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혁명의 내적 측면: 대안적 근대화
차르 체제가 자살하다시피 무너진 후 러시아는 처음에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것이 2월 혁명의 길이었다. 2월 혁명으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볼셰비키 10월 혁명으로 무너졌지만, 그것이 아니었더라도 러시아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쉽게 안착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중부 및 동부 유럽의 수많은 국가들이 전쟁사이 기간 중에 그러했듯이 2월 혁명 이후 체제는 파시즘 혹은 준(準)파시즘으로 귀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제정 시대 말기 이래 취약한 물적 기반 위에서 노동계급을 과잉 착취함으로써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는 길을 택해 왔던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이를 보장해주던 차르정부가 2월 혁명으로 무너졌으므로 새로운 보호자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군부의 힘을 빌거나 외국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7년 8월 말에 일어난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시도는 이를 말해준다.13 취약한 러시아 부르주아지가 전쟁과 노동계급의 압박 속에서 선택한 것이 옛 차르 정권의 군부에 의존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사실은 2월 혁명 노선의 몰락을 자초하였다.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제압하면서 러시아혁명은 급속도로 급진화하였고, 러시아는 10월 혁명, 곧 볼셰비키 혁명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길도 아니고 파시즘적 군국주의의 길도 아닌 제 3의 길이었다. 볼셰비키는 10월 26일 제 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정부의 수립을 선포했고 평화에 관한 포고령으로 무병합・무배상의 즉각적 전쟁종식을 선언했으며, 토지에 관한 포고령으로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이 이를 이용하게 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인류최초의 총력전이었던 1차 세계대전에서 교전국들 중 그 어느 나라도 상대병력의 궤멸 없이는 전쟁을 끝내지 않으려 하던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이 전쟁 자체에 시종일관 반대했던 유일한 집권세력이었다. 즉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반대와 봉건적 토지소유의 철폐가 볼셰비키의 집권을 받쳐준 두 기둥이었다.
초기 볼셰비키정부는 곧이어 민족들의 권리, 여덟 시간 노동제, 교육부 창설, 은행 국유화 등등에 관한 수많은 포고령을 내놓고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했는데 그 중 어떤 것은 시민혁명단계에 속하는 것(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들의 이용권 아래 두게 한 ‘토지에 관한 포고령,’ 소수민족들의 자율권을 강화한 ‘러시아의 여러 민족들의 권리 선언, 신분제 철폐, 정교분리)이었고 어떤 것은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지는 것(은행국유화, 노동자에 의한 생산통제)이었다.
사실 러시아혁명의 성격에 대한 해석은 혁명 당사자들인 볼셰비키 사이에서도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부하린이나 프레오브라젠스키와 같은 볼셰비키 내 급진주의자들은 내전 국면에서 집필한 『공산주의의 ABC』에서 공산주의 정책을 당장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14 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제발전단계에 상관없이 자기 사회가 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급진적 노동자 그룹의 좌파적 요구를 제어해야 할 입장에 있었던 볼셰비키 내 중도파 세력은 10월 혁명으로 바로 전면적 사회주의 정책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10월 혁명이 사회주의적 혁명의 과제와 부르주아적 혁명의 과제를 함께 수행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대소부르주아지가 해결할 수 없었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를 해결하는 사명이 10월 혁명의 몫으로 떨어졌고,” 이 때문에 러시아의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거의 유혈 없이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으며 “러시아 노동계급은 [……] 자본주의의 전 세계적 운동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시기에 [……]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하게 되었고, 완료했으며, 완성했다.”15 볼셰비키는 민주주의혁명이 완수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집권을 하자, 시민민주주의단계의 개혁과 사회주의단계의 개혁을 함께 추진하게 된 것이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수립된 후 최초의 사회주의 헌법으로 제정된 1918년 헌법은 생산자, 근로인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선포했다. 물론 이 이후 사회는 격렬한 계급투쟁을 겪었다. 러시아혁명은 프랑스 혁명을 모범으로 삼았는데 자코뱅의 ‘인민의 적’ 법률처럼16 소비에트 러시아도 ‘인민의 적’을 색출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무력화시키면서 체제를 강화시켜갔다.17 시민민주주의 단계가 성숙하지 않은 상태였던 만큼 그 대가를 그만큼 더 크게 치러야 했다.
