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과 핵전쟁


0.요약

핵무기는 대규모 지상군을 상쇄할 역량이라고 생각했의나...
소련이 핵투발 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우주,공중 정찰에 투자함

공군은 핵투발 임무를 맞의며 많은 예산을 차지했고 해군, 육군은 새 전쟁시대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해야했음

실패한 것들도 많음 성공한 것도 많음 결국 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임무에 대한 도전에 유연하게 대처 할 수 있게 됨. 군의 기풍 또한 그들이 추구한 기술에 영향을 끼치고 결국 많은 변화를 격었지만 각 군의 정체성은 기술 발달에 열광했던 사람들이 예견 했던 바보다 각 군은 적응력이 강했음이 입증됨




1.시작

-미소 경쟁

핵의 엄청난 파괴력 때문에 적의 모든 군사적 위협을 무터트릴 수 있의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5년뿐이 였다. 결국 소련도 핵을 만들고 미대륙에 날릴수있는 능력을 가지게 됨


-전략정찰을 위한 기술

소련에 잡혔던 독일 과학자들 독일의 항공사진과 오래된 지도들을 통해 정보를 얻의려고 했지만 정보량부족

그래서 정찰이 필요했고 풍선을 날려서 정찰하려고 했의나 실패 했고 고고도로 날아서 정찰 하려고 RB-29 정찰을 시작함 나중에 미그15로 요격하게 됬의나 1949년 이후 일이고
1950년대 초는 RB-50(BR-29를 개조함) RB-45 RB-47로 바뀜 상대 전자 방출을 감지하여 소련의 레이더 포착 범위를 지도로 표현 소련의 레이더망의 빈틈을 찾아내려고 함 공군으로 포격하게 그 임무는 해군 공군이 같이했고 16대의 항공기를 잃음


(검색해서 나온 RB-50인데 B-29기반이 라는데 B-29보다 주익이 길어진 느낌이 든다)



유인 항공기로 소련 상공을 정찰 하기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우주에서 정찰하려는 프로젝트를 시작 하게됨 프로잭트 이름은

은하계 방사선 및 배경복사 프로젝트를 인공위성이 지구 궤도를 공전하면서 레이더 신호를 수신 하고 지상에 전송 1962년부터 1977년 까지 소련 함정들로 부터 나오는 레이더 전파를 수집 신호들을 분석하고 국가정보국에 배포함


-폭격기 공백과 전략 공중 정찰
소련은 1954년 노동절날 바이슨 전략 폭격기를 공개했고 같은해 뱃저가 등장 미국의 제트 폭격기 등장 후 일 년 후의 일들임 그리고 1년 후 배어가 등장해서 겁나게 놀랐음

(베어 폭격기라고 올렸습니다 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함)




그래서 소련을 정찰할 강력한 정찰기가 필요하게 되고 이는 U-2정찰기의 탄생과 이어지게 됨 CIA에 록히드마틴의 제안으로 2만 1000미터 상공에서 3,200킬로미터 범위를 정찰 할 수 있는 기체를 제안함



아쿠톤플로젝트(U-2개발 프로젝트인 듯)에 투입할 예산으로 3,500만 달러 승인 증빙이 필요 없는 자금을 사용함 10개월만에 완성


록히드마틴은 속도가 느려서 결국 격추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기체의 RCS를 줄이려고 레인보 프로젝트를 해서 RCS감소 도료를 바르고 전자전 기능을 가진 블랙박스를 개발하는등 개조함

그 다음에는 A-12를 만듬 1960년대 말 프로젝트는 예산을 30퍼센트 초과했고 1년이상 지체 됨 1962년 4월 비행성공 천문항법 장치가 달림 거기에 스텔스 기능 넣음









-미사일 공백과 우주정찰

U-2기가 격추되면서 유인기로 날 수 없다고 알게 됨 다른 나라에서는 계속 우주에서 정찰함 1953년 3월 CIA보고서도 독일의 연구에 기반을 둔 프로젝트는 잘 알고있었지만 소련의 유도 미사일 프로젝트는 지식이 부족하다고 인정

NIE(국가정보평가서)보고서에서도 소련유도미사일에대한 정보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 했고 결국 불충분한 정보와 미 개척 영역에 대한 최대한의 추정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보게 됨(모르니까 최대한으로 생각해서 대비를 해야 된다는 뜻인 듯)

