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혁명의 민족・국제관계적 측면
프랑스혁명은 국제관계 재편성에 대한 장기적 전망이나 근본 원칙이 없이 진행되었다. 세계혁명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국제관계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면 아마 제국주의 경쟁에서 프랑스가 불리하지 않은 효율적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혁명세력의 희망사항이었을 것이다. 프랑스혁명은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유럽의 국제관계를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식민주의, 인종주의에는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식민지 노예문제에 대해서는 프랑스 혁명기 논객들이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지만34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였을 뿐, 혁명정부가 이를 우선순위의 문제로 놓고 그 해결을 위해 고심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혁명은 서구중심주의를 오히려 공고히 하는 하나의 계기이기도 하였다.
그 반면 러시아혁명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후의 국제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소비에트 체제가 제국주의, 식민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이다.
첫째, 러시아혁명으로, 볼셰비키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뿐 아니라 민족해방을 지향하는 세력 전반이 고무되었다. 러시아혁명은 민족혁명이 아니라 계급혁명으로서의 성격을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가 식민 지배를 받거나 반(半)식민 지배 아래 놓인 약소국이 아니었으므로 혁명세력에게는 러시아 자체의 민족적 독립이나 해방이라는 목표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동시에 전 세계적 차원에서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한 체계적, 포괄적 해법을 내놓은 유일한 혁명이기도 하였다. 10월 혁명의 주역이었던 볼셰비키는 국내적으로는 소수민족을 위한 포괄적 원칙으로서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평등을, 국제적으로는 민족자결, 반제국주의, 식민지 독립을 주장하였다. 소련은 이런 점에서 구식민지 국가들의 엘리트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도 러시아혁명으로 크게 고무되어 독립을 요구하는 활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918년 6월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창당되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사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35
사회주의자가 아닌 지식인들도 이 혁명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질서와 질서변화의 공간 속에서 조선 독립의 새로운 계기를 찾고자 하였다. 이광수를 비롯한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1919년 2월 발표된 2.8 독립선언서에서 “최후 동양평화의 견지로 보건대 위협이던 아국(俄國, 러시아)은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며”라고 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념과 국제관계 원칙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박은식은 1920년에 발표한 『한국독립운동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러시아혁명당은 선두에 붉은 깃발을 내걸고 전제정치를 타도하여 크나큰 대의를 선포하고 각 민족의 자유와 자치를 허용하였다. 과거의 극단적인 침략주의자가 엄청난 변화를 이루어 극단적인 공화주의자로 바뀌었다. 이는 세계개조의 가장 앞선 계기가 되었다.”(俄國革黨首擧紅旗推翻專制宣怖廣義許各族以自由自治向之極端侵略主義者一變以爲極端共和此改造世界之最先動機也)라고 하여 지극히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며 그 진보적인 영향에 대해 아낌없는 기대감을 표현하였다.36 러시아혁명은 인도의 민족독립운동에도 고무적 영향을 미쳤다.37 인도 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자와할랄 네루는 볼셰비키 혁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태전개에도 불구하고, 또한 인류 개선을 위한 원래의 정열이 어쩌면 왜곡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소비에트 혁명은 인간사회를 큰 도약으로 전진케 하였고 꺼버릴 수 없는 찬란한 불꽃을 밝혔으며 세계가 나아갈 새로운 문명의 토대를 놓았다고 확신한다.”38 중국의 쑨원은 러시아혁명을 자신의 심민주의와 같은 원칙 위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면서 그 중에서도 특히 러시아인들의 민족적 투쟁을 중시하였다. “러시아혁명은 원래는 다만 민권주의와 민생주의이고, 민족주의가 없었다. 그러나 육년간의 분투에서 모두 민족주의 투쟁을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당의 삼민주의와 실제로는 부합하는 것이다.”39 러시아혁명은 민족해방이 어떠한 길을 따라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답을 주었던 것은 아닐지라도 민족해방세력의 행동성과 능동성 자체를 고양시키고 고취시켰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지는 일이었다.
둘째, 이에 더하여 서구적 근대화의 길을 따라갈 여건이 되지 못했던 구 식민지 사회의 엘리트에게 소련식 근대화는 대안적 근대화의 모범으로 여겨졌고 그들은 이를 환영하였다.39 소련식 근대화는 집권 공산당의 강력한 주도 아래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봉건적’ 사회경제 관계를 철폐하고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며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경제 실시를 통해 사회주의 건설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여겨졌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가 이 모델을 모방하였다.41 중국 공산당 역시 농민층이 압도적인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기치로 내건 혁명세력에 의한 권력 장악이라는 면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길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42 이 두 측면을 좀 더 살펴보겠다.