1918년 여름부터 시작된 내전은 엄청난 인적, 물적 희생을 수반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고, 볼셰비키 정권을 백군을 상대로 생사를 건 투쟁을 펼쳐야 했다. 그러나 1920년에 내전에서 승리하고 크론슈타트 해군병사들의 도전을 진압한 후 레닌은 과감하게 사회구성원들을 향한 화해정책인 신경제정책으로 나아갔다. 이는 소농민을 비롯한 생산자들과 소상인, 소기업인들에게 경제활동의 일정한 재량권을 허용해 주는 것이었고 혼합경제체제의 문을 여는 것이었다.18
1920년대를 거치면서 볼셰비키 정부는 권력을 공고하게 장악하게 되었고 당내 논쟁에서 승자가 된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은 생산력주의로 나아갔다. 스탈린은 레닌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집권했으나 레닌보다 훨씬 가혹한 방식으로 통치했다. 스탈린의 생산력주의 정책은 레닌의 신경제정책처럼 생산자들을 배려함으로써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가 국가의 일방적인 계획과 명령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속에서 외연적 성장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이 같은 외연적 성장을 위해 스탈린은 집권 공산당 내에서조차 일체의 정치적 유연성을 불허하였다. 이런 점에서 스탈린은 레닌과는 다른 원칙 위에 서 있었던 권력자임이 분명하다. 특히 스탈린 집권기에 공업부문과 농업부문에 대한 대우는 가장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농업부문에서는 1929년부터 강행된 농업 집단화로 인해 농민층이 농노해방 이래 또다시 예속상태에 빠졌고 농업부문의 만성적 부진이 소련경제의 아킬레스건을 이루게 되었다.19 반면 공업부문은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실시되기 시작한 5개년 계획에 따라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20
(중략)
노동계급 혁명으로 수립된 소련이 어떻게 생산력주의의 길로 가게 되었을까. 혁명전 러시아에서는 모든 사람이 강한 국가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산업화이건 전쟁이건 당면한 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있는 국가라는 의미의 강한 국가였다. 차르 체제는 반대자에 대한 억압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만 강력한 국가였고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조정, 농민경제 향상, 대외전쟁수행 등 많은 면에서 무능력을 드러냈다.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러시아제국의 최고위 정치인들 일부는 황제를 교체하거나 권력구조를 변경하는 쿠데타를 계획했다.21 이른바 정치세력의 신뢰를 받는 책임내각인 신뢰내각을 수립하려는 시도도 있었다.22 이 모든 것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국가기구를 수립해 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권력기구의 재편의 방향에 대해서는 극과 극으로 의견이 나뉘더라도 현행 차르체제가 무력하며 비능률적이라는 데 대해서는 거의 모든 구성원들의 의견이 일치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구성원의 동의수준이 낮은 정부가 마지막 발걸음을 끌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제정 러시아는 매우 약한 국가였다. 니콜라이 2세가 퇴위를 선언했을 때 이를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2월 혁명 후 수립된 임시정부도 강한 국가 창출에 실패했는데 이는 정부 권력의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존속 8개월 동안 차르 체제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한 정치적 자유를 허용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전쟁수행, 산업관리, 농업문제 해결방안 제시 등 가장 중요한 국정 현안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민중은 2월 혁명 초에는 소비에트는 물론 임시정부에도 지지를 모아주었으나 차츰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는 자본가, 자유주의자들의 정부로 입지가 축소되었으며 특히 코르닐로프 사건 이후 임시정부와 민중 사이에는 깊은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다.23 임시정부는 자신의 정책을 위해 민중의 지지를 동원할 역량을 상실하였다. 이런 점에서 임시정부 시기의 러시아는 약한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10월 혁명 후 내전을 거친 다음 비로소 강한 국가가 탄생했다. 사회적 역량을 동원하여 자신의 목표를 실행에 옮기고 내외적 과제에 대처할 능력이 있는 국가라는 의미에서 강한 국가였다. 스탈린은 초고속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국가를 만들어냈다.
