상하니 6용사로 하자고 주장했지만 결국 채택되는 일은 없었다.

(주 1)'육탄 삼용사'이야기(아사히 신문 2007년 6월 13일)
(주 2)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심문 기록'『 폭탄 삼용사 』의 사실'국립 공문서관
(주 3)1965년 4월 8일 방송 프로그램 '나의 쇼와사'(사회 미쿠니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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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치요다 구 야스쿠니 신사의 오토로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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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 삼용사 중 하나인 에시타의 석고상

전시에 육탄 삼용사는 군신으로서 각지에 기념비가 설치됐다. 쇼와 25년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의 기념비 수는 무려 5613개. 일본 전국 방방곡곡까지 설치된 것 같다.

육탄 삼용사 관련 기념물은 GHQ 점령 하에서 동상 354개가 철거됐고, 890개의 기념비와 17개 조각상이 눈에 띄지 않는 장소로 이동, 908개 기념비와 29곳이 외관 또는 이름이 변경됐다. 그 외에도 시대의 흐름에서 사회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풍화되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http://www006.upp.so-net.ne.jp/nez/essay/sanyuushi.html

https://ja.m.wikipedia.org/wiki/爆弾三勇士#

http://blog.livedoor.jp/mensdigest/archives/525512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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