러시아혁명은 처음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를 자기정체성의 핵심으로 가지고 있었다. 자본주의 비판이 곧 제국주의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비판과 불가분의 짝을 이루는 것이 민족자결론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로서의 제국주의』(1916)를 쓰기 이전인 1914년에 민족자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이 개념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민족운동의 역사적-경제적 조건들에 대한 검토에 입각해 볼 때, 우리는 민족자결이란 민족이 이민족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분리되고 독립적 민족국가를 이루는 것이라는 결론에 불가피하게 도달할 수밖에 없다.”43
20세기 식민지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은 윌슨의 민족자결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긍정적 영향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44 그러나 미국은 분명 뒤늦게나마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국가였고 세기 전환기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카리브 해에서의 식민지 혹은 영향권 획득이라는 면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미국은 구 제국들과의 경쟁에서 식민지들의 편을 드는 경우도 있었으나 원칙으로서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론은 시기적으로 레닌의 제국주의론, 민족자결론보다 나중에 나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영국, 프랑스와 같은 구제국주의 종주국들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구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던 대부분의 식민지도 해방되었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식민지 지배의 비용과 이익을 비교했을 때 비용이 더 많이 든다는 현실적 이유도 당연히 작용했다. 식민지에 대한 직접적 지배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착취양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이유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러시아혁명이 불붙인 제국주의 비판, 소련과의 도덕성 경쟁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독립 문제는 2차 대전 발발 초기부터 이미 논의되었으나, 조선은 연합국의 교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1920년대 말부터 소련의 일인자가 된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자였으므로, 트로츠키에 비해 혁명의 전파나 이를 위한 대외적 무력사용에 소극적이었고 소련 내에서 사회주의를 유지하는 것을 더 중시했다. 심지어 소련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다른 사회의 공산주의자들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소련은 전쟁 사이기간 중에 제국주의 지배를 받거나 공격을 받고 있던 사회의 반제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코민테른을 통해 다각도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반제국주의 정책이 이타적인 동기에 의해서였던가 아니면 소련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였던가는 별도로 다루어야 할 문제이겠으나, 제국주의 세력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또한 소련은 스페인 내전 개입에서 보듯, 인민전선정책을 통해 반(反)파시즘 세력의 투쟁을 지원했고 나치 독일과 전면전을 치러 엄청난 희생을 감내한 끝에 승리하기도 했다. 이차대전에서 연합국이 파시스트 세력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소련이었던 것이다.45 1950년대의 헝가리 사태, 더 길게는 1960년대 말의 프라하의 봄 사태 이전까지 소련이 서구의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지지를 받은 것은 바로 이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노선 때문이었다.46
련은 냉전시기에 서방자본주의 선발국들을 일관되게 제국주의 국가들이라 칭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를 해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왜 그토록 놓치기 싫던 알제리의 해방을 허용했을까? 식민지 해방이 시대정신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혁명 이전에 제국이었으나 러시아혁명은 이 제국을 부정하였기에 제국주의 문제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 때까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약자의 편을 드는 혁명은 러시아혁명이 유일했다. 랑시에르는 정치란 ‘몫 없는 자’들의 몫을 공동체에 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47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고 억압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치안’과 다른 ‘정치’라고 보는 것이다. 러시아혁명은 ‘몫 없는 자’들 편에서 이루어진 혁명이었는데, 이는 국제적 차원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아시아가 부활할 수 있었고 그 영향 아래 아프리카의 정치적 주체화도 서서히 이루어졌다. 온전히 러시아혁명의 공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시대정신이었다는 의미이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정책 때문에 고사의 위기에 몰린 적도 있지만 거시적으로는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의 반제국주의 정책으로 고취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모범으로 하여 수립된 국가이다.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 권력기구의 명칭과 구조, 사회경제정책, 문화예술정책 등 모두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전거를 구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마오가 ‘노동자, 병사, 농민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을 할 때48 우리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다. 여기서 병사는 왜 나오는 것일까? 물론, 반제국주의투쟁, 반군벌 투쟁에서 병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 마오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하여, 군사력에 바탕을 둔 혁명 권력의 성격을 매우 투박하게,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했다. 당연히 군사적 측면에서 혁명 권력의 근간인 병사들을 잘 대우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직접 생산자들과 동렬에 놓이는 별개의 계급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권력을 가진 공산당 지도부가 어떠한 담론으로 어떻게 결정하는가의 문제다. 공산당 지도부는 러시아혁명의 선례를 경의로써 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농민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토지문제를 놓고 전쟁 결과를 좌우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세력이었다는 것, 이들이 병사대표자 소비에트를 구성했고 이 소비에트가 러시아혁명 세력에게 결정적 지지 세력이 되어주었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혁명론 및 정책에서 병사 개념은 명백히 러시아혁명을 참조한 결과다.