러시아혁명이 마르크스주의에 바탕을 둔 혁명이었으므로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강력한 국가의 작동으로 소련식 사회주의는 일정한 단계까지는 생산력의 해방을 가져왔다. 적어도 1950년대까지의 소련 체제는 생산력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생산관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이른바 과학기술혁명 시기부터 소련의 생산관계는 생산력에 질곡이 되었다.24 경제성장은 정체하고 사회주의적 근대화도 한계에 부딪쳤다. 그러고 보면 러시아혁명으로 수립된 체제의 효율성은 반세기 정도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은 군사력과 공권력 행사라는 면에서 국가권력이 엄청나게 강했으나 사회구성원의 창의성과 주체성에 바탕을 둔 역량과 자발적 동의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끌어내서 과제를 해결하는 데 무능했다는 점에서 19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약한 국가가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혁을 하고자 한 것이다.25 정치개혁을 통해 경제개혁으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고, 레닌의 신경제정책이 그러했듯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성공했으면 오늘날의 중국경제와 같이 당이 명령고지를 장악한 상태에서 사회주의적 경제와 시장경제가 혼합된 체제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실패로 끝났고 소련은 붕괴했다.26 우리가 한때 북방의 최강자로 여겼던 사회주의종주국 그 소련은 러시아혁명의 결과로 태어났으며 냉전의 한 축이 되었으나 1991년 말, 해체되었다. 일반적으로 소련의 해체를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여기고 있으며, 냉전의 해체를 의미하는 사건으로도 여긴다. 실로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기였던 20세기는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문을 열고 (20세기 초에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리허설이라 불리는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으로 성립한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서구와 다른 경로의 산업화, 근대화로 나아갔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적 소유권을 배제한 채 이루어진 산업화였고 시민권의 바탕을 소유권에 두지 않는 방식의 근대화였다. 서유럽 국가들은 12세기 이래 로마법의 계승을 통해 절대적 소유권의 개념을 점차 수용하였고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 속에서 이를 확립하였다. 영국은 존 로크의 저작에서 확인되듯 소유권을 인격권과 동일시하는 원칙이 가장 철저히 확립된 사회가 되었다. 프랑스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조에서 ‘공적인 필요를 위해서는 재산을 수용할 수 있다’고 인정했던 것에서 보듯, 소유권의 절대성에 대한 강조가 영국처럼 강하지 않은 사회였다. 그럼에도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권은 재산소유 정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부여되었다. 1등 시민이 있었고 2등 시민이 있었다. 시민권은 소유권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소유권의 면에서 볼 때 러시아는 오랫동안 로마법적 소유 개념을 계승한 사회가 아니었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적어도 귀족 토지는 절대적 소유권의 대상이 되었다. 안나 여제가 포메스치예(봉직조건부 소유지) 소유자는 보취나(세습토지) 소유자와 같은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한 것이 1831년이었고 예카테리나 여제는 귀족들의 재산소유권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보장하였다.27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전까지의 약 2세기 가까운 시기가 러시아에서 절대적 소유개념이 존속한 시기였다. 부르주아지는 비록 속도는 빠르지 않을망정 성장하고 있었고 19세기 말부터 그 성장이 다소 가속화하였다. 따라서 혁명전 러시아에서 사적 소유권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오류다. 오히려 공유재산, 국유재산에 대한 개념이 명확히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 혁명전 러시아의 소유권 시스템의 특징이었다는 견해도 있다.28
반면 볼셰비키 혁명으로 수립된 소비에트 체제는 사적 소유권의 절대성에 대한 부정 위에 세워졌다. 그러면서도 그 전반기에는 산업화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절대적 소유권의 화신인 부르주아지 주도의 산업화, 근대화를 이룬 서구 국가들과는 다른 경로였다. 이 점에서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러시아는 서구적 근대화를 따라가던 길에서 돌연 벗어나 전혀 다른 방식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소유권의 절대성이 부정되었으므로 소유권과 시민권의 동일시는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다. 시민적 권리는 이른바 반동계급으로 여겨진 혁명전 기득권층에게 일시적으로 제한되었던 것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모든 구성원들에게 동등하게 부여되었다. 소비에트 체제는 재산소유뿐 아니라 성별, 인종에 바탕을 둔 차별적 시민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여자들, 소수민족 구성원들도 남자들, 주류민족 구성원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사회적 권리의 보장이라는 면에서 혁명 러시아는 획기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콜론타이를 비롯한 여성 혁명가들의 노력으로 혁명 직후 새로 도입된 여성・가족정책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다.29
68혁명 이후 서구사회가 이 분야에서 이룬 성취는 대부분 혁명 후 소비에트 사회가 이룬 것을 반세기 이후에 실현한 것이다. 1세기 후인 지금 한국 사회는 출산 ・육아의 사회적 지원과 같은 정책을 시행해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1세기 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실시되었던 정책을 연상케 하며, 어떤 경우는 사실상 같은 성격의 것이다. 또한 무상교육권, 무상의료권은 소련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졌던 대표적인 권리였다. 소비에트 정권 초기 공공의료정책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니콜라이 세마쉬코는 1918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러시아 소비에트 의료위생부 대회에서 “소비에트 현장의료의 조직과 과제”를 발표하면서 ‘치료의학은 첫째, 보편적 접근성, 둘째, 무상이라는 원칙의 철저한 실행에 바탕을 두고 확립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30 그의 주도로 그 다음 달에 설치된 보건인민위원부는 통합의료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사회구성원들의 건강보호를 위한 구성원 참여와 국가의무를 장려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었다.31 이러한 공공의료원칙은 미국의 의학사가인 헨리 시게리스트 같은 서방 의학자들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32 자본주의를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혁명 후 러시아에서는 기본소득이 현물의 형태로 제공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한편, 러시아혁명 후 진행된 근대화는 전체 구성원들의 시민적 권리를 상당부분 유보하거나 제한한 채 이루어진 근대화였다. 그것은 주로 자유권의 제한으로 나타났다.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가장 크게 제한되었다. 문학인들과 예술가들도 창작활동의 자유를 제한받았다. 1930년대 이후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의 뛰어난 음악은 집권 공산당이 제시하는 가이드라인과의 심각한 마찰-갈등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1910-20년대에 세계 미술을 선도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입지를 잃어버렸고 이 자리에 대신 들어선 것은 구상성(具象性), 계급성, 선전성이 강조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이었다.