그래서 진주만의 공포를 느낌 소련의 폭격기의 숫자와 성능을 알 수 없의니까 MIT총장이 국방동원과학자문위원회의 기술능력자문단은 소련의 기습공격 감행능력에 대해 조기경보기, 더 나은 정보, 방어 조치 등을 통해 공격 전력을 보호하길 요청 하고 중 거리 탄도 미사일 전략 탄도 미사일 의 개발을 시작 밑 서두를 것을 요청 거기에 1957년 스푸트니크 쇼크로 1959년 까지 미국에 탄도 미사일을 날릴 능력이 생길 것 이라고 결론

미국 랜드 연구소 소장이 참여한 위원회에서 전략 공군 사령부가 폭격기기지도 취약하고 조기경보 능력도 부족하며 탄도 미사일에 대한 방어능력이 너무 부족하고 능동적, 수동적 방어 계획의 개선을 조언함 전체적인 시스탬 때문에 임의의 날짜에 여섯 시간 안에 이륙 할 수 있는 비행기가 없다고 보고했고 더군다나 전략공군사령부는 50~150개의 핵무기를 폭격기로 날려 보낼 수는 있었겠지만 소련 방공망에 파괴 될 거라고 봄(사실상 소련에 핵 공격이 불가능할 거라는 이야기를 겁나 길게하내)

소련이 우주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자 육군 대장이 "1964년경이 되면 숫자와 효과 측면에서 미국이 소련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함"다른 중장은 "이미우리는 불리하다고 했고 기술 주도권을 회복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

소련에 근처에 레이더 기지를 배치해 감시하고 플레세크에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장을 건설을 의심했의나 1960년에 U2기가 해당지역을 조사했지만 격추되었고 만약했다면 실전 운용중인 대륙간 탄도미사일발사 기지를 정찰 했을 것임 그리고 정보기관들이 짐작한 것 만큼 발달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실패함

그래서 위성을 만드는데 집중함 암호명 코로나 인 키홀 그러고 네 가지 종류의 키홀 위성을 쏨

이로 인해 소련의 정보를 획득해 많은 의심들을 재거하고 결정적으로 M16의 첩자 노릇을 한 올랙 펜코프스키 중령이 정보에 1961년 정보를 제공 받아 소련 능력이 구라임을 알게 됨


-핵무기와 미군

전략정찰 기술의 발전도 중요 했지만 장거리 운반 수단의 획득은 더 놀라웠음 처음에는 전용기 10대만 핵무기를 투사 할 수 있었고 핵폭탄 조립도 힘들었음 핵무기 운반을 위해 훈련된 요원도 50명 뿐 1948년 이전까지 공군은 자격 요건을 충족시키는 조립팀을 보유하지 못함 1948년 9월이 되어서야 핵전쟁 계획이 세워짐 1947년 봄까지는 대통령이 핵무기 보유량에 대해 보고를 받지 않음


1948~1952년 기술 혁신 덕에 펫맨 마크3의 25배 이상의 폭팔력을 가지게됨 이는 1952년부터는 양산함 1949년 수소폭탄을 개발 계획 수립 1950년에 승인 1952년 실험 1953년 전략공군사령부는 수소폭탄승운반능력을 갖춤 더 적은 방사성 물질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게 되고 탄두가 작아지게 됨 안전하고 대응 태세도 향상됨


랜드연구소의 민간인들이 많은 이론들을 만들었는데 이중에는 억제이론, 선제공격, 제2격, 선제 응징공격 표적, 개념을 개발함

(제 2격은 핵 공격을 받고나서도 반격이 가능한 능력을 뜻하는 것 같음)

1953년 NSC 192/2 '국가안보정책'에 대통령이 서명하고 이에 따라 대량 보복교리가 군의 핵무장 전술과 핵무기의 개발과 배치를 요청함 그리고 조기경보와 대륙방공을 통해 미국의 동원기지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인정

뉴룩 국방계획은 원자력시대에 맞 각군의 규모와 구성을 크게 바꾸었다. 6.25시절에 세워던 군비 확장 계획의 많은 부분을 취소하고 육군의 6개 사단 공군의 15개 비행단, 해군함정 300척을 없애버림

뉴룩 정책은 대량 보복전략의 대들보인 전략공군사령부에 최우선권을 줌 지상군은 줄임

1953년 회계연도에 공군의 예산은 육군보다 약간 적었으나 2년만에 두배 가까히 됨 1958년 회계연도에는 국방예산의 48%를 차지함 1950년대 초에는 원자력위원회는 "전술원자탄에서 전략적 역활을 뺀다면 타당한 이유를 들어 전술 원자탄을 다른 무기들과 동일하게 다룰 수 있다"고 씀 예를 들어"보병 부대까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다면 핵무기도 재래식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말함(1961년에 데이비 크로켓이라는 핵탄두가 들어간 무반동총이 나왔음)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