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폭풍』에서 역자의 말의 내용을 조금 수정한 겁니다.
글랜츠가 『8월의 폭풍』으로 본격적인 경력을 시작한 때는,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냉전에서 가장 위험한 시기였던 1983년이었습니다.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비난하고 소련이 극도로 반발했으며, 미국의 전략단위 훈련인 에이블-아처 훈련을 소련에서 미국의 선제핵공격 실시 목적으로 판단해 초긴장 상태가 초래되었습니다. 이 초긴장과 극한의 대립상황에서 소련의 미사일기지가 컴퓨터 오작동으로 미국에 핵공격을 가하려던 우발적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었지요. 다행이 책임자인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중령의 훌륭한 판단으로 컴퓨터 오작동임을 밝혀내어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우리나라도 KAL기 격추사건과 아웅산 테러 사건이 있던 해였습니다. 1984년에는 83년의 전쟁위기에 대한 반동으로 긴장상태가 누그러지긴 했지만, 1985년 레이건이 서독 비트부르크에 있는 나치 무장친위대 묘지를 참배했던 일 등으로 대표되는 동서대립은 여전히 치열한 상태였습니다.
데이비드 글랜츠 박사와 제이콥 킵 교수, 브루스 메닝 교수, 그레이엄 터르비빌 박사, 제임스 슈나이더 박사를 비롯해 훗날 소련군사연구소를 창설하게 되는 연구자들은 과감한 연구를 시도하였습니다. 이들은 베트남전 이후 미 육군의 개혁과정에서 소련군의 작전술과 종심작전 개념을 연구해 소련군이 1970년대 말부터 시작한 재래식 전력의 확충과 재래식 군사술의 발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소련군의 방법을 배우고 소련군의 개념인 작전술을 미군에 도입해야 한다는 함의를 담은 연구를 배출하고, 군 내에서 작전술의 도입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는 냉전의 극한 대립이라는 상황에서 보면 위험할 수 있으며,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딴 사람도 아닌 대통령이 "악의 제국"이라고 비난한 적이자, 오랫동안 증오해야 할 적군이며, 기존의 러시아혐오증과 인종주의에 전후 미국과 결탁한 나치 장성들의 주장이 혼합되어 경직되고 관료적이며 음흉한 술수만 쓰고, 인명을 경시하며, 질보다 양에 의존한다는 이미지가 굳어진 조직이 소련군인데, 그런 소련군의 방법을 배우자고 하는 것은 빨갱이나 소련 첩자라는 딱지가 붙을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글랜츠가 50년대에 연구를 진행했다면, 불명예스럽게 군을 제대하고, 매카시의 악명높은 반미활동감시위원회 청문회에 끌려가고, FBI의 감시를 받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글랜츠 박사님과의 메일 교환에서, 박사님은 제게 소련/러시아 연구자로서 많은 반발에 부딫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군의 작전술 도입 과정을 다루는 연구에는 작전술 도입이 별 탈 없이 스무스하게만 이뤄진 것으로 다루지만, 실제 내부에서는 적지 않은 반발이 있었다고 합니다. 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인 미군이 빨갱이의 개념을 도입해야 하냐는 반발 말이죠. 90년대 이후에는 작전술 개념이 소련이 원조라고 하면 열등한 빨갱이가 그런 선진적 개념을 개발했을 리 없다는 반발이 있었다는군요;; 작전술 개념 도입 과정에서 미군 내부의 논쟁은 기록이 있지만 현재 대외비라서 공개할 수 없으니 아쉽습니다. 민간의 독일군 애호가들이 보내는 반발과 빨갱이 또는 러시아 첩자 매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행이 레이건 시대는 매카시 시대는 절대 아니었고,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의 풍토에서 글랜츠는 현역 중령-대령이자 포트 레븐워스 지휘참모대학의 교수로서 제도적 검열이나 외압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은 베트남전 이후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위기의식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소련군의 방법이 더 좋다면 그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강한 포용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미군의 강점이라 할 만하죠. 그 결과가 1986년판 교범에 작전술 개념을 도입하고, 1988년에는 훈련교리사령부 직할로 소련군사연구소를 창설하며 그 소장에 글랜츠를 임명한 것이 되겠습니다.
추가로 최근의 미러 대립 때문인지 글랜츠 박사님은 자신이 지금 활동 좀 해도 FBI가 감시하진 않을 거라는 드립을 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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