러시아혁명은 반제국주의 혁명이었을 뿐 아니라 내부의 소수민족 정책에서도 그 이전까지의 다른 혁명들과는 다른 원칙을 채택했다. 적어도 혁명 초기 소비에트 권력은 지배민족인 대러시아 민족보다 소수민족들에게 더 큰 권리와 혜택을 주었고 더 나아가 소수민족을 근대민족으로 형성시키는 정책을 쓰기까지 하였다. 1920년대에 이는 토착화(коренизация: korenizatsiia)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49 토착화정책은 소수민족의 언어-문화 장려, 소수민족 출신 엘리트 양성, 소수민족 집단의 경제적 발전(산업화 포함)을 주된 내용으로 하였다. 이는 소련 공산당 권력이 소수민족의 러시아화를 통한 중앙집권국가 형성이라는 구상을 내려놓고 소수민족의 민족형성을 통해 연방제를 채택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영토와 문자, 독자적 엘리트를 가진 근대민족의 형성이라는 과정은 중앙아시아 민족들 사이에서 특히 두드러진 결과를 낳았다. 혹자는 소련의 연방제 채택을 단순히 내부 소수민족들, 혹은 피지배민족들이 혁명 권력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하나, 중요한 것은 정책의 내용과 그 결과다. 혁명과정에서 여러 가지 무리수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소수민족, 피지배 민족에 대한 정책에서도 소비에트 권력은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려 했다. 이러한 정책을 두고 한 연구자는 소련을 “소수자 우대 제국”(Affirmative Action Empire)이라고 불렀다.50 1920년대 신경제정책이 소생산자들과 소상인을 향한 화해정책이었다고 한다면 토착화정책은 이에 비견할 만한, 소수민족을 향한 화해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소련의 민족정책도 지극히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대에는 토착화정책이 비교적 원칙에 입각하여 추진되었던 데 반해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러시아화가 진행되었고, 그것을 의미하는 구호인 소비에트 애국주의가 토착화를 압도하게 되었다. 민족문제에서도 현저한 후퇴가 발생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대외적 긴장이 강화되자 소수민족을 상대로 하여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정책이 취해지기도 하였다. 고려인들이나 크림 타타르인들이 겪어야 했던 강제이주는 이 같은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현상이었다.
중국은 민족정책에서도 소련의 모범을 대폭 참조하였다. 중국도 역시 복합민족국가이되, 중국공산당 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스스로 제국주의 세력을 물리쳐야 하는 반식민지 상태에 있었으므로 민족문제와 관련된 기본 상황이 크게 다르기는 하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권이 혁명 러시아로부터 소수민족의 이탈을 막고자 했던 것과 유사한 과제를, 쑨원의 국민당이건 마오의 공산당이건, 중국의 혁명세력도 가지고 있었다. 마오는 기본적으로 소수민족의 민족자결을 지지하되 소수민족의 해방이 반제 반봉건 혁명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고51 이 전략의 테두리 안에서 민족문제를 다루었다. 중국공산당 정부 수립이후의 소수민족 정책도 원칙적으로는 민족들의 평등과 지역 단위의 민족 자치, 소수민족 간부의 양성 등을 내세운 것이어서52 소련의 토착화정책과 아주 유사한 점이 있다. 물론 아주 큰 차이도 있기는 하다. 소련은 여러 피지배민족들을 정치적 민족으로 형성시켜 소련으로부터의 탈퇴권을 가진 연방공화국 혹은 문화적 자율권을 가진 자치공화국으로 만들었으며, 이들을 묶어 연방을 이루었다. 그 반면 중국은 탈퇴권을 가진 공화국들의 연합이라는 의미의 연방제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나라다. 소련의 붕괴는 곧 연방의 해체를 말하는 것이었음에 반해 중국 공산당 체제가 건재하고 있는 것은 티벳인들이나 신장 위구르인들과 같은 소수민족들의 동요를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러시아혁명 이후 추진된 정책들은 명암을 가지기는 했으나, 그 때까지 인류가 목격한 바 없는 새로운 실험이었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것이 국제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자.