정치적 자유의 부재와 높은 수준의 사회적 권리가 결합한 소련식 시민권이 성립하였다, 사회적 권리는 사회구성원들이 투쟁의 결과로 쟁취하는 것이라기보다 당이 내려주는 혜택의 성격을 띠었다. 독일 학자 야라우쉬는 옛 동독체제를 후견자 독재 체제로 불렀다.33 소련이 그 원형인데 동독에 비해 후견자성보다 독재성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소련 국민들은 성숙한 주체로서 정치적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시민이 되지 못하고 점차 피후견자에 불과한 지위로 떨어졌다. 이것이 소련 체제의 최대 약점이었다. 앞에서 1960년대 이후 이른바 과학기술혁명 시기부터 소련의 생산관계는 생산력에 질곡이 되었고 사회주의적 근대화도 한계에 부딪쳤다고 말했지만, 이는 사회구성원들의 정치적 자유 부재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혁명적 독재로서 과도기적으로 행사되었어야 할 강력한 권력이 견제 받지 않은 채 계속 지속되어 자유로운 개인이 부재하게 되었던 것이 혁명으로 수립된 체제의 치명적 정체(停滯)를 가져왔다.
13. 코르닐로프 쿠데타 시도의 진정한 제안자가 누구인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임시정부 수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와 제국군대 장군 라브르 코르닐로프는 서로를 이용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케렌스키도 코르닐로프도 자신이 최고 권력자가 되어 백색 독재 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이 있었다면 이를 반겼을 것이다.
14. Н. И. Бухарин и Е.А. Преображенский, Азбука Коммунизма. Популярное объяснение программы Российской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большевиков(Москва, 1919).
15. Я. Яковлев, Об историческом смысле октября (Москва: Красная Новь, 1922), p. 15.
16.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세력은 루이 16세를 ‘인민의 적’(enemi du peuple)으로 규정하여 처형하였다. 자코뱅 집권기이던 1794년 6월 10일에 제정된 혁명력 2년 프레리알(Prairial, 牧月) 22일 법은 ‘인민의 적’ 범위를 확대하였다. 이 법은 혁명재판소가 ‘인민의 적’을 처벌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인민의 적’이란 “무력이나 간계로써 공공의 자유를 파괴하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혁명재판소에서 ‘인민의 적’으로 평결 받은 자는 사형으로 처벌한다고 규정하였다.
17. 볼셰비키 정부는 1917년 11월 28일(현행 양력으로는 12월 11일)에 공포된 포고령에서 ‘인민의 적’ 개념을 법적으로 도입하면서 이렇게 천명하였다. “인민의 적들로 가득 채워진 입헌민주당의 모든 지도자들은 이로써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자가 될 것이고 즉각 체포될 것이며 혁명 법정의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Stephane Courtois, Nicolas Werth, Jean-Louis Panne, Andrzej Paczkowski, Karel Bartosek, Jean-Louis Margolin,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 (London;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55쪽을 참조하시오. 이 책은 소련해체 이후에 출판된 책들 중에서도 소련 체제에 대해 가장 혹독한 비판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문헌의 하나다.
18. 중국의 덩샤오핑이 1978년 이후 취한 정책은 신경제정책에 비견할 수 있다.