러시아혁명은 유럽의 변방에서 일어난 혁명이었으나 후진국으로서 선발국을 모방하거나 따라하려 한 것이 아니라 후진국이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가서 최첨단, 최선진의 생산양식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여기서 생산양식 변화의 중심지 이동이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이는 역사상 최선진지역이 아닌 변두리에서 일어나 가장 선진적인 체제를 만들어낸 변화과정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것을 말한다. 생산양식의 계기적 변화가 중심지역의 변화를 수반하면서 일어난다는 의미다.53 서양사에서는 그리스에서 로마로 고대문명의 중심이 이동한 것, 봉건제가 성립하여 선진지역이 지중해에서 유럽대륙으로 이동한 것, 산업혁명으로 최선진지역이 유럽대륙에서 브리튼 섬으로 이동한 것을 들 수 있다. 변방에서 일어난 생산양식상의 혁명은 역사적으로 그보다 더 선진적이었던 지역으로도 전파되었다. 봉건제가 옛 로마문명의 공간들로도 퍼져나갔던 것이나, 산업혁명이 유럽대륙 전체로 전파되었던 것을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 변방에서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더 선진적인 지역으로 퍼져나가 안착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혁명기 러시아가 단순히 생산관계만으로 포괄되지 않는 문명의 전체적 수준, 시민사회의 성숙도라는 면에서 선진적인 사회를 설복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은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을 전제로 해서 일어난 혁명이고 또 그러한 기대 아래 혁명을 전파하기 위한 노력도 여러 차례 있었으나 러시아의 서쪽에서는 이것이 모두 실패하였다.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독일혁명은 1918년 11월 실패로 끝났고 폴란드에 소비에트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감행되었던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패배로 끝나서 볼셰비키로 하여금 세계혁명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54 헝가리에서는 1919년 3월에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쿤 벨러가 주도하는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정권은 4개월 남짓 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 후 중동부 유럽지역에서는 대부분 파시스트 혹은 준파시스트 체제가 수립되어 이차 대전까지 지속되었다. 이차대전 후 중동부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에서 사회주의 정권은 자생적인 것이거나 혁명의 전파에 의해 수립된 것이 아니라 파시스트 세력의 격파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소련에 의해 이식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즉 이들 국가에서는 노동운동 세력이나 자생적 사회주의 정치세력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 수립시도는 소련에 의해 저지당하였고 친소련파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치세력과의 연립정권인 인민전선정부 수립을 주도했다가 점차 친소공산당 단독정권 수립으로 나아간 것이 일반적이었다.55 유럽의 선발 자본주의 사회들에서는 러시아혁명 후 소비에트 러시아에 우호적인 노동자들의 집회와 시위가 자주 열리기는 했으나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만한 세력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이렇듯, 러시아혁명은 러시아의 서쪽으로는 전파되지 못했던 것이다.
대신 혁명은 동쪽으로 나아갔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1924년에 몽골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49년에는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세력은 국가주의의 극대화를 통한 산업화,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은 아닐 것이나, 그 외적 성과가 오히려 서구적 근대화의 길을 따라갈 여건이 되지 못했던 사회의 엘리트에게는 대안적 근대화의 선택지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였고 그들은 이를 환영하였다. 냉전기간 중에는 여전히 이는 다면적 근대화의 한 방식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한 때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소련을 모델로 하는 근대화의 길을 따랐다. 그 유효기간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다. 동유럽 사회는 소련이 해체되기 이전에 이미 이 선택지를 포기했다. 그 해체과정에서도 심각한 사회적 갈등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일부국가는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 노선을 따르고 있다. 현재 비서구적 근대화의 길이라는 노선을 대표하는 사회는 중국이다. 어쩌면 러시아혁명의 최대 수혜자는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한 공산당 세력이 제국주의 세력에 맞선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영토적 통합성을 온전히 지켜냈으며 1949년 이후에는 국제관계에서 전면에 나서기보다 내부의 체제정비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체제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이후 이른바 개혁개방에 나서서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경제가 혼합된 체제를 운영하면서 ‘세계의 공장’ 자리에 올랐으며 현재까지 공산당의 지위는 소련 해체 직전의 소련 공산당의 지위와 비교하면 훨씬 더 안정적이다. 러시아혁명을 참고한 중국혁명은 중국이 내부로 들어가 숨 쉴 틈을 허용해 주었고 그 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에 따른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중국은 소련에 비해 냉전적 대립으로 인한 부담을 훨씬 덜 짊어졌고 이것이 중국의 독자노선에는 이점으로 작용했다고 하겠다. 원래는 이것이 10월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 정부가 선택할 수도 있는 노선이었겠으나 소련은 훨씬 큰 국제관계의 부담 속에서 고투하다가 해체되었다.
중국과 소련은 한 때 중소분쟁으로 험악한 관계를 맞기도 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중국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고 현재 이 두 나라는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동맹에 맞서고 있다. 중국의 집권당인 공산당의 당장(黨章)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의 계승을 지침으로 삼고 있으며 중국 저자들은 러시아혁명에 대해 여전히 가장 높은 평가를 하고 있다. 그들은 “1917년 레닌이 영도한 러시아 10월 혁명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세계 제일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였으며 인류사회 발전의 신기원을 개창하였으니 세계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56 “10월 혁명은 우연한 일개 사건이 아니라 심층적인 역사적 필연성과 합리성을 모두 갖춘 사회주의혁명이다.”57 라고 쓰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 상이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양국이 맺고 있는 긴밀한 관계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서구적이지 않은 길을 거쳐 20세기를 지나왔던 사회로서의 동질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하다.
34. 최근 한국의 몇몇 젊은 연구자들은 프랑스혁명 시기 노예제 문제에 대한 논의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다음은 그 성과들이다. Kwon, Yun Kyoung, Ending Slavery, Narrating Emancipation: Revolutionary Legacies in the French Antislavery Debate and 'Silencing the Haitian Revolution,' 1814-48 Ph.D., The University of Chicago, 2012; 양희영,「프랑스혁명기 지롱드파의 노예제 폐지론과 식민지 구상」, 『이화사학연구』 52권 (2016).
35. 임경석, 『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2003), 68-74쪽.
36. 박은식, 『韓國獨立運動之血史』下編(성진문화사, 1975), 5쪽. (상편과 하편이 한 권에 묶여 있다.) 흥미롭게도 국제적 차원에서의 냉전이 끝난 다음에도 한국의 한 연구자는 박은식의 한문원문을 현대한국어로 옮겨 “한국독립운동지혈사”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면서 본문에서 인용된 부분을 누락시켰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상)』, 남만성 옮김(서문당, 1999), 152쪽. 민족지사로 알려진 박은식이 공산주의 혁명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박은식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의 독립운동이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37. 인도의 민족운동세력이 10월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에 공감했던가 여부와는 별개로 이 혁명이 인도의 민족운동을 고취시켰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Zafar Imam, “The Effects of the Russian Revolution on India”, South Asian Affairs. Number Two. The Movement for National Freedom in India(Oxford University Press, 1966), pp. 74-97; V.N. Shukla, “Russian Revolution (1917) and Character of the Indian National Movement”, Proceedings of the Indian History Congress Vol. 49 (1988), p. 571.
38. Jawaharlal Nehru, Discovery of India (Dehli;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p. 29.
39. 이용운, 「孫文의 러시아혁명관」, 『러시아혁명 100주년 기념 전국서양사연합학술대회 자료집』(2017. 12. 1-2)에서 재인용.
40. 사회주의적 근대화가 근대화의 한 경로로서 이론적 논의의 테두리 속으로 들어온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배링턴 무어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의 경로를 유형별로 살피는 작업을 역사사회학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고 사회학계에서 이젠스타트가 복수의 근대성이라는 담론으로 이 논의를 좀 더 정밀하게 뒷받침하였다고 할 수 있다. Barrington Moore, Social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 Lord and Peasant in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Boston: Beacon Press, 1966); S. N. Eisenstadt, “Multiple Modernities,” Daedalus Winter 2000, vol. 129, no. 1
41. 소련식 사회주의가 제 3세계 사회들을 위한 근대화의 길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시오. Johann P. Arnason, “Communism and Modernity,” Daedalus, vol. 129, no. 1, Multiple Modernities, Winter, 2000, pp. 82, 85.