19. 20세기 말에 소련 농업집단화의 문제점을 역사학 연구를 통해 밝힌 가장 신뢰할 만한 연구서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Viktor Petrovich Danilov, Rural Russia Under the New Regime tr. by O. Figes (Indiana University Press, 1988).
20. 제철 금속, 기계 및 중장비제작, 토목 건설 등 중공업 분야에서의 성과가 특히 두드러졌다. Sheila Fitzpatrick, Op. cit., p. 153.
21.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아저씨이자 1차 대전 개전 후 한동안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거칠고 엄격하지만 차르의 유약함과 대비되는 결단성, 단호함을 보여주는 인물로 큰 인기를 모았다. 니콜라이 2세의 부인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황제의 유약함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그를 황제로 옹립하고자 한다는 불안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차르는 황후의 강력한 종용 때문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스스로 그 직책을 맡았다. Murray Frame, Boris Kolonitskii, Steven G. Marks, Melissa G. Stockdale(ed.), Russian Culture in War and Revolution, 1914-22 Book 2. Political Culture, Identities, Mentalities, and Memory (Bloomington: Slavica Publishers, 2014), pp. 32-35; Leon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translated from the Russian by Max Eastman, vol. 1(London: Wellred Publications, 2007), p. 89. 황제의 조카사위인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과 황제의 사촌동생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이 주도한 그리고리 라스푸틴 살해사건도 러시아의 전쟁수행능력을 강화해 보려는 시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유수포프공은 라스푸틴 암살사건의 전말을 기술한 회고록을 남겼다. Ф. Ф. Юсу- пов, Конец Распутина: воспо-минания (Париж: Лев, 1927).
22. 효율적인 전쟁수행을 가능케 할 신뢰 내각 수립 시도와 좌절에 대해서는 박상철, 「1915년 봄-여름 러시아의 군사적 패배와 진보블록의 형성」, 『러시아연구』 제 25권 제 2호(2015), 87-116쪽을 참조하시오.
23. 코르닐로프 쿠데타가 일어난 후 임시정부에 대한 민중의 실망감은 병사, 농민 집회가 발표한 성명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Mark Steinberg(ed.), Voices of Revolution, 1917(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1), pp. 231, 235 passim.
24. 1964년 이후 1982년까지 이어진 브레즈네프 서기장 집권기는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공식 역사학에서 ‘정체(停滯)의 시기’(Эра застоя)라고 명명되었다.
25. 특히 대외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페레스트로이카의 전말을 살핀 최근의 글로는 김남섭,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와 냉전 체제의 종식」, 『역사비평』 97호(2011)를 들 수 있다.
26. 순수하게 경제체제의 면에서 러시아혁명의 테르미도르 반동에 대해서 말한다면 신경제정책이 1차 테르미도르 반동이었을 것이고 스탈린은 이를 뒤엎은 것이었으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2차 테르미도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7. E. Pravilova, A Public Empire: Property and the Quest for the Common Good in Imperial Russia (Princeton & Oxfor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 pp. 23-35.
28. Ibid., p. 42.
29. 영국의 러시아사 전문가 스티브 스미스 교수는 최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성해방운동을 러시아혁명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의 하나로 손꼽았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암울한 러시아 봤다면 마르크스 경악했을 것> (인터뷰 100주년 맞은 러시아혁명전문가 스티브 스미스교수) ≪중앙일보≫ 2017년 11월 4일, 19쪽.
30. “Создание Наркомздрава РСФСР”, http://poisk-ru.ru/s35854t3.html(검색일:2017.10.3.)
31. Henry E. Sigerist, Socialized Medicine in the Soviet Union (New York: Victor Gollancz, 1937)을 참조하시오.
32. Henry E. Sigerist, Socialized Medicine in the Soviet Union (New York: Victor Gollancz, 1937)을 참조하시오.
33. Konrad H. Jarausch, "The GDR as Welfare Dictatorship", in Konrad Hugo Jarausch, Dictatorship as Experience: Towards a Socio-Cultural History of the GDR(New York; Oxford: Berghahn Books, 1999), p. 47. 동독의 경우 에리히 호네커의 집권 이후 가족정책은 복지국가의 모범에 가까웠다. 소련의 초기 여성정책은 아주 선구적이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후퇴했고 1970-80년대 동독 수준은 아니었다. 또한 여성의 사회적 권리는 크게 신장되었지만 스탈린 집권 이후에는 정치적 영역에서 여성의 대표성은 매우 낮았다.
레볼루숑추
억압적인 사회는 결국 터질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