42. 배링턴 무어는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을 농민혁명에 의한 공산주의 수립의 경로라는 유형으로 묶었다. Barrington Moore, Op. cit.. 스카치폴의 연구도 무어의 선행연구에서 출발해서 독자적 해석으로 나아갔다. Theda Skocpol, States and Social Revolutions: A Comparative Analysis of France, Russia, and Chin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43. Vladimir Ilyich Lenin, “The Right of Nations to Self-Determination”, Lenin, Collected Works, 4th edition, Volume 20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2), p. 397. 이 시기의 민족자결론은 러시아제국이나 오스트리아 제국과 같은 구제국들 내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문제에 대해 할 태도를 놓고 로자 룩셈부르크, 분트 등의 세력과 논쟁하면서 다듬어진 이론이기는 하다. 그러나 차후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 민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민족자결은 가장 핵심적인 투쟁구호의 하나가 되었다.
44. 박은식은 앞서 소개한대로 러시아혁명을 세계개조의 가장 앞선 계기로 여겼지만 이와 함께 윌슨 대통령의 국제연맹제안과 민족자결론도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여기며 높이 평가하였다. 박은식, 『韓國獨立運動之血史』下編(성진문화사, 1975), 5쪽.
45. 한국의 학계에서 이 점을 강조한 최근의 연구자는 류한수이다. 그의 논문 「제2차 세계대전의 “잊힌 전선”:한국 사회와 학계의 독소전쟁 인식」, 『러시아연구』 27권 1호(2017)는 소련군대가 “파시즘 진영의 패망에 가장 큰 이바지를 했다.”는 것을 한국 군사사학계, 역사교육계가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46. 소련 내부만 보더라도 스탈린주의라는 혁명 변질 과정을 겪은 후에도 소련이 이차대전 후 응집력을 가진 사회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반파시즘 투쟁이라는 공동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47.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08), 220-223쪽.
48. W. D. Kay, “Toward a Theory of Cultural Policy in Non-Market, Ideological Societies”, Journal of Cultural Economics December 1983, Volume 7, Issue 2, pp.11-12.
49 토착화 정책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로는 Gerhard Simon의 Nationalismus und Nationalitätenpolitik in der Sowjetunion. Von der totalitären Diktatur zur nachstalinschen Gesellschaft (Baden-Baden: Nomos-Verlagsgesellschaft, 1986)를 들 수 있다. 지몬은 혁명 이전 시기에는 ‘인민의 민족자결권이 볼셰비키 민족정책의 핵심구호였으나 1920년대 소련의 민족정책은 토착화정책-민족형성(nation-building)정책으로 전환되었다고 규정한다. Gerhard Simon, Nationalism and Policy Toward the Nationalities in the Soviet Union: From Totalitarian Dictatorship to Post-Stalinist Society, translated by Karen Forster and Oswald Forster(Boulder; San Francisco; Oxford: Westview Press, 1991), pp. 20, 23. 이 책은 독일어 원본의 영역본이다.
50. Terry Martin, The Affirmative Action Empire: Nations and Nationalism in the Soviet Union, 1923–1939 (Ithaca;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2001). 이 책 역시 앞의 각주에서 언급한 지몬의 연구와 더불어 토착화정책으로 집약되는 소련의 민족정책에 대한 표준적 연구서이다.
51. Shiyuan Hao, How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Manages the Issue of Nationality: An Evolving Topic (Beijing: Foreign Language Teaching And Research Press; Springer, 2016), pp. 57-58.
52. Ibid. pp. 85-94.
53. E. C. Welskopf, “Schauplatzwechsel und Pulsation des Fortschritts”, in E. Schulin(Hrsg.). Universalgeschichte(Köln: Kiepenheuer & Witsch,1974), pp. 122-3.
54. Norman Davies, White Eagle, Red Star: The Polish-Soviet War 1919-20 and ‘the Miracle on the Vistula’(London: Pimlico, 2003), p. 274.
55. Ivan T. Berend, Central and Eastern Europe, 1944-1993: Detour from the Periphery to the Periphery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1-93.
56. 張全景, 「蘇聯亡黨亡國的慘痛敎訓」, 李愼明 主編, 『十月革命與當代社會主義』(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8), p.1.
57. 陳之驊, 「十月革命的歷史必然性」, 李愼明 主編 위의 책, p